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기화의 인문학기행] 발트, 열일곱 번째 이야기

[양기화의 인문학기행] 발트, 열일곱 번째 이야기

기사승인 2019-12-20 02:44:21

대통령궁을 끝으로 빌니우스 구시가지의 구경을 마쳤다. 도로에 나와 보니 바로 빌니우스 대성당 앞이었다. 여기에서 잠시 자유시간을 가졌다. 그러고 보니 종탑이 대성당과 떨어져 있는 모습이 생소하다. 종탑이 성당건물에서 떨어져 있는 것은 이탈리아 밖에서는 드물게 보는 일이라고 한다. 

일부에서는 종탑이 있던 자리에 있는 이교도의 작은 사원을 철거하고 종탑을 세운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많은 학자들은 지금의 광장 부근을 지나는 중세 성곽에 포함돼있던 탑 가운데 하나일 것이라고 믿는다. 탑의 윗부분은 18세기에 추가된 것이며 19세기 들어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보완한 것이라고 한다.

종탑 가까이 대성당광장에는 가지런하게 새겨진 발자국과 함께 ‘기적’을 의미하는 리투아니아어 ‘스테북클라스(Stebuklas)’라는 단어를 새겨놓은 타일이 있다. 단어의 앞뒤에 있는 ‘S’는 하나로 겹쳐 썼다. 이 타일에는 발꿈치를 대고 시계방향으로 3바퀴를 돈 후, 한번 뛰고 박수를 치면 소원이 이뤄진다는 지역 미신과 발트연안국가 사람들이 이뤄낸 역사적 기적이 함께 하고 있다. 

리투아니아는 1939년 8월 23일부터 소련을 구성하는 공화국이 됐다. 1989년 들어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 등 소련 사회가 변화의 조짐을 보이고 있던 8월 23일, 200만명에 이르는 연안국가 국민들이 손을 맞잡고 나섰다. 에스토니아의 탈린에서 시작해 라트비아의 리가를 거쳐 이곳 리투아니아의 빌니우스에 이르는 675.5㎞의 거리를 이었던 것이다.

바로 발트의 길(Baltijos kelias)을 완성한 것이다. 발트의 길은 이곳 빌니우스의 스테북클라스에서 끝난다. 발트연안국가 사람들의 평화적 시위가 결실을 맺어 7개월 뒤에는 리투아니아가 소련의 공화국 가운데 처음으로 독립을 선언할 수 있었다. 스테북클라스가 기적을 일궈낸 셈이다.

현실로 돌아와, 빌니우스 성당 오른쪽은 광장이다. 저녁에 행사가 있는 듯, 광장에는 무대가 마련돼 있고 방송국 장비들도 늘어서있다. 성당 뒤에 있는 하얀 건물은 리투아니아 대공 궁전이다. 성당과 대공 궁전은 앞서 이야기했던 빌니우스 성단지의 아래 성이다. 대공 궁전부지에는 13~14세기의 석조 구조물과 함께 목조로 된 궁전이 있었다고 한다. 

1419년의 대규모 화재로 무너진 잔해들을 철거하고 고딕양식으로 된 석조 궁전이 지어졌다. 15세기 말에 대공이 된 알렉산드라스 요가일라이티스(Aleksandras Jogailaitis)는 모스크바 대공 이반 3세의 딸과 결혼한 뒤에 아래 성으로 옮겨 살았다. 

리투아니아가 황금기를 연 지기만타스 1세 세나시스(Žygimantas Senasis)와 그의 아들 지기만타스 3세 아우구스타스(Žygimantas III Ausgutas)의 치세에 궁정의 정원과 건물을 확장했다. 당시 유럽에서 가장 많은 책과 태피스트리를 모아들였을 뿐 아니라, 바티칸보다 많은 보물을 소장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 무렵 궁전은 이탈리아에서 초빙한 건축가들에 의해 르네상스 양식으로 개조됐다.

이후 지기만타스 바자(Žygimantas Vaza) 재위 시절인 17세기로 넘어갈 무렵에는 바로크 양식으로 다시 개조됐다. 폴란드 바르샤바의 왕궁 광장에 있는 지그문트 3세 바사 기둥의 주인공이다. 리투아니아 대공과 폴란드 왕을 겸하다보니 폴란드어와 리투아니아어로 된 이름이 조금씩 달라 헷갈린다. 그래도 리투아니아에서는 리투아니아어로 적는 것이 옳지 않을까 싶다.

각설하고 1655년 모스크바 공국이 쳐들어와 빌니우스를 점령했고, 6년이 지나 폴란드 군이 도시를 다시 탈환하기까지 궁전은 화재 등으로 파괴되고, 소장하고 있던 보물들은 약탈당했다. 이후에 150여년 동안 버려졌다가, 18세기 후반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이 무너진 뒤에는 가난한 마을 사람들이 들어와 살게 됐다. 

리투아니아가 분할돼 러시아제국에 편입된 1801년에는 유대상인 아브라함 슐로스버그(Abraham Schlossberg)에게 팔린 동쪽 날개의 일부를 제외하고 대공 궁전은 완전히 철거됐다. 1831년 11월 봉기 있은 뒤 러시아 제국의 군대가 차지한 이래로 나라의 운명이 바뀌는데 따라 리투아니아군, 폴란드군, 독일군, 소련군이 대공 궁전을 사용했다. 

1980년대 말부터는 궁전에 대한 고고학적 발굴이 시작됐지만, 출토된 유물의 보존문제가 대두됐다. 복원에 필요한 경비조달 문제, 복원이 오히려 빌니우스 구시가의 경관을 해칠 수 있다는 견해 등이 나오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다. 하지만 2000년 리투아니아 의회가 궁전을 복원하기로 결의하면서 본격적인 복원작업이 시작돼 2018년 7월 6일 복원공사를 마무리하고 국립박물관으로 개관하게 됐다.

대공 궁전의 앞에 있는 동상은 리투아니아 대공국을 창설한 게디미나스(Gediminas)인데, 빌니우스의 건설과도 연관이 있다. 전설에 따르면 게디미나스가 빌니아 강이 네리스 강과 합류하는 스벤타라기스(Šventaragis) 계곡의 신성한 숲으로 사냥을 나갔다. 어느 날 사냥을 마치고 잠을 자는 동안 꿈을 꿨는데, 언덕 위에 서있는 거대한 철늑대가 마치 수백 마리의 늑대가 울부짖는 것처럼 큰소리로 울부짖는 꿈이었다. 

잠에서 깬 왕은 제사장 리즈데이카(Lizdeika)에게 꿈을 해석해달라고 요청했고, 제사장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는 왕과 리투아니아의 운명에 관한 것입니다. 철늑대는 당신이 이곳에 세울 도시와 성을 나타냅니다. 이 도시는 리투아니아의 왕이 살며 나라를 다스리는 곳이 될 것입니다. 왕이 이룬 영광이 세상에 울려 퍼질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철늑대가 올라앉아 울고 있던 언덕에 왕의 기운이 서려있으므로 성을 짓고 살면 왕국이 번영할 것이라고 예언한 셈이다. 이에 왕은 제사장의 말에 따라 철늑대가 서있던 언덕에 도시를 건설하고 근처를 흐르는 빌니아 강의 이름을 따서 빌니우스라고 했다.

리투아니아 대공 궁전 앞에 있는 게디미나스(Gediminas) 기념비는 조각가 비타우타스 카슈바(Vytautas Kašuba)가 제작한 것으로 1996년에 공개됐다. 기념비에 사용된 청동은 리투아니아 국경경비대에서 내놨고, 대리석 기단은 우크라니아 정부의 선물이다. 동상의 주조는 에스토니아의 탈린에서 맡았다고 한다.

자유시간이 끝나고 8시에 모인 일행은 대성당 맞은편에 있는 식당에서 늦은 저녁을 먹었다. 돼지고기를 튀김옷으로 입혀 튀긴 것인데 먹을 만했다. 식사를 마치고 숙소로 향했다. 빌니우스 구시가에서 버스로 25분 정도 걸리는 곳에 있는 빌니우스 그랜드 리조트(Vilnius Grand Resort)인데 18홀 골프장 안에 있는 리조트다. 골프장은 발트 제국 가운데 유일한 PGA 설계 코스라고 한다. 

숙소로 향하던 중에 갑자기 번개가 치면서 천둥소리가 뒤따른다. 그리고는 바로 비가 억수같이 쏟아진다. 숙소에 도착한 9시 15분경에는 빗줄기가 다소 가늘어진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까? 이날은 시작과 마무리가 뭔가 꼬인 듯 묘한 날이다. 좋지 않은 일이 겹칠 때 쓰는 설상가상(雪上加霜)이라는 사자성어보다는 우리말 ‘곰비임비’를 쓰면 좋겠다는 생각을 문득 해본다. 

‘곰비임비’는 ‘청구영언’에 실린 사설시조 ‘님이 오마하거늘’을 빌어 노랫말을 지었다는 송골매의 노래 ‘하늘나라 우리 님’의 노랫말에도 나오는 단어다. ‘물건이 거듭 쌓이거나 일이 계속 일어남을 나타내는 부사어’이니 좋은 일이 겹쳐 일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쓰면 좋을 듯하다. 골프장 안에 있는 리조트이라선지 방이  널찍해서 좋다. 

여행 4일째다. 전날 늦게 숙소에 든 탓도 있겠지만, 시차도 조금 줄어들어서인지 잠이 깊었던 모양으로 5시 반에 깨어났다. 스마트폰에 있는 엑셀앱으로 어제 일정을 갈무리했다. 6시 반에 창문을 열었는데 벌써 해가 꽤 올라왔다. 

배정받은 방이 6층에 있어 주변 풍광이 한눈에 들어온다. 창밖에는 가까이 꽤 넓은 호수가 있고, 그 건너편으로 골프코스가 펼쳐졌다. 감상에 젖었다 7시에 식당에 내려갔다. 차림이 풍성하다. 널찍해 보이는 식당이 꽤나 붐빈다. 골프장 안에 있는 리조트라서 묵고 있는 손님이 많은 모양이다.

 9시에 숙소를 나설 예정이라 아침 일정이 여유롭다. 식사를 마치고 호숫가로 산책을 나갔다. 호숫가에는 그늘집, 오리배, 보트와 같은 물놀이기구와 선베드 등이 있는 것으로 보아 골프와 함께 물놀이를 할 수도 있을 듯하다. 호수 저 멀리에서는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품이 북한강변 어디쯤의 분위기도 난다. 9시에 숙소를 나서 카우나스(Kaunas)로 향했다. 빌니우스에서 카우나스까지는 버스로 1시간 20분정도 걸린다. 

적다보니 빌니우스에 대한 이야기를 빠트렸다. 리투아니아 대공국을 창설한 게디미나스가 건설한 도시라는 전설은 앞서 소개했지만, ‘빌니우스’라는 단어는 빌니아(Vilnia)강에서 유래한 이름으로 과거에는 빌나(Vilna)라고 불렀다. 이는 도시의 영어이름으로 남아있다.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수도였던 빌니우스는 1795년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러시아 3국에 의한 제3차 폴란드 분할 당시 러시아제국에 합병돼 빌나현의 현도가 됐다. 

제1차 세계대전 기간인 1915~1918년 사이에 독일군이 점령했다가 폴란드 자위대, 볼셰비키군, 폴란드군, 소비에트 연방군 등이 점령하는 혼란기를 거쳤다. 1920년 소련군이 바르샤바전투에서 패하면서 리투아니아는 독립을 이뤘지만, 빌니우스는 폴란드군이 점령해 괴뢰국가인 중앙리투아니아 공화국에 속하게 됐다. 

이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독-소 불가침조약에 따라 소련이 합병하지만, 곧 독일군이 점령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에는 리투아니아 소비에트사회주의 공화국의 수도였고, 1991년 소련에서 독립한 리투아니아 공화국의 수도이기도하다. 2019년 기준 인구는 57만806명으로 리투아니아 최대 도시이며, 발트연안에서 2번째로 큰 도시다.

카우나스는 네무나스(Nemunas) 강이 네리스(Neris) 강과 만나는 두물머리에 건설된 도시다. 네무나스 강은 남자의 강, 네리스 강은 여자의 강이라고 한다. 네무나스 강을 막아 만들어진 커다란 네무나스 호수가 가까이 있다. 2019년 기준 32만8763명이 살고 있는 리투아니아에서 2번째로 큰 도시다.

바르샤바 전투에서 소련이 패전한 1920년부터 1939년까지 독립 리투아니아의 임시수도였다. 폴란드 군이 빌니우스를 점령했기 때문이다. 1940년 소련이 리투아니아 전체를 점령하고 리투아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을 만들었다. 당시의 카우나스는 문화적으로나 학문적으로도 융성했다. 리투아니아 국가 낭만주의 건축양식이라고 하는 아르데코 양식의 건물이 셀 수 없이 세워졌고, 유명한 가구나 실내장식, 패션 등 카페문화가 확산됐다.

전설에 따르면 카우나스는 고대 로마시절 건설됐다고 한다. 네로황제의 폭정을 피해 로마를 떠난 팔레몬(Palemon)이라는 귀족이 리투아니아에 이르렀는데, 그가 죽은 뒤에 영토를 바르쿠스(Barcus), 쿠나스(Kunas), 스페루스(Sperus)라는 세 명의 아들이 나누고, 카우나스는 쿠나스가 차지했다는 것이다. 쿠나스는 네무나스 강과 네리스 강이 만나는 장소에 요새를 지었고, 마을이 커지면서 쿠나스의 이름을 따서 부르게 됐다는 것이다. 카우나스의 교외에는 팔레모나스(Palemonas)라는 마을도 있다.

글·양기화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진료심사평가위원회 평가책임위원

1984 가톨릭의대 임상병리학 전임강사
1991 동 대학 조교수
1994 지방공사 남원의료원 병리과장
1998 을지의대 병리학 교수
2000 식품의약품안전청, 국립독성연구원 일반독성부장
2005 대한의사협회 의료정책연구소 연구위원
2009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상근평가위원
2019 현재, 동 기관 평가책임위원
오준엽 기자
oz@kukinews.com
오준엽 기자
이 기사 어떻게 생각하세요
  • 추천해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추천기사
많이 본 기사
오피니언
실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