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오성기를 든 사내가 시위대를 향해 조롱 섞인 욕설을 쏟아냈다. 그는 스마트폰으로 실시간 방송을 하고 있는 듯 했다. 주위의 취재진과 시민의 얼굴을 주욱 카메라로 찍더니 손에 든 확성기로 힘껏 외쳤다. “이런 배신자들!” 21일 오후 2시(현지시간) 홍콩 구룡섬내 침사추이에 위치한 대형 쇼핑몰 하버시티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 “시민 발을 묶어둔다”
“홍콩 시위 격화, 시위현장 접근 및 사진 촬영 자제, 신변안전 각별 유의. 홍콩은 2단계 여행경보(황색경보, 여행자제) 발령 지역입니다.”
20일 오후 쳅랍콕 홍콩 국제공항. 휴대전화를 열자 앞선 문자메시지가 날아왔다. 메시지만큼이나 공항의 분위기도 싸늘했다. 입국 심사를 기다리고 있는데, 공항 직원이 내게 따라오란 손짓을 했다. ‘또 시작이구나’란 생각이 들었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연기를 했다. 해외 취재마다 따로 끌려가 입국 심사를 받는 것은 퍽 불유쾌한 경험이다. 번거롭기도 하거니와 취조 같은 심사를 거치고 나면 감정의 소모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수차례 홍콩 방문시 이러한 요구는 처음 받는 것이어서 이번만은 적잖이 긴장이 되었다. 가까스로 심사를 통과해 공항 밖을 나왔지만, 공항의 모습은 기자가 알던 그곳과는 달라져 있었다. 공항고속철도는 폐쇄되어 있었다. 시위대의 공항집회 이후 공항 내 경찰의 수도 부쩍 늘어 있었다.
홍콩에 온지 이틀 만에 여러 ‘사건’이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됐다. 우선 이날 마카오를 방문 중인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포르투갈로부터 마카오의 중국 반환 20주년 경축행사에서 일국양제(一國兩制, One country two system)를 언급했다. “일국의 원칙을 지키면서 중앙(베이징)의 권위를 수호해야 한다.” 이날 신임 호얏셍 마카오 행정장관은 취임 선서를 통해 사실상 시 주석에 대한 충성을 맹세했다.
같은 날 홍콩 라이치콕에 수천 명의 시위대가 집결했다. 시위대는 체포된 시민 활동가들의 석방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조슈아 웡 등 주요 민주인사도 참석해 홍콩 및 중국 정부를 향한 비판 발언을 이어갔다. 또 이날 홍콩 타이포에서는 한 남성이 경찰에 연행됐다. 그는 경찰에게 발포한 혐의를 받았다.
이튿날인 21일 시진핑 주석이 마카오에 주둔한 인민해방군을 시찰했다. 그리고 이날 오후 홍콩 위안롱 지하철역과 침사추이 등 주요 역이 폐쇄 조치됐다. 위안롱역 인근 ‘요호’ 쇼핑몰에서는 집회가 예정돼 있었다. 지난 7월21일 지하철역사에서 발생한 시민 및 시위대를 향한 이른바 ‘백색테러’ 이후 매달 21일마다 위안롱역은 폐쇄를 되풀이하고 있었다. 이날 위안롱역이 또다시 폐쇄되자 한 홍콩 누리꾼은 “시민의 발을 묶고 있다”는 댓글을 썼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날 ‘대학’역이 재개통됐다. 지난달 집회 여파로 한 달여간 닫혀있던 역은 비록 보수를 마쳤지만, 아직 대중에게 개방되진 않았다. 재개장 후 대학역 출구에서 홍콩중문대학으로 이어지는 곳에 검문소를 설치됐다. 학생증이 없으면 출입은 불허됐다.
◇ 쇼핑몰서 꼬리 문 추격전
현재 홍콩내 집회는 산발적으로 진행되는 모양새다. 이날 하버시티에서의 기습 집회명은 ‘침사추이와 당신의 크리스마스 가게’. 젊은이들이 주도한 집회답게 퍽 발랄한 느낌이었다. 긴장되는 순간도 있었지만, 시위는 대체로 평화롭게 진행됐다. 긴장을 조성한 것은 시위대가 아닌 외부 무리였다. 무엇보다 무장 경찰의 모습은 매우 고압적이었다. 이날 경찰은 하버시티에 이르는 오스틴로드 등 주변 도로에 블록을 설치, 차량을 전면 통제했다. 이를 두고 한 현지기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광저우에서 본 경찰보다 이곳의 경찰이 더 많은 것 같다.”
현장에 도착했을 때 하버시티의 모든 입구마다 경찰 병력이 배치돼 있었다. 하버시티는 홍콩 구룡내 최대 쇼핑몰이다. 증축을 거듭한 터라 내부는 미로와 같고 상당한 규모를 자랑한다. 쇼핑몰 내외부 및 군중이 모일만한 인근 장소 모든 곳에 경찰이 투입됐고, 사복 경찰까지 감안하면 현지 기자의 말이 이해가 됐다.
현지 매체들은 페이스북과 유튜브 등 사회관계망(SNS)으로 현장 상황을 실시간 중계했다. 생중계로 시위대의 동선을 확인코자 했지만, 붐비는 인파와 복잡한 내부 구조가 앞을 막았다. 겨우 ‘프레스’ 현광 조끼를 착용한 현지 기자를 발견, 뒤따르고 있자니 이상한 광경이 발견됐다.
조끼를 쫓는 이가 기자 말고도 또 있었다. 사복 경찰이 뒤를 밟고 기자가 다시 그들을 쫓았다. 기이한 동행이었다. 시위대의 복장은 알려진 대로 검정 마스크와 모자, 후드티셔츠 차림이 많다. 사복 경찰의 복장도 시위대의 그것을 하고 있었다. 차이가 있다면 한쪽 귀에 무선 이어폰을 끼고 있다는 것 정도.
쇼핑 중인 관광객과 현지 주민. 내부에 진열된 고급 승용차 수십 대, 이를 두고 구매자와 딜러 사이의 실랑이. 쇼핑의 천국답게 여러 명품매장은 크리스마스 세일로 모객에 기를 올리는 틈바구니에서 ‘기이한 동행’은 한참이나 계속됐다. 그러다 시위 참여행렬을 만나면서 ‘동행’은 끝이 났다.
집회 참석자는 5대 요구(5 demands)를 의미하는 다섯 손가락을 허공에 대고 구호를 외쳤다. 노래도 불렀다. 참고로 5대 요구는 ▲송환법 완전 철폐 ▲경찰 강경진압 독립적 조사 ▲시위대 폭도 규정 철회 ▲체포된 시위대의 조건 없는 석방·불기소 ▲홍콩 행정장관 직선제 등이다. 5대 요구의 5는 일국양제의 숫자 ‘1’과 대구를 이룬다(“5 demands not one less”, 사진 참조).
시위대가 지나가면 점원과 손님 모두 하던 일을 멈추고 이들을 쳐다봤다. 박수를 치고, 노래도 같이 불렀다. 사진을 찍기도 했다. 다소 소극적이던 지지는 불청객이 나타나자 적극적 지지로 바뀌고 만다.
“위잉” 귀를 찢는 듯 한 확성기 소리가 귀를 때렸다. 곧이어 중국국가가 확성기로 요란하게 울렸다. 붉은 나시에 모자를 쓴 건장한 사내가 오성기를 흔들었다. 그는 이동식 마이크를 끌고 나타나 시위대를 향해 조롱과 모욕을 쏟아냈다. 취재진의 카메라가 동시에 사내를 향했다. 중국 전통 가요를 요란하게 튼 그는 쇼핑몰 곳곳을 누볐다. 시위대와 시민들은 실소를 보내거나 손가락 욕을 했지만, 남자는 개의치 않았다.
“영업에 방해가 됩니다.” “아니, 저 사람은 내버려두고 왜 우리한테만 그러는 거예요!” 사내가 사라지고 쇼핑몰 직원들이 시위대를 힐난하자, 보고 있는 한 중년 여성이 언성을 높였다. 여러 시민이 가세하자, 결국 직원들은 제지를 단념했다. 해가 지면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쇼핑몰의 화려한 크리스마스 트리는 빛을 밝혔지만, 경찰의 강경 진압은 밤이 되면서부터 본격화됐다.
오는 23일 대규모 집회를 앞두고 긴장감은 점차 고조되고 있었다.
홍콩=김양균 기자 angel@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