지난 회차에서 소개한 폴란드에 관한 일반사항에 이어 폴란드의 신화와 역사를 요약해본다. 우리나라에 단군신화가 전해져오듯, 폴란드에도 레흐(Lech) 신화가 전해온다. 천년도 넘은 옛날 비스와(Wisla) 강 상류에는 슬라브족이 살고 있었다. 레흐(Lech), 체흐(Czech), 루스(Rus)라는 삼형제를 둔 족장이 죽은 뒤 이들은 영지를 나누었는데, 각자의 영지가 너무 작아 신천지를 찾아 떠나기로 했다.
삼형제는 몇 달을 여행한 끝에 초원의 언덕에 서 있는 커다란 참나무와 그 가지에 앉은 신비로운 흰 독수리를 발견했다. 흰 독수리를 상서로운 징조로 여긴 큰아들 레흐가 나무에 올라 주변을 살펴봤다. 북쪽에는 커다란 호수가 보이고, 동쪽으로는 기름진 평야가 끝없이 이어졌다. 서쪽에는 목초지가 펼쳐진 끝에 울창한 숲이 있었다.
레흐의 이야기를 들은 체흐는 남쪽으로, 루스는 동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레흐는 흰 독수리가 둥지를 틀고 있는 언덕을 중심으로 새로운 정착지를 세웠고, ‘그니에즈노 (Gniezno)’라 하여 폴란드 왕국의 첫 번째 수도가 된다. ‘새의 둥지’라는 의미의 폴란드어 ‘그니아즈도 (Gniazdo)’에서 유래한 것이다.
처음에는 레흐의 이름을 따서 ‘레흐 부족의 나라(Lach, lengyel, Lechistan)’로 부르다가 뒤에 북부 슬라브족이 합쳐지면서 생긴 ‘폴란(Polan)족’의 이름을 따서 ‘폴란드’가 됐다는 것이다. 한편 남쪽으로 내려간 체흐는 체코를 세웠고, 동쪽으로 간 루스는 러시아를 세웠다고 전한다. 주변의 경쟁상대인 러시아나 체코는 동생의 나라라는 일종의 우월감 같은 것을 고취시키기 위한 전설이 아닐까 싶다.
전설은 그렇다 치고, 유럽의 초기인류는 50만 년 전부터 유럽 중앙부에서 살고 있었기 때문에 폴란드 역시 석기시대부터 인류가 거주했을 것이다. 기원전 5500년 무렵에는 신석기문명이, 기원전 2400~2300년 무렵에는 청동기 문명이 시작됐으며, 철기문화는 기원전 750~700년경 시작됐다.
기원전 400년경에는 라테인(La Tène)문화의 켈트족이 이주해 들어왔고, 이어서 게르만족이 이주했다가 기원 500년 무렵 게르만족의 대이동 시기에 빠져나갔다. 그리고 인도유럽어부족에 속하는 발트족이 북동부의 삼림지역에 정착했다. 지금의 리투아니아와 라트비아 사람들이 이들 부족이다. 그리고 9세기 무렵에는 앞서 적은 폴란드의 시원전설에 등장하는 슬라브족이 이주해 들어와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이후의 역사는 뒤에 소개하기로 한다.
짐을 찾아 공항을 나선 것은 3시 10분이다. 도착해서 1시간 만에 공항을 나설 수 있었으니 입국절차가 아주 빠르게 진행된 셈이다. 한 나라의 수도를 드나드는 국제공항이 참 조촐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바르샤바는 폴란드의 중동부에 위치한 도시로 비스와(Wisła) 강이 도심을 관통한다.
2018년 12월 기준으로 도시 인구 177만7972명, 광역으로 확대하면 310만844명이 거주하는 폴란드 최대 도시이자 수도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시절까지는 크라쿠프가 수도였다. 공화정시절인 1596년 지그문트 3세가 수도를 바르샤바로 옮긴 이래로 폴란드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로 발전했다.
원래 어촌이었던 바르샤바는 고대 폴란드어로 ‘Warszewa(바르세바)’ 또는 ‘Warszowa(바르소바)’라고 부른 바르샤바(Warszawa)는 ‘바르슈(Warsz)의 것’이라는 뜻이다. 바르슈는 슬라브어에서 유래한 남성명사 ‘Warcisław’의 축약어다. 그리고 ‘-awa'라는 어미는 큰 마을이라는 의미다.
한편 민간에 전해오는 전설에 따르면 바르샤바라는 이름은 어부 바르스(Wars)와 그의 아내 사바(Sawa)로부터 온 것이라고 한다. 사바는 비스와 강에 사는 인어였는데, 바르스와 사랑에 빠져 결혼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바르슈는 오늘날 마리엔슈타트(Mariensztat) 구역에 속한 마을을 소유했던 12~13세기 귀족이었다.
바르샤바의 일정은 비스와 강변에 있는 우지엔키 공원(Łazienki Królewskie) 안에 있는 쇼팽 기념비에서 시작한다. 길이 1047㎞인 비스와(Wisła) 강은 폴란드에서 가장 길며 유럽대륙에서 9번째로 긴 강이다. 비스와 강은 폴란드 남쪽 국경 부분에 걸쳐있는 카르파티아산맥 서쪽의 바라니아 고라(Barania Góra, 양(羊)의 산)의 서쪽 기슭에서 기원하는 희고 작은 비스와(Biała Wisełka, 비알라 비셀카)와 검고 작은 비스와(Czarna Wisełka, 크차르나 비셀카)라는 두 개의 물줄기에서 시작된다. 비스와 강은 발트해 연안의 그단스크(Gdańsk)에 이르는 동안 크라쿠프(Kraków), 산도미에스(Sandomierz), 바르샤바, 비드고슈츠(Bydgoszcz) 등, 폴란드의 주요 도시를 거친다.
비스와라는 이름은 로마시절 폼포니우스 멜라(Pomponius Mela)가 비스툴라(Vistula)라고 기록했고(서기 40년), 플리니(Pliny)는 서기 77년에 비스틀라(Vistla)라고 기록했다. 비스와는 인도유럽어에서 ‘스며나와 천천히 흐른다’라는 의미의 ‘u̯eis-’에서 유래한다. 비스와 강의 전체 배수면적은 19만3960㎢로 87%가 폴란드 영역이며 나머지에 벨로루시, 우크라이나 그리고 슬로바키아의 일부가 포함된다. 비스와 강의 배수면적은 폴란드 전체 영토의 54%를 차지한다.
76헥타르(ha)에 달하는 우지엔키 공원(Łazienki Królewskie)은 바르샤바에서 가장 큰 공원이다. 중세에 이 지역은 사냥터 역할을 하는 동물원이 있었다. 17세기 무렵 군사령관 스타니스와우 헤라클리우스 루보미르스키(Stanisław Herakliusz Lubomirski)의 지시로 틸만 반 가이렌(Tylman van Gameren)이 바로크 양식으로 설계한 욕탕을 지었던 것에서 ‘욕탕’을 뜻하는 우지엔키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 뒤로 18세기에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마지막 통치자 스타니스와우 아우구스트 포니아토프스키(Stanisław Antoni Poniatowski(재위 1764~1795년)가 이곳에 궁전과 빌라, 고전주의 양식의 장식용 건물, 기념비 등을 조성했다. 1918년 공원으로 지정됐다.
일행은 쇼팽 기념공원에서 설명을 듣고 돌아보았지만, 우지엔키 공원의 다른 부분을 볼 여유는 없었다. 가이렌이 설계해 1680년에 지은 바로크식 목욕탕, 아일궁전(Pałac Na Wyspie)을 비롯해, 고전주의 양식의 원형극장과 섬 무대, 작은 백악관, 17세기 말 폴란드 왕이자 리투아니아의 대공이었던 얀 3세 소비에스키(Jan III Sobieski)의 기마상, 18세기에 지은 말굽모양의 옛 온실, 그리고 19세기에 러시아의 차르 알렉산더 2세가 지은 새 온실 등, 볼거리가 엄청 많다는데 아쉽다.
쇼팽 기념공원에 있는 쇼팽의 동상은 그의 탄생 100주년이 되는 1910년에 세울 예정으로 1907년 와쵸프 시마노프스키(Wacław Szymanowski)가 설계를 맡았다. 하지만 설계에 대한 이견이 제기됐고, 제1차 세계대전이 이어지면서 1926년에 이르러서야 주조돼 제막됐다. 바르샤바 남쪽 와초크(Wąchock) 지역에서 나는 붉은 사암으로 만든 받침대는 오스카 소스노브스키(Oskar Sosnowski) 교수의 작품이다.
앉아있는 버드나무 아래 앉은 쇼팽의 머리 위로 휘날리는 나뭇가지는 피아니스트의 손과 손가락을 연상케 하고, 쇼팽의 머리 오른쪽으로 뻗은 나뭇가지의 끝 부분은 폴란드 독수리의 머리를 떠올리게 한다. 쇼팽 동상에 담긴 의미 때문인지 1940년 5월 31일 폴란드를 점령한 독일군은 쇼팽의 동상을 파괴했다. 다음 날 동상이 서있던 장소에서 다음 같은 내용을 적은 쪽지가 발견됐다고 전한다.
“누가 나를 파괴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왜 그랬는지는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나는 당신들의 지도자의 장례식에서 연주하지는 않을 것이다.” 쇼팽의 동상을 에워싼 꽃밭의 오른쪽 바깥에는 프란츠 리스트의 흉상이 서있다. 쇼팽의 재능을 알아보고 무명의 쇼팽을 파리 사람들에게 알려 명성을 얻게 한 리스트이고 보면 폴란드 사람들의 이런 대접이 서운할 수도 있겠다.
‘피아노의 시인’이란 애칭을 가진 프레데리크 프랑수아 쇼팽(Frédéric François Chopin)은 폴란드의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다. 바르샤바 근교에서 프랑스인 아버지 니콜라 쇼팽과 폴란드인 어머니 유스티나 크자노프스카 사이에서 태어났다. 쇼팽의 폴란드 이름은 프리데리크 프란치셰크 호핀(Fryderyk Franciszek Chopin)이다.
어려서부터 어머니로부터 피아노를 배운 그는 6살이 되던 해부터는 체코출신의 피아니스트 보이치에흐 지브니(Wojciech Żywny)로부터 피아노를 배웠다. 8살 때 처음 공연을 가졌고, 19살에는 유럽 여러 나라로 연주여행을 다녔다. 1930년 빈에 도착했을 때, 바르샤바에서 러시아 통치에 반발하는 혁명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전장에 나가겠다는 편지를 보냈지만, 아버지는 조국을 위해 음악에 매진하는 것도 애국이라는 답장을 받게 된다.
1831년 파리에서 바르샤바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혁명’이라는 격정적인 연습곡을 작곡하기도 했다. 파리에 머물게 된 쇼팽은 프란츠 리스트, 빈첸초 벨리니, 외젠 들라크루아를 비롯하여, 헥토르 베를리오즈와 로베르트 슈만과도 친교를 맺었다. 때로는 그들의 예술세계를 비판하기도 했지만 그들에게 작품을 헌정하기도 했다. 1836년에는 소설가 조르주 상드를 만나 사랑에 빠졌다. 두 사람의 애인관계는 상드 자녀와의 문제로 헤어질 때까지 9년간 이어졌다.
1840년대 들어 쇼팽의 건강이 나빠졌고, 1849년 10월 17일 사망했다. 공식적인 사인은 폐결핵이지만 낭포성 섬유증이나 폐기종 등이 의심되기도 한다. 로마가톨릭인 성 마들렌 교회에서 열린 그의 장례식에는 유언에 따라 모차르트의 레퀴엠이 연주됐다. 쇼팽의 시신은 파리에 있는 페르 라셰즈(Père Lachaise) 묘지에 안장됐지만, 그의 심장은 바르샤바의 십자가 교회에 있는 기념비에 묻혔다.
쇼팽추모공원에서 돌아 나오다 보면 공원 입구에 서있는 동상을 만난다. 1918년부터 1922년까지 폴란드 제2공화정의 수령으로 독재를 펼쳤으며, 1920년부터는 폴란드군의 원수를 겸했던 유제프 클레멘스 피우수트스키(Józef Klemens Piłsudski, 1867년 12월 5일~1935년 5월 12일)다.
리투아니아 출생인 그는 1906년 오스트리아 당국의 묵인 아래 크라쿠프에 군사학교를 설립해 800여명의 정예대원을 양성했다. 피우수트스키의 준군사조직은 1908년 2000여명으로 늘어났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그는 바로 폴란드 군단(Polskie)을 창설하고, 동맹군과 함께 동부전선에서 러시아와 싸웠다. 하지만 1917년 전황이 바뀌면서 그는 동맹국에 대항했다.
1918년 동맹국의 패전으로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폴란드는 독립을 되찾아 폴란드 제2공화국이 결성됐고, 피우수트스키는 국가수령이 됐다. 이듬해인 1919년 피우수트스키가 소비에트연방에게 전쟁을 선포했고, 폴란드-소비에트연방 전쟁이 일어났다. 1921년까지 계속된 이 전쟁을 통해 폴란드는 러시아에게 할양됐던 우크라이나 서부와 벨라루스를 확보했다.
피우스트스키는 폴란드 독립의 영웅이며 러시아에 빼앗겼던 영토를 되찾은 영웅이기도 하다. 폴란드 해군 조선소에서 주조된 피우스트스키 동상은 그가 지휘한 바르샤바 전투 75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1995 년 8월 14일, 폴란드 대통령, 레흐 바웬사(Lech Wałęsa) 및 피우수츠키의 딸인 야부르가 피우수스카(Jadwiga Piłsudska) 등이 참석한 가운데 제막됐다.
글·양기화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진료심사평가위원회 평가책임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