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한표의 ‘사진 하나 생각 하나’] 나는 아침마다 왜 글을 쓰는가?

[박한표의 ‘사진 하나 생각 하나’] 나는 아침마다 왜 글을 쓰는가?

기사승인 2019-12-21 07:56:01

아침의 글글쓰기는 습관에 젖은 일상의 '나'를 버리고, 더 나은 '나'를 찾기 위한 마음가짐이다. 나는 이 행위를 수련(修練)으로 간주한다. 그래 나는 매일 쓴다. 왜냐하면 내 삶의 가장 중요한 일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수련이란 나에게 "삶의 군더더기를 버리는 시간"(배철현)이다. 수련은 일상적으로 흘러가버리는 양적인 시간으로부터 나를 탈주시키는 연습이다. 이 글을 읽는 사람도 나와 함께 일상을 탈출시키는 시간이었으면 한다. 그런데 어떤 이는 그런 시간을 안 갖는다. 글이 어렵고, 길다고 투박한다.

글쓰기의 수련 시간은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물과 같은 시간을 강제로 멈추게 하는 행위이다. 시간의 소중함을 포착해 질적으로 다른 순간으로 만들겠다는 의지의 순간이다. 그런 의미에서 내 노트북의 앱 '원노트(OneNote)'는 일종의 수련 도장(道場)이다. 나를 수련 시켜 이전과 전혀 다른 새로운 나를 탄생시키는 거룩한 공간이다. 예수님을 변화시킨 예루살렘의 겟세마네 동산, 붓다의 보리수 아래, 무함마드의 메카 외곽의 히라(Hira) 동굴과 같은 곳이다.

가능한한, 나는 아침에 글쓰기를 한다. 아침은 하루를 위해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순간이다. 하루 동안 벌어질 일들은 '지금-여기'에서 '내가 원하는 나 자신'이 되기 위해 부단히 수련할 때 만들어지는 미래이다. 그 미래는 '지금-이 순간'에 몰입해 최선을 다할 때 자연스레 다가오는 신의 선물이다.

오늘 아침은 공간의 문제이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각자에게 주어진 환경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자신의 위치를 관조하고 자신의 미래를 능동적으로 선택하지 않는 한 우리는 환경의 노예가 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런 환경에 안주하는 것이 편하고 익숙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미래를 능동적으로 선택하려면, '무엇'을 추구하느냐가 아니라, 그 무엇을 '어떻게' 그리고 '왜' 하는지 질문을 해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 무엇을 빛나게 하는 것은 무엇 자체가 아니라 무엇을 대하는 나의 태도이기 때문이다.

'무엇'이라는 명사보다 중요한 것이 그 무엇을 꾸미는 '전치사'이다. 영어로 표현하면, 무엇에 해당하는 'what'을 위대하게 만드는 것은 그 앞에 붙는 전치사, 예를 들면 '왜(for)'나 '어떻게(by)' 같은 것들이다. 이 전치사는 나의 신념(信念)에서 나온다. 신념은 특정 종교의 교리를 믿거나 이데올로기에 동의하는 행위가 아니다. 신념은 자신의 삶을 깊이 되돌아보고, 자신을 위한 소명(召命)을 깨닫고, 그것을 완수하는 것을 최우선 순위에 두고 매진하는 삶이다. 그게 나에게는 아침 글쓰기이다.

나의 소명(mission), 자신을 위한 감동적이고 창의적인 임무는 인생이라는 무대에서 내가 맡은 배역(配役)이다. 배역이란 자신에게 주어진 역사와 환경을 응시해 자신에게 가장 어울리는 최적의 임무이다. 그 임무를 발견하는 것이 '깨달음'이다. 

그러나 그 임무가 주는 자리는 잠시 지나간다. 고 정채봉 작가의 <처음의 마음으로 돌아가라>에 나오는 이야기를 옮긴다. 세탁소에 갓 들어온 새 옷걸이에게 헌 옷걸이가 한마디 했다. “너는 옷걸이라는 사실을 한시라도 잊지 말길 바란다.” "왜 옷걸이라는 것을 그렇게 강조하시는지요?” “잠깐씩 입혀지는 옷이 자기 신분인 양 교만해지는 옷걸이들을 그동안 많이 보았기 때문이다.” 

간디는 "행복이란 생각, 말, 행동이 조화를 이룬 상태"라고 했다. 내 삶에서 중대한 결정을 스스로 내리고, 결과를 고민하지 않고, 나 자신과 내 신념에 충실히 임할 용기를 냈을 때, 우리는 행복하다. 그럴 때 우리는 자기 자신과 하나가 된다. "내 자리가 곧 내 정체성은 아니다." 내 배역이 나가 아니다. 나는 나이다. I am who I am. 나의 '단점'도 내 정체성의 일부일 뿐이지, 내 정체성의 전체가 아니라는 생각도 여기서 나온 것이다. 내가 가난하다는 것도 내 정체성의 전부가 아니다. 단지 일부일 뿐이다. 나의 멋진 정체성은 여럿이다.

어쨌든 나의 아침 일과 중 글 쓰기는 일종의 기도(祈禱)이다. 이때 기도는 나 자신을 위한 최선을 찾는 행위이고, 습관적으로 해오던 생각과 말, 행동을 하지 않겠다는 다짐에서 출발한다. 우리가 말하는 기도는 흔히 절대자인 신에게 자신이 원하는 욕망을 요구하는 행위로 알려져 있다. 기도를 기복(祈福)으로 생각한다. 그런 의미의 기도는 자신의 욕망을 강화하기 위해 신의 이름을 이용하는 자기만족일 뿐이다.

기도의 '기(祈)'자를 풀이하면, '빌 기'자이지만, 날카로운 도끼(斤)를 자기 앞에 겨누는(示) 수련을 뜻한다. 도(禱)는 목숨(壽)을 자기 앞에 내놓고 구(求)하는 행위이다. 기도는 자신에게 주어진 오늘이라는 시간을 위대하게 만들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놓는 굳은 결심이다. 기도는 무엇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하지 않아도 되는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가려내는 결단의 순간이다. 그렇게 해서 기도는 자신만의 심연(深淵)으로 들어가 자신에게 쌓여 있는 적폐(積弊)를 제거하는 행위이다. 배철현의 『수련』이라는 책을 일고 내 생각으로 정리한 것이다.

배철현 선생은 말한다. "인생은 마라톤과 같다. 긴 여정을 무사히 완주하기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몸과 마음을 최대한 가볍게 하는 것이다. 오늘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을 섬세하게 가려내는 행위가 곧 기도이다."

그래 오늘 아침도 일찍 일어나 기도하고 글을 쓴 후, 그것을 함께 공유한다. "12월에/ (…) / 또 한 해가 가고/나는/무엇을 보내고 무엇을 기다려야 하는 것일까." 국민건강보험 공단에서, 해를 넘기기 전에, 건강검진을 해야 한다고 해서, 어제 저녁은 금식을 했고, 장 청소를 하고 있는 중이다. 덕분에 주님을 이틀이나 모시지 않으니, 머리가 맑다. 그리고 속을 비우니, 가끔씩은 단식을 할 필요가 있음이 느껴지는 아침이다.

12월에/박상희

가슴에 담아두어 답답함이었을까
비운 마음은 어떨까

숨이 막혀 답답했던 것들
다 비워도 시원치 않은 것은
아직 다 비워지지 않았음이랴

본래 그릇이 없었다면
답답함도 허전함도 없었을까
삶이 내게 무엇을 원하기에
풀지 못할 숙제가 이리도 많았을까

내가 세상에 무엇을 원했기에
아직 비워지지 않은 가슴이 남았을까
돌아보면 후회와 어리석음만이
그림자처럼 남아 있는 걸.

또 한해가 가고
나는
무엇을 보내고 무엇을 기다려야 하는 것일까.

박한표(대전문화연대 공동대표, 경희대 겸임교수) 

최문갑 기자
mgc1@kukinews.com
최문갑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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