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기화의 인문학기행] 발트, 서른한 번째 이야기

[양기화의 인문학기행] 발트, 서른한 번째 이야기

기사승인 2020-03-06 02:08:18

이른 저녁을 마친 5시 반부터 타르투 대학교(Tartu Ülikool)과 타르투 대성당의 유적을 돌아봤다. 타르투 대학은 에스토니아에서 가장 크고 유명한 국립대학이다. 스웨덴 리보니아, 잉그리아, 카렐리아의 총독(1629~1634)을 지낸 요한 스카이트(Johan Skytte) 남작이 1632년에 설립한 아카데미아 구스타비아나(Academia Gustaviana)로부터 시작됐다. 

스웨덴제국에서는 웁살라대학에 이어 두 번째로 설립된 대학교로 핀란드의 투르쿠(Turku)에 있는 오보 왕립 아카데미(스웨덴어: Kungliga Akademin i Åbo) 혹은 투르쿠 왕립 아카데미(핀란드어: Turun akatemia, 핀란드 독립 후에는 헬싱키 대학교가 됐다)보다 앞서 설립됐다.

아카데미아의 뿌리는 1583년 폴란드-리투아니아 왕국의 스테판 바토리(Stefan Batory) 왕이 설립한 예수회 문법학교, 김나지움 도르파텐세(Gymnasium Dorpatense)로 이어진다. 교과과정은 인문과 예술, 사회과학, 의학, 그리고 자연과학과 과학 등 4가지 분야에서 157개 가 개설돼있다. 

약 1만4000명의 학생들이 수학하고 있으며, 1300명 이상이 외국 학생들이다. 약 150개 건물이 있지만, 30개는 타르투 밖에 있다. 4개의 박물관, 식물원 그리고 체육시설은 일반인에게 공개된다. 2019년까지 세계 대학순위(ARWU, Academic Ranking of World Universities)에서 301~400위를 유지하고 있는, 에스토니아에서 가장 실력 있는 대학교이다.

대학 본관을 지나면 창문에 서서 밖을 내다보는 교수진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우리를 환영하려는 것일까 싶은데 자세히 보니 사진이다. 이 건물은 폰 복 하우스(Von Bocki maja)다. 1775년 타르투의 대화재 이후 1780년에 완성된 건물로 마그누스 요한 폰 복(Magnus Johann von Bock) 대령의 소유였던 것을 대학이 사용하기로 합의했다. 

1783~1786년에 걸쳐 재공사를 거쳐 도서관, 강의실 및 공개 토론장소로 사용하게 됐다. 1837년에는 대학이 매입해 의과대학, 수의과대학 그리고 에스토니아 학회의 도서관 등 다양한 용도로 사용하고 있다. 

2007년에는 대학 본관 쪽에 있는 창문에 알란 마디손(Alan Madisson)이 대학에 근무하는 주목할 만한 교수들을 모델로 찍은 사진을 걸었다. 대학 본관의 반대쪽 외벽에 걸린 벽화는 1860년대에 타르투에 살았던 루이스 호프링거(Louis Hoflinger)의 석판화를 재현한 것으로 타르투 대학의 학생들이 구성했다. 성당언덕에서 내려올 때 볼 수 있다.

숲이 우거진 야트막한 언덕을 따라 대학건물들이 흩어져 있어 공부하기 좋은 분위기다. 붉은 벽돌건물을 따라서 사람들이 몰려간다. 건물에 들어서니 박물관이다. 개 눈에는 X만 보인다고 해골을 세워놓은 품이 의학관인 모양이다. 밖으로 나와 건물을 돌아가니 벽돌 기둥을 비롯해 뼈대만 남은 건물이 이어진다. 타르투 대성당(Tartu toomkirik)의 잔해라고 했다.

타르투 대성당은 ‘어머니의 강’이라는 뜻을 가진 에마호기(Emajõgi)를 굽어보는 야트막한 성당언덕(Toomemägi) 위에 세워져있다. 성당언덕은 이교도 에스토니아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요새였다. 1224년 리보니아 기독교도들이 이 지역을 점령한 뒤에 새로운 성을 건설했다. 이어서 13세기 후반에는 성당언덕 북쪽에 고딕 양식으로 된 성당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대성당은 도시의 수호성인인 베드로성인과 바오로성인에게 바쳐졌다. 처음에는 단일 건물의 성당으로 계획됐지만 3개의 통로가 추가되면서 홀 양식의 교회로 확장됐다. 1470년경 붉은 벽돌을 쌓아 기둥과 아치를 이룬 고딕양식의 건물은 서쪽으로 난 건물의 정면 양쪽으로 66m 높이의 탑 2개를 세우는 것으로 완공됐다.

종교개혁의 바람이 타르투에 이른 1525년 1월 10일, 개신교도들이 들이닥쳐 아이콘을 파괴하면서 심하게 손상을 입은 성당은 그 뒤로 조금씩 무너져 내렸다. 1558년 로마 가톨릭의 마지막 타르투 주교 헤르만 베셀(Hermann Wesel)이 러시아로 추방된 다음 대성당은 버려졌다. 리보니아 전쟁(1558~1583) 동안 러시아 군대는 도시를 황폐화시켰다.

1582년에 도시가 폴란드로 넘어가면서 로마 가톨릭 통치자들이 대성당 재건계획을 세웠으나 이어진 폴란드-스웨덴 전쟁(1600~1611)으로 실행에 옮겨지지 못했고, 1624년에 일어난 화재로 막대한 손상까지 입었다. 1629년 스웨덴왕국이 타르투를 점령한 뒤로는 대성당건물이 주목받지 못했고, 성당부지는 묘지로 변하고 말았다. 1760년대에 성당의 2개의 탑은 66m에서 22m로 낮아졌다.

1802년 러시아제국의 차르 알렉산드르 1세(Александр Павлович)가 타르투 대학의 재건을 명함에 따라 발트의 독일건축가 요한 빌헬름 크라우제(Johann Wilhelm Krause)는 성당합창단석을 도서관으로 개조했다. 1981년에는 오래된 도서관을 타르투 대학교의 역사박물관으로 개조했다. 

오늘날 박물관에는 대학 역사의 중요한 유물, 과학도구 및 희귀도서가 전시돼있다. 성당의 나머지 폐허와 합창단의 외벽은 더 무너지지 않도록 보강했다. 타르투 대성당의 역사적 가치로 보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될 수도 있겠으나, 박물관으로 개조하는 등 대성당의 유적을 훼손했기 때문에 지정되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타르투 대성당의 유적이 있는 성당언덕(Toomemägi, 토메마기)은 19세기에 공원으로 조성됐다. 공원 곳곳에서 타르투의 과학과 문학 분야에서 뛰어난 활약을 한 사람들의 기념물을 볼 수 있다. 

대성당 유적의 동쪽으로는 타르투의 위대한 자연과학자 카를 에른스트 폰 바에르(Karl Ernst von Baer, 1792~1876)와 최초의 에스토니아 시인 크리스티안 야크 페테르슨(Kristjan Jaak Peterson, 1801~1822)의 동상이 서있고, 서쪽에 있는 대법원 앞에는 타르투 대학을 창설한 요한 스카이트(Johan Skytte)의 기념물이 있다. 

대법원 건물을 돌아서면 도로 위를 가로지르는 어두운 회색 다리를 볼 수 있다. 악마의 다리(Kuradisild)다. 성당언덕의 반대편에 있는 천사의 다리(Inglisild)와 함께 타르투의 상징이 돼있다. 이 다리는 러시아제국의 로마노프왕조 3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지어진 콘크리트 다리로, 타르투의 건축가 아르브드 아이히호른(Arved Eichhorn)이 설계한 것이다. 

성당 언덕 쪽에서 보면 다리 난간에 ‘1613’과 ‘1913’이라는 숫자가 표시돼있으며, 성당계곡 쪽에서 보면 알렉산드르 1세의 모습을 새긴 표지판과 그 아래 경간에 ‘Alexandro Primo’라는 단어를 새긴 청동판을 아치에 붙어놓았다. 이곳에 처음 세워진 다리는 1809년에 지은 신고딕 양식의 목조다리로 타르투 대학교를 건설한 건축가 요한 빌헬름 크라우제가 설계한 것이다. 1842~1844년 사이에는 건축가 쾨닝스만(JG Köningsmann)이 설계해 건설한 단일 경간의 목조 다리로 대체됐다. 

악마의 다리라는 이름이 어디서 유래했는지는 분명치 않다. 언덕 반대편에 있는 밝은 색의 천사의 다리와는 달리 어두운 색조를 띄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김영만 가이드는 다리를 건설한 건축가의 이름을 딴 것이라고 설명했는데, 다리건설을 감독한 외과의사 베르너 죄게 폰 만토이펠(Werner Zoege von Manteuffel)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이라는 설명인 듯하다.

로이스(Reuss) 강이 흐르는 스위스의 슐레넨협곡(Schöllenenschlucht)에 걸려있는 토이펠브뤼케(Teufelsbrücke, 악마의 다리)의 이름에 들어있는 독일어 토이펠(Teufel)이 ‘악마’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스위스의 학자 요한 야콥 슈슈처(Johann Jakob Scheuchzer)가 1716년에 남긴 기록에 의하면, 1587년에 처음 기록된 스위스의 토이펠브뤼케(Teufelsbrücke)의 전설에서 계곡에 다리를 놓는 것이 어렵다고 생각한 우리(Uri)지방 사람들이 악마의 도움을 얻기로 했다. 그리고 악마는 그 대가로 다리를 건너는 첫 번째 영혼을 받기로 했다. 

다리가 완성된 다음 마을 사람들이 던진 빵 덩어리를 쫓아 다리를 건넌 개가 악마에 의해 희생됐다. 속은 것을 알게 된 악마는 커다란 바위를 던져 다리를 무너뜨리려 했다. 이에 성인이 나서 악마를 꾸짖자 바위를 버리고 도망쳤다고 한다. 악마의 돌(Teufelsstein)은 괴첸넨(Göschenen) 근처에 있는데 12m 높이에 무게가 220톤에 달한다.  

에스토니아 대법원에서 왼쪽 길을 잡아 내려가다 보면 만나는 천사의 다리(Inglisild)는 요한 빌헬름 크라우제의 설계로 1816년에 지었고, 1913년에 보수한 것이다. 다리 가운데 난간에는 타르투 대학의 첫 번째 총장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폰 파로(Gerorg Friedrich von Parrot)의 모습을 담은 원판과 재직기간(1802~1812)이 표시돼있다. 

반대편에는 ‘Otium reficit vires’라는 라틴어 문구가 새겨졌는데, ‘휴식으로 활력을 되찾는다’라는 의미이다. 공원 입구에 붙여놓기에 좋은 글이다. ‘천사의 다리’라는 이름은 다리가 놓인 성당언덕에 조성된 영국식 정원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한다. 20세기 들어 영국다리(Inglisillaks)라고 부르던 것을 음차해 천사의 다리가 된 것이다.

김영만 가이드를 따라 천사의 다리로 올라섰다. 10여m 정도 될까 싶은데, 숨을 참은 채로 다리를 건너면 소원을 이룰 수 있다고 했다. 뛰면 숨이 찰 수도 있어서 숨을 참은 채로 조금 빨리 걸었는데 그리 어렵지 않게 다리를 건널 수 있었다. 그런데 다리를 건너는 동안 소원 비는 것을 깜박했다.

천사의 다리를 지나 로시(Rossi) 거리를 따라 내려가다 보면 음악대학에 이어 세계 언어와 문화대학이 이어진다. 그리고 그 앞은 피로고프(Pirogov) 공원이다. 공원 앞에 서 있는 기념비에 니콜라이 이바노비치 피로고프(Николай Иванович Пирогов)의 흉상을 세운 기념비가 있다. 

러시아의 외과의사이자 해부학자이며 교육자였던 피로고프는 1828년부터 1823년까지 타르투 의과대학에서 그리고 1841년부터 1857년까지는 상트 페테르부르크 대학에서 교수를 지냈다. 1854년 크림전쟁에 군의관으로 참전했다. 야전수술의 창시자이며, 마취에 에테르를 사용한 유럽 최초의 외과의사였다. 다양한 외과수술을 창안하고, 부러진 뼈를 치료하기 위해 석고 캐스트를 사용하는 기술을 개발했다.

피로고프 공원을 지나노라니 어디선가 카리용(carillon)이 연주하는 음악이 들려온다. 알고 보니 시청에서 6시가 됐음을 알리는 음악이었다. 고풍스러운 모습의 시청 건물 앞에는 분수대가 있는 광장이 펼쳐진다. 

타르투 시청(Tartu raekoda) 건물은 1775년의 타르투 대화재 이후 1782~1789년 사이에 독일 건축가 요한 하인리히 바르톨로모이스 발터(Johann Heinrich Bartholomäus Walter)가 신고전주의 양식에 로코코와 바로크적 요소를 가미하여 설계하였다. 매일 연주되는 카리용도 포함되었다. 같은 장소에 지어진 세 번째 시청건물이다. 시청 건물에는 시정부의 부처 이외에 다양한 부서 혹은 세입자가 입주해있다. 교도소와 계량 및 측정에 관한 부서를 비롯해 약국도 들어와 있다.

글·양기화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진료심사평가위원회 평가책임위원

1984 가톨릭의대 임상병리학 전임강사
1991 동 대학 조교수
1994 지방공사 남원의료원 병리과장
1998 을지의대 병리학 교수
2000 식품의약품안전청, 국립독성연구원 일반독성부장
2005 대한의사협회 의료정책연구소 연구위원
2009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상근평가위원
2020 현재, 동 기관 평가책임위원
오준엽 기자
oz@kukinews.com
오준엽 기자
이 기사 어떻게 생각하세요
  • 추천해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추천기사
많이 본 기사
오피니언
실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