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기화의 인문학기행] 발트, 서른 번째 이야기

[양기화의 인문학기행] 발트, 서른 번째 이야기

기사승인 2020-02-25 01:09:15

점심을 먹은 다음 오후 1시에는 시굴다를 떠나 에스토니아의 파르투를 향했다. 파르투로 가는 동안에는 모처럼 음악을 들으며 쉬는 시간을 가졌다. 버스로 1시간 반 정도 지났을 무렵 라트비아와 에스토니아의 국경마을에 도착했다. 리투아니아에서 라트비아로 넘어올 때와는 달리 국경마을에서 잠시 쉬어간다고 했다. 실낱같은 개천을 사이에 두고 라트비아에는 발카(Valka)라는 국경마을이 에스토니아에는 발가(Valga)라는 국경마을이 있다.

라트비아의 발카는 면적 14.36㎢에 5835명(2017년 기준)이 살고 있으며, 에스토니아의 발가는 면적 16.54㎢에 1만2992명(2017년 기준)이 살고 있다. 라트비아의 발카와 에스토니아의 발가는 쌍둥이 마을이며, 라트비아와 에스토니아의 국경으로 구분돼있지만 ‘하나의 도시, 두 나라’를 표방한다.

리보니아 시절의 마을 발크(Walk; 독일어 이름)를 나눈 국경은 1920년 영국의 대령 스티븐 조지 탈렌츠(Stephen George Tallents)가 이끄는 국제 배심단의 결정에 따른 것이다. 발카라는 마을이름은 라트비아어의 동사 가운데 ‘끌다’를 의미하는 ‘빌크(vilkt)’ 혹은 ‘입다’를 의미하는 ‘발카트(valkāt)’, 명사 ‘끌기’를 의미하는 ‘발크스(valks)’와 연관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두 마을은 페델레(Pedele, 에스토니아어로는 페델리 혹은 포데리) 강을 중심으로 발달했다. 1286년 리가에서 작성된 채무 장부에 당시의 페델리(Pedeli)라는 이름으로 기록된 것이 발카에 대한 최초의 기록이다. 1582년 파르다우가바 리보니아 공국이 성립돼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에 속하게 됐다. 1627년 폴란드-스웨덴 전쟁 뒤에는 스웨덴에 속한 비제메(Vidzeme)의 일부가 됐다. 1700년에 시작돼 1721년에 끝난 대북방전쟁(Lielais Ziemeļu karš) 뒤에는 러시아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1917년 12월 2일 라트비아 임시 국가위원회는 발카에서 라트비아 자치에 관한 선언을 채택했다. 라트비아는 비제메(Vidzeme), 쿠르제메(Kurzeme), 라트갈레(Latgale) 등으로 구성된 자치국가라고 공식적으로 선언한 것이다. 1919년 1월 31일 러시아의 붉은 군대와 연합한 라트비아의 군대가 핀란드와 연합한 에스토니아 군과 파주(Paju)에서 전투를 벌였고, 이듬해 에스토니아 군대가 발카를 점령했다.

P24도로를 달리다가 발카에 들어서서는 세미나 거리(Semināra iela)를 따라 국경검문소를 넘어 에스토니아 발가에서 버스를 내렸다. 걸어서 다시 라트비아로 돌아왔다. 필자의 기억으로는 걸어서 국경을 넘는, 즉 월경(越境)이라는 독특한 체험을 한 것은 처음이다. 

지리학자 이영민은 “강력한 정치권력은 공간에 대한 지배력을 확보하고 안정된 질서를 잡기 위해 경계선을 긋고 그 공간에 차이를 새겨 넣는다”고 했다. 그 경계선의 대표적인 예가 바로 국경이다. 

물론 두 정치권력은 각자 차지한 공간을 분리하기 위해 국경을 긋기도 하지만, 또 연결이 필요하기 때문에 국경을 열고 소통해야 한다. 두 정치권력의 관계가 원만한 경우에는 연결이 용이하지만, 적대적인 경우에는 아무래도 까다로울 수밖에 없다.

라트비아의 국경마을 발카(Valka)와 에스토니아의 국경마을 발가(Valga)를 쉽게 오갈 수 있게 된 것은 두 나라가 2004년 5월 1일 솅겐 조약(Schengen Convention)에 가입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두 나라가 솅겐 조약에 가입하기 전에는 발카와 발가의 주민들도 국경을 오가는 것이 쉽지 않았다. 일단 비자를 신청하고 며칠을 기다려야 했기 때문이다. 특히 발카에는 큰 시장이 없어서 발가로 장을 보러 다녀야 했다고 하는데, 장에 갈 때마다 비자를 내야했기 때문에 많이 불편했다고 한다. 

솅겐 조약은 1985년 6월 14일 벨기에, 프랑스, 독일, 룩셈부르크, 네덜란드 등 5개국이 맺은 협정에서 출발한다. 솅겐 협정은 가입 국가들이 공통의 출입국 관리정책을 사용해 국가 간의 통행에 제한이 없게 한다는 내용을 담은 협정으로, 5년 뒤에 서명한 솅겐 조약 시행 협정에서는 협정 참가국 사이의 국경을 철폐하도록 규정했다. 

가입국가의 현황을 보면 아일랜드와 영국을 제외한 모든 유럽 연합 가입국과 유럽자유무역연합(EFTA) 가입국가인 아이슬란드, 노르웨이, 스위스, 리히텐슈타인 등 총 26개국이 조약에 서명하고 있다. 솅겐 국가(Schengenland)란 이름으로 알려진 솅겐 영역 안에서는 국경검문소, 국경 검사소가 폐지됐다. 국경을 지나는 주요 도로에는 국경을 나타내는 EU 표지가 걸려 있다. 

국경을 넘나들면서 30분간에 걸쳐 도보로 국경을 넘나드는 독특한 체험을 하고는 에스토니아의 발가에 있는 마트를 구경하다가 3시 40분에 타르투를 향해 출발했다. 에스토니아의 정식 명칭은 에스토니아 공화국[Republic of Estonia, 에스토니아어로는 에스티 바바리크(Eesti Vabariik)]이다. 핀란드에서는 비로(Viro)라고 부르기도 한다. 

발트해의 북동쪽 끝의 남쪽 해안에 위치해 북쪽과 서쪽은 발트해로 열려있고, 동쪽은 러시아, 남쪽은 라트비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다. 발트 연안국 가운데 가장 북쪽에 있으며, 빙하 작용을 받은 대지는 낮고 평평해 넓은 삼림·습지·목초지를 이루며, 기후는 습윤한 편이다. 에스토니아는 본토와 발트해에 흩어져있는 2222개의 섬을 포함해 4만5339㎢이며 수도는 탈린이다. 2020년 추계인구는 132만8360명이다. 65%가 에스토니아인으로 에스토니아어를 공용어로 사용한다. 

에스토니아 말로 가장 오래된 ‘대지의 사람들’이라는 뜻을 가진, ‘마라흐바스(maarahvas)’라는 말이 있는데, 에스토니아 사람들은 그들이 사는 땅을 ‘대지’라는 의미의 ‘마발드(Maavald)’라고 불렀다. 일설에는 에스토니아라는 근대적 이름이 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Tacitus)의 저서 ‘게르마니아(Germania)’에서 발트지역에 사는 사람들을 에스티(Aesti)라고 적은데서 온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에스티는 지리적으로 에스토니아보다 남쪽에 사는 사람들을 지칭한 것으로 보인다. 고대 스칸디나비아 전설에 에이스트란트(Eistland)라는 지명이 있는데, 북유럽사람들이 아이슬란드를 지칭하던 에스트란드(Estland)와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이다. 초기 라틴어를 비롯한 고전에서는 에스티아(Estia)와 헤스티아(Hestia) 등이 사용됐다. 11세기에 룬 문자로 기록된 ‘이 에스트라툼(i estlatum)’은 ‘에스티 사람들의 땅’이라고 해석한다.

그런가 하면 ‘동쪽’을 의미하는 게르만어 ‘오스트[ost, 혹은 외스트(öst)나 에스트(est)]’가 에스토니아의 어원학적 근원의 하나로 고려될 수 있다. 에스토니아 사람들이 게르만족이 살던 땅보다 동쪽에 살았기 때문이다. 에스토니아라는 영어 명칭은 1921년 무렵부터 보편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에스토니아의 강역에 사람들이 거주한 흔적으로 가장 오래된 곳은 리가만에 연한 패르누(Pärnu) 부근에서 발견된 풀리(Pulli) 거주지로 기원전 1만1000년경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가 하면 에스토니아의 수도 탈린 동쪽의 핀란드만에 연한 쿤다 지역에서 발굴된 유적은 기원전 8500~7000년까지의 중석기 시대에 해당하는 사냥꾼과 어부의 주거였다. 기원전 5000년 무렵 신석기 시대가 시작되면서 쿤다 문화는 토기를 사용하기 시작한 나르바 문화로 대체된다. 

기원전 스칸디나비아 남부의 영향을 받아 청동기문화가 시작됐다. 하지만 이는 해안에서 떨어진 내륙으로 전파되지 못했다. 기원전 500년 철기시대가 시작되면서 에스토니아의 전역에 걸쳐 정착촌이 생겨났다. 정착촌들이 충돌하면서 요새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9세기 무렵부터 바이킹들이 에스토니아 해안을 따라 노략질을 했으며, 동쪽으로 고대 러시아 국가가 등장하면서 에스토니아는 여러 차례 전쟁에 휘말리게 됐다. 

12세기 말까지 발트해의 동쪽 해안은 유럽에서도 몇 남지 않은 비기독교 지역이었다. 평화로운 선교활동이 먹히지 않자 1198년부터는 교황의 지원을 받은 리가 주교 알베르트와 칼의 형제 기사단이 앞장서 무력으로 공세에 나섰다. 이들에게 패배한 리보니아 사람들까지 가세한 전투에 대항하기 위해 에스토니아의 지역 사람들도 동맹을 맺어 맞섰다. 1219년에는 덴마크까지 가세하면서 1227년에 이르러 지금의 세투마아(Setumaa)를 제외한 에스토니아 전체가 주교의 군대에 정복됐다. 1552년 리가를 통해 전해진 종교개혁은 에스토니아의 내부 갈등을 촉발했다.

1558년 제정 러시아의 이반 4세는 서유럽으로 나가는 발트해 통로를 차지하기 위한 전쟁을 벌였다. 1583년까지 이어진 리보니아 전쟁에는 스웨덴,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제정 러시아, 덴마크-노르웨이가 참전했다. 전쟁의 결과, 에스토니아 영토의 분할이 이뤄졌다. 북부와 서부는 스웨덴에, 남부 에스토니아와 리보니아는 폴란드에, 리가만을 감싸고 있는 사레마(Saaremaa) 섬은 덴마크가 차지했다. 

10월 혁명으로 제정 러시아가 무너지고 난 뒤, 1918년 2월 24일 에스토니아는 독립을 얻었다. 하지만 1939년 8월 23일 소련은 나치 독일과 밀약을 맺어 중앙유럽을 분할하기로 하는 비밀의정서를 만들었다. 이 의정서에 따라 에스토니아는 소련의 영향권에 두기로 했다. 1940년 6월 중순, 소련의 내무인민위원회 요원이 국경 초소를 급습해 에스토니아군을 몰아낸 뒤 소비에트 간부단으로 대체했다. 

이어 시행된 독재로부터의 해방이라는 명분으로 치러진 각종 선거에서 단독 후보로 나선 친(親)소련 후보가 92.8%의 표를 얻었다. 뒤이어 구성된 의회는 소비에트 연방 가입을 의결했고, 소련의 승인을 얻어 에스토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소련에 병합됐다. 이후 에스토니아는 1991년 8월 20일 발트의 길을 따라 발트연안 국가들이 함께 한 노래혁명(laulev revolutsioon)과 소련의 붕괴로 독립을 되찾았다.

오후 3시 무렵 에스토니아 쪽의 국경마을 발가를 떠난 버스가 타르투에 도착한 것은 4시 반이었다. 이른 시간이지만 타르투 대학교 근처에 있는 쉐리프 살롱(Sheriff salon)이라는 식당에서 저녁식사를 먼저 하게 됐다. 가게 이름에 맞게 보안관 표지를 단 간판은 그렇다고 해도 성조기까지 내건 것은 지나친 것 아닐까 싶었다. 

식당 내부도 온통 미국 서부영화의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 인디언 추장과 현상금이 걸린 범죄자 사진도 있고, 총잡이의 사진도 걸려있다. 식탁에는 서부를 주제로 한 보드게임 판이 그려져 있다. 재미있는 것은 식당 입구에 시음한 뒤에 맥주를 주문할 것을 권장하는 것과, 이곳에 왔다는 사실을 아내에게 감추려면 바텐더에게 별도의 비용을 지불하라는 것, 이때 내는 금액에 따라서 수위조정이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글·양기화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진료심사평가위원회 평가책임위원

1984 가톨릭의대 임상병리학 전임강사
1991 동 대학 조교수
1994 지방공사 남원의료원 병리과장
1998 을지의대 병리학 교수
2000 식품의약품안전청, 국립독성연구원 일반독성부장
2005 대한의사협회 의료정책연구소 연구위원
2009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상근평가위원
2020 현재, 동 기관 평가책임위원
오준엽 기자
oz@kukinews.com
오준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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