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기화의 인문학기행] 발트, 스물다섯 번째 이야기

[양기화의 인문학기행] 발트, 스물다섯 번째 이야기

기사승인 2020-01-30 02:28:00

전쟁박물관이 있는 화약탑에서 나오면 노란 벽에 문장들이 가득 그려진 집을 만난다. 맨 위에 라트비아의 문장을 비롯해 라티비아에 있는 개별 도시들의 문장을 모아놓은 문장탑이다. 문장탑에서 시작하는 발누 거리(Vaļņu iela)를 따라가다 만나는 첫 번째 사거리에서 왼쪽으로 돌면 자유기념비(Brīvības piemineklis)가 보인다. 구시가의 자유광장에 있는 자유기념비는 라트비아 독립전쟁(1918~1920) 동안 전사한 군인들을 기리기 위해 1935년에 제막된 것으로 라트비아의 자유, 독립 및 주권의 상징이다.

기념비의 건설계획은 1922년 라트비아의 총리 지그프리드 안나 마이에로비치스(Jigfrīss Anna Meierovics)가 주도했다. 공모전을 2차례 거듭했지만 선정작을 정하지 못하다가 1929년 3번째 공모전에서 조각가 칼리스 잘레(Kārlis Zāle)가 제안한 ‘별처럼 빛난다!(Mirdzi kā zvaigzne!)’라는 제목의 설계가 채택됐다. 자유기념비는 러시아 황제 표트르 대제의 기마상이 있던 자리에 세워졌다.

화강암, 석회암, 철근콘크리트 그리고 구리 등을 사용한 13개의 부분으로 구성된 자유기념비의 높이는 42m에 달한다. 화강암으로 된 직경 28m의 원형 기단의 앞부분은 장방형으로 보완했다. 뒤쪽의 입구 가운데 높이 1.8m인 10개의 계단이 있고, 그 양쪽으로 높이 1.7m 너비 4.5m, 두께 3m의 석회암에 라트비아를 상징하는 부조를 새겼다. 오른쪽에는 ‘라트비아의 소총부대(Latviešu strēlnieki)’를 왼쪽에는 ‘라트비아 민속가수(Latvju tauta: dziedātāja)’를 부조로 새겼다.

계단을 올라가면 안쪽으로 기념비를 받치는 기단을 앉혔다. 붉은 화강암으로 만든 2개의 직사각형 블록으로 구성됐다. 아래쪽은 높이 3.5m, 너비는 9.2m, 길이는 11m이며, 그보다 작은 상단 블록의 높이는 3.5m, 폭은 8.5m, 길이는 10m이며 네 귀퉁이에 라트비아의 상징 조형물을 뒀다. 상단블록의 정면 중앙에는 ‘조국과 자유(TEVZEMEI UN BRIVIBAI)’라고 새겼으며, 왼쪽에는 러시아혁명을 상징하는 ‘1905’를, 오른쪽에는 리가에서 가까운 ‘철교(Dzelzs tilta)에서 벌어진 베르몬트인과의 전투’를 묘사했다.

상단의 네 귀퉁이에는 화강암 조각을 세웠다. 정면 왼쪽의 조각은 ‘조국의 수호자’를 상징한다. 20세기의 군인 옆에 고대 라트비아의 전사가 무릎을 꿇고 있다. 정면 오른쪽 조각은 어부, 장인 그리고 농부 등 ‘노동’을 상징한다. 가운데 참나무 잎과 도토리 모양의 낫을 든 사람은 힘과 젊음을 뜻한다. 뒷면 오른쪽은 현대 과학자와 작가 사이에서 구부러진 지팡이를 들고 있는 고대 라트비아의 신관 등으로 ‘학자’를 나타낸다. 왼쪽에는 2자녀 사이에 서있는 어머니로 ‘가족’을 의미한다. 

상단 블록 위에는 높이 6m, 폭 7.5m의 회색 화강암에 조각한 4그룹의 조각품을 세웠다. 정면에 있는 긴 칼을 짚고 있는 상은 ‘라트비아(Latvija)’를 상징하며, 왼쪽에는 라트비아의 민속영웅인 ‘라플레시스(Lāčplēsis)’, 오른쪽으로는 고대 발트 종교의 사제인 ‘바이델로티스(Vaidelotis)’이다. 그 옆에 누운 칼을 내린 젊은이는 육체적 힘에 대해 영성이 우선함을 묘사한다. 뒤편에는 사슬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3남자를 묘사한 ‘해속자(解束者)’를 새겼다.

화강암 조각들 위로는 2.5×3.0m에 높이가 19m인 석회암 오벨리스크를 세웠다. 오벨리스크의 중심에는 수직으로 유리 띠를 넣어 강조했다. 그 위로 자유와 지역을 상징하는 3개의 금빛별을 들고 있는 젊은 여성의 동상을 세웠다. 높이 9m의 자유의 여신은 금색 허리띠를 하고 있다.

1945년 소비에트가 라트비아를 점령했을 때 자유기념비를 파괴하고 표트르대제의 기마상을 옮기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근거는 분명치 않으나 당시 소비에트의 저명한 여류 조각가 베라 무히나(Vera Muhina)가 기념비를 구해냈다고도 한다. 자유기념비가 뛰어난 예술적 가치를 가지고 있으며, 이를 철거하는 것은 라트비아 사람들의 감정을 상하게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한편 1963년에도 라트비아의 KGB와 CPL의 중앙위원회가 기념비의 철거를 고려했다고 하는데, 역시 지역사회의 분노와 긴장을 유발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이에 따라 라트비아의 자유 기념비를 소비에트의 선전과 관련해 해석하게 됐다. 예를 들어 자유의 여신이 들고 있는 3개의 별이 3개의 발트 소비에트 공화국(라트비아, 에스토니아 및 리투아니아)을 상징하며 조국 러시아가 구한 것이라고 말이다.

자유 광장에는 1989년 8월 23일 열렸던 발트의 길 행사에 관한 자료들을 전시하고 있었다. 다음 일정인 중앙시장으로 이동해야 했는데 버스가 늦게 오는 바람에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벨라루스 출신이라는 버스기사 누다의 고집이 만만치 않은 것 같다. 중앙시장으로 가다보면 다우가바 강변에서 소비에트 시절 세운 동상을 볼 수 있다. ‘1905년 피의 일요일 기념비’다. 러시아 제국 당시의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일어난 피의 일요일 사건(Кровавое воскресенье)과 연관이 있다. 

1905년 1월 9일(일요일)에 러시아 정교회의 게오르기 가폰 신부가 주도해 노동자들의 탄원 집회가 열렸다. 착취와 빈곤, 그리고 전쟁으로 허덕이던 노동자들은 ‘노동자의 법적 보호, 당시 일본에 완전한 열세를 보였던 러일 전쟁의 중지, 헌법의 제정, 기본적 인권의 확립’ 등을 요구했다. 

6만여명의 집회참가자들은 니콜라이 2세에게 탄원을 하기위해 차르의 겨울궁전을 향해 평화적인 청원행진을 시작했는데, 이들의 시내 중심가 진입을 저지하지 못한 근위군이 발포해 500~600명이 죽은 사건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전국 규모의 반정부 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으며 1917년의 러시아 혁명으로 발전하게 됐다. 그런 까닭에 이 사건으로 야기된 반정부운동을 ‘1905년 러시아 혁명’이라고 부른다.

같은 시기 라트비아의 노동자들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노동자들과 연대해 라트비아에 대한 더 큰 자율권을 요구하며 리가에서 파업과 항의를 펼쳤다. 1905년 1월 13일 열린 시위에서는 러시아 경찰이 리가의 시위대를 무력으로 제압했고, 그 과정에서 70여 명이 넘는 시위참가자들이 대다우가바 강으로 떨어져 죽기도 했다. 

당시 희생된 프롤레타리아 노동자들의 넋을 위로하고자 1960년에 제작된 이 기념비는 시위대의 모습을 본 따 만들어졌으며, 그들이 공격받았던 장소에 세워져있다. 기념비의 설계에는 칼리스 플루크네(Kārlis Plūksne)가, 조각에는 알버트 테르필 로프스키(Alberts Terpilovskisit)가 참여했다.

버스가 리가 중앙시장(Rīgas Centrāltirgus)에 도착했다. 리가 중앙시장은 리가 구시가를 감싸는 운하의 남쪽에 있으며 맞은편에 리가 국제버스 정류장이 있다. 이 시장은 리가에서뿐 아니라 유럽에서도 가장 큰 시장 가운데 하나로, 5개의 파빌리온으로 구성돼있다. 시장의 총면적은 7만2300㎡로 3000개의 매대가 자리 잡고 있으며, 하루 4만에서 16만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이용하고 있다. 이 건물은 20세기 중 라트비아에서 건설된 가장 유명한 건축물 중 하나로, 1998년 리가 구시가와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리가 중앙시장의 역사는 다우가바 강변에 사람들이 모여 농산물을 사고팔기 시작한 157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후 300년 가까이 지난 1863년에는 매대가 세웠졌고, 다우가브말라(Daugavmala) 시장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시간이 흘러 1922년에 들어서는 리가 시의회가 혼잡하고 비위생적인 시장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이전키로 하고, 시장의 설계를 국제공모에 붙였다. 

공모전에서는 리가의 건축가 파빌스 드레이마니스(Pāvils Dreijmanis)와 공학자 지트코브스(S. Žitkovs)의 제안이 채택됐다. 두 사람은 독일 지배시절 바이노드(Vaiņode) 공군기지에 건설된 비행선 격납고 발할라와 발터(Walhalla, Walther)의 철제 구조물을 재사용하기로 했다. 바이노드 공군기지는 라트비아의 남서쪽, 발트해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하며 리투아니아 국경에서 불과 4㎞ 떨어진 곳에 있다. 제1차 세계 대전 중에 건설된 240m 길이의 비행선 격납고 2개가 있었다.

처음에는 비행선 격납고(37.4×47.2×240m)를 통째로 이용하려고 생각했단다. 하지만 천정이 너무 높으면 내부온도 유지에 어려움이 예상돼, 격납고 상단과 닫는 부분만 재활용하고 건물 자체는 석조 및 철근 콘크리트로 사용하게 됐다. 실제 공사는 1924년 6월 비행선 격납고 해체로 시작됐으며, 신고전주의와 아르데코 양식을 통합한 5개의 파빌리온을 건설하는 것으로 1930년 완료됐다. 

5개의 파빌리온은 도매 및 육류가공을 하는 가장 큰 파빌리온(5000㎡)과 소매를 주로 하는 작은 파빌리온(2592㎡) 4개로 구성됐다. 4개의 작은 파빌리온은 나란하게 배치하고 큰 것은 직각으로 배치했다. 홀의 높이는 20.5m, 폭은 35m다. 파빌리온 아래에 2㏊ 넓이의 지하실은 콘크리트구조로 만들어 냉동실로 사용했다. 1938년에는 27개의 냉동실에 최대 310톤의 물품을 보관할 수 있었으며, 1961년 소비에트 시대에는 최대 700톤의 제품을 보관할 수 있었다. 

강변도로에 가까운 주차장에서 버스를 내려 다우가바 강에 가까운 첫 번째 파빌리온에 들어섰다. 시장 내부가 한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엄청난 규모였다. 첫 번째 시장은 생선시장이었다. 김영만 가이드가 애용한다는 가게로 가서 훈제연어를 맛봤다. 아주 신선하고 진하게 배어 있는 훈향이 매혹적이었다. 그 때문인지 문득 서울에 가져가서 먹을 수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어 남은 여행기간을 곱씹어보기도 했다. 

움베르토 에코의 에세이집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에 실린 ‘연어와 여행하는 방법’이 생각나서였다. 에코는 북유럽을 여행하면서 얻은 싱싱한 연어를 집까지 가져가기 위해 고군분투했지만 결국은 호텔 미니바 이용료만 엄청나게 물고 상한 연어를 가져가게 됐다는 내용이다. 그럼에도 김영만 가이드가 귀국할 때마다 빠트리지 않은 선물이라면서 문제없다고 하는 바람에 1㎏을 샀다.

가게에서 훈제연어를 파는 여성에게 먹기 좋게 잘라달라고 했는데, 불편한 기색 없이 일행들이 사는 모든 훈제연어를 잘라줬다. 김영만 가이드 덕분이 아닐까 싶었다. 이렇게 마련한 훈제연어는 귀국하기까지 사나흘을 상온에서, 귀국해서도 식구들이 모두 모일 때까지 냉장고에서 며칠을 둬야 했다. 이후 오랜 기다림 속에 보드카를 곁들여 맛을 볼 수 있었다. 맛을 그때만 못했다. 훈향은 여전하나 신선한 느낌은 많이 떨어져있었다. 역시 현장에서 제대로 먹는 것이 최고인 것 같다. 

연어를 산 후 나머지 파빌리온 구경에 나섰다. 그렇게 들린 2번째 시장은 치즈류를, 3번째 시장은 빵 종류를 팔았는데, 정말 다양한 치즈와 빵들이 나와 있어 비교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할 것 같았다. 

4번째 시장은 내부 수리 중이었고, 마지막으로 가장 크다는 육류시장은 역시 앞서 4개의 소매시장과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광활해 돌아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고기류를 살 것도 아니라서 초입에서 일별하고 돌아 나왔다. 파빌리온 밖에는 가판에서 물건을 파는 노천시장이 펼쳐졌다. 주로 야채와 과일을 팔았는데, 새까지 같이 먹겠다고 덤비는 품새가 재밌었다. 

글·양기화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진료심사평가위원회 평가책임위원

1984 가톨릭의대 임상병리학 전임강사
1991 동 대학 조교수
1994 지방공사 남원의료원 병리과장
1998 을지의대 병리학 교수
2000 식품의약품안전청, 국립독성연구원 일반독성부장
2005 대한의사협회 의료정책연구소 연구위원
2009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상근평가위원
2020 현재, 동 기관 평가책임위원
오준엽 기자
oz@kukinews.com
오준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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