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에서 1년…천지연폭포 주변 거닐기

제주도에서 1년…천지연폭포 주변 거닐기

기사승인 2020-02-22 00:00:00

2월 초순 서귀포시 구도심을 벗어나 천지연폭포 상류의 올레길 위에 서며 눈 덮인 한라산 봉우리를 보았다. 제주에 내려와 걷기 시작하면서 한라산 백록담을 한 차례 가 본적이 있기는 하지만 그 때 눈은 없었다. 저 눈이 녹기 전에 가 보겠다고 일기 예보를 살피다가 2월 14일 영실에서 올라 윗세오름을 거쳐 어리목까지 걸었다. 하늘이 그림처럼 파랗고 햇살에 데워진 봄바람이 살랑살랑 불고 있었다. 그래도 병풍바위 위로 올라서니 여전히 온통 눈 세상이다.

백록담 분화구에 쌓인 눈은 아니더라도 멀리 해안가에서 보았던 한라산의 눈을 밟으며 걸었다는 흡족함 속에 집에 돌아왔는데 날씨가 조화를 부리기 시작했다. 주말 내내 바람이 거세고 간간이 비도 날리더니 월요일엔 날씨 변덕도 이런 변덕이 없었다. 거센 눈보라가 몰아치는가 싶더니 10분쯤 후엔 파란 하늘이 열리고 뭉게구름이 둥실 떠간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싸락눈이 창문에 매섭게 날아와 부딪친다. 멀리 보이는 바닷가에는 파도가 하얗게 몰려와 부서지고 있다.

제주다운 날씨다. 꼼짝하지 못하고 창밖으로 날리는 눈과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와 묵직하게 내려앉는 하늘을 본다. 보통 일주일에 세 번 정도 걷는데 비바람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집에 며칠 간 묶이면 그간 걸었던 길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지난 해 7월 제주에 처음 왔을 때는 여름 바람마저 무서웠는데 제주 이곳저곳을 400 km 넘게 걷고 나니 이젠 그 속을 걷고 싶을 만큼 제주의 바람과 친해졌다. 이 여행이 끝나면 제주의 바람이 그리워 다시 찾게 될 지도 모르겠다. 나중에 제주에 다시 오게 될 이유가 끝없이 생긴다.

“그만두라우.”
“알겠습니다.”
인제대학교 백병원 비서실에서 근무 시작한지 12년째 되던 2002년 6월 1일 토요일이었다. 그날 오전 본원에서 모 신문사와 공동으로 주최하는 중요한 행사가 두어 달 전에 잡혀 있었다.

이사장은 서울과 부산 그리고 김해에 있던 4곳의 대학병원과 인제대학을 매주 순차로 방문하며 집무를 하고 있었다. 4개 기관에서 크고 작은 회의와 보고, 결재는 늘 잠시 숨 돌릴 짬도 없이 이루어지고 있어 비행기 탑승조차 늘 출발 10분전에야 겨우 도착해 뛰다시피 할 정도였다. 그는 78세에도 여전히 강철 같은 체력을 바탕으로 재단 산하기관의 거의 모든 의사결정에 관여하고 있었다.

워낙 중요한 행사여서 이틀 전부터 대학의 비서실을 통해 알렸고, 서울에 와서도 다시 일정을 확인했다. 당일 토요일은 상계백병원에서 집무를 하고 있던 탓에 연락을 취해 두었다. 다른 날보다 두 시간은 일찍 일정을 끝내야 을지로의 서울백병원 행사 참석에 차질이 없었다. 그러나 결국 일정에 작은 차질이 생기고 말았다. 전화로 질책을 받던 중 ‘그만두라’는 말을 들었다. 그날 행사 마무리 후 책상을 깨끗이 정리해 박스에 담아 두고 퇴근했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분명 느낌이 다른데 어디가 어떻게 다른지는 꼭 집어서 설명하기가 어렵다. 서귀포가 가까워지면서 풍경에 대한 분위기가 조금씩 다르게 느껴졌다. 아마도 바닷가에서도 꽤 가깝게 보이는 한라산의 모습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서귀포 일대는 워낙 유명한 관광지가 많다. 제주 여행 경험이 있든 없든 대부분 알고 있는 곳이다. 폭포로는 정방폭포, 천지연폭포 외에 최근에 갑자기 알려진 엉또폭포가 있고 해안 절경으로는 외돌개와 대포동주상절리가 있다. 소천지 역시 많이 알려진 곳이다. 서귀포시 제1청사가 있는 구도심으로 가면 이중섭거리, 이중섭미술관, 서귀포시장 등에 사람들이 많이 찾아간다.

사람들이 많이 찾는 곳은 아니지만 가보면 고개를 끄덕일만한 명소도 꽤 많다. 특히, 천지연폭포를 중심으로 폭포 위에는 걸매생태공원이 있고 왼쪽엔 서귀포칠십리공원이 있다. 그리고 북서쪽으로 몇 걸음만 가면 하논분화구가 있다. 천지연폭포를 보고나서 하루쯤 시간을 내어 나머지 세 곳까지 살펴본다면 서귀포여행이 더 오래 기억될 것이다.

연외천과 호근천의 물줄기가 하나가 되어 걸매생태공원을 휘돌아 흐른 뒤 천지연폭포에서 떨어지는데 사철 마르지 않고 흐르는 물 덕분에 공원은 촉촉한 느낌이다. 산책로는 작은 도랑을 사이에 두고 늘 푸른 나무 사이로 이어지며 나무와 꽃과 풀을 보여주고 있다. 이곳 걸매생태공원 근처에서 바라보는 한라산 모습이, 특히, 일품인데, 눈이 온 뒤라면 백록담 부근의 흰 눈과 그 아래의 숲 그리고 시내 근처의 맑은 건물들과 공원의 사철 푸른 나무들이 어울려 한 폭의 그림이 된다.

우리나라에서는 제주에서만 자라는 천연기념물 담팔수도 아무렇지 않게 서 있고, 2월 초에는 매화 역시 암향을 흘리며 찾는 이를 기쁘게 한다. 따뜻한 햇볕 쬐며 벤치에 앉아 쏟아지는 졸음에 잠시 몸을 맡겨도 좋은 편안함이 있는 곳이다.

천지연폭포 왼쪽의 언덕 위에 조성된 칠십리시공원에서는 유명 시인들의 시를 새긴 시비가 곳곳에서 방문자를 기다리고 있다. 평상시 시집을 찾아 읽는 일이 거의 없으니 여행길에서 한가하게 걸으며 시 몇 수쯤 읽는 호사를 누릴 수 있다. 천지연폭포의 물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걷다가 전망대에 서면 폭포가 내려다보인다. 그렇게 걸으며 여행길에서의 한가함을 만끽하며 걸을 수 있는 곳이다.

천지연폭포를 기준으로 북서쪽 길 건너에는 하논분화구가 방문자를 기다리고 있다. 분화구가 워낙 커서 입구에 서면 그저 논농사를 짓는 넓은 평야로 보인다. 이곳에서 논을 보았다면 그것만으로도 기억에 남을 일이다. 제주도에서는 유일하게 논이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약 5만 년 전 마그마가 지표로 올라오다가 지하수층을 만나 폭발적으로 화산재를 분출했다. 이 화산재는 분화구 주변의 언덕 능선을 만들고 화산활동이 그치면서 지하수가 계속 흘러들어와 호수를 형성했다. 그리고 천년에 30~40cm 정도의 퇴적층이 형성되어왔다. 분화구 둘레가 약 3.8km이고 직경이 최대 1.15km인 하논분화구의 바닥 퇴적층 두께는 최고 15m에 이른다.

하논분화구는 오백여 년 전만 해도 커다란 호수였다. 경작지가 부족해 현재 차들이 드나드는 입구의 분화구 능선을 일부 제거해 물을 빼내고 이곳에 벼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바닥 면적이 216,000 제곱미터 (약 65,000평)에 오래된 퇴적층으로 토질은 비옥하고 북쪽에서 풍부하게 솟는 용천수 덕에 물 걱정도 없었다. 논농사와 더불어 분화구 주변엔 감귤 농장이 발달해 있다.

2003년부터 서귀포시에서 하논분화구 복원 사업을 시작했다. 장기적으로는 세계적으로 희귀한 이 습지형 분화구를 논농사가 시작되기 전의 상태로 되돌리는 사업이다. 이곳을 생활터전으로 삼고 논농사를 짓고 분화구 안쪽 능선에서 귤밭을 가꾸며 살아온 주민들로서는 그리 반가운 사업은 아니어서 이 사업을 반대한다는 현수막이 보인다.

하논분화구 북쪽 능선 양지바른 곳에 농사용 창고를 개조해 만든 ‘하논분화구방문자센터’가 있다. 올레 7-1 코스가 통과하는데 올레를 걷는 사람들 외에 아직은 일부러 이곳을 찾는 이는 많지 않다. 하논분화구를 복원해야 하는 이유를 알리기 위한 작은 움직임이다. 언젠가 하논분화구가 본래의 모습을 되찾을 수 있다면 섬에 있는 세계 유일의 화산분출로 이루어진 호수가 된다.

기고 오근식 1958 년에 출생했다. 철도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철도청 공무원으로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다. 강원도 인제에서 33개월의 군 복무를 마치고 다시 복직해 근무하던 중 27살에 성균관대학교 영어영문학과에 입학했다. 대학 졸업 후 두 곳의 영어 잡지사에서 기자로 일했으며, 인제대학교 백병원 비서실장과 홍보실장, 건국대학교병원 홍보팀장을 지내고 2019년 2월 정년퇴직했다.

[쿠키뉴스] 편집=이미애 truealdo@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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