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훈 미술에세이](5)그리움으로도 다 치유 못 하는 아픔

[이승훈 미술에세이](5)그리움으로도 다 치유 못 하는 아픔

기사승인 2020-04-13 15:14:38

글: 이승훈 대성중학교 교장, 한국화 화가

사람 사이에 ‘사회적 거리 두기’라는 말, 이제 잊을 수 없는 풍경 중 하나이다. 2020년 벽두에 코로나바이러스 감염병이 확산 일로에서 찾아든 하나의 길이었다. 세계는 집마다 봉쇄되었고 어떤 가족은 가족끼리도 헤어져 지내야 했다.

미국에 아들을 유학 보내고 이번 코로나 19로 미국으로 어렵게 다녀온 동창을 보면 애처롭다. 작은아들을 데리고 오지만 일이 남은 큰아들을 두고 오는 심정이 전쟁터에 놓고 오는 것 같다고 하였다. 귀국해도 자가 격리 중이라 본인도 힘들다고 했다. 너무도 그리움이 커진다.

가족이 떨어져 지낸다는 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힘들게 한다. 세월호 아픔이 있는 4월 16일은 전 국민이 기억한 사고이다. 아직도 그 실체가 밝혀지지 않고 있으니 그 아픔 속 그리움은 더욱 크다. 또한, 가정 문제나 사회적 갈등으로 부부가 또는 부모와 자식 간에 떨어져 살아가는 어려움도 있다.

여기 이중섭의 길 떠나는 가족(1954)이라는 작품이 있다. 이 그림은 바다 건너 가족에게 보내는 엽서화이다. 태현이와 태성이 두 아들과 부인에게 보낸 엽서이다. 안부 내용과 전시회 준비를 하고 그림 내용을 이야기하고 있다. 소달구지에 가족이 타고 화가 자신이 소를 끌고 남쪽 나라로 길 떠나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전쟁과 가난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가족의 이별은 더욱 큰 비애와 절망감을 안겨준다. 그래도 엽서화 속에 가족의 끈을 놓지 않았다. 언젠가 가족이 만나 꽃길로 이어진 세상 살기를 원한 그림일 것이다. 거짓과 권력으로 남을 등쳐먹지도 않고 온전한 행복한 꿈을 가꾸는 소시민이 그리운 계절이다.

이중섭, 길떠나는 가족 편지에 그린 연필유채, 10-5x25-7cm, 1954.

그는 부유했던 집안에서 태어나 시대의 암흑기에 살았다. 1931년 5월에 평안도 강계에는 홍역이 창궐하여 어린이가 70여 명이 사망하는 일이 있었다. 그 위험했던 시절에는 일제에 의해서 농촌 살림이 파탄에 빠졌고 36년에는 베를린 올림픽에서 손기정 마라토너의 우승과 신문상에서 손 선수 사진의 일장기를 지워버리는 일이 있었다. 30년대 말에는 이름을 일본식으로 바꾸고 조선어 사용금지 등 민족 말살 정책이 자행되었던 시기이다.

두 동강이 나는 1950년 전쟁 속을 화가 이중섭도 있었다. 일본 유학 시절 일본인 여성과 사귀었고 그 여인이 원산까지 찾아와 혼인하였다. 자녀를 두었고 행복한 생활을 하였는데 전쟁이 난 것이다. 화가의 형은 부르주아로 몰려 공산당에 잡혀가고 위기에 처한 가족은 부산으로 피난하였다. 부인과 두 아들, 조카 등이 함께 수용소에서도 지냈다. 다시 종교단체의 주선으로 제주도 서귀포에 이주하였다. 아내는 폐결핵으로 1952년에 아이들과 함께 일본으로 갔다. 그리고 다시는 만나지 못했다. 친구 한묵의 도움으로 정릉에서 요양 생활을 하다가 1956년 9월 6일 41세 나이로 운명하였다. 그는 가족에게 그리움을 담아 엽서를 보냈었다.

요즘 모 방송사의 ‘부부의 세계’드라마가 방영 중이다. 원작이 에우리피데스의 그리스 비극 메데이아에서 나온 ‘마녀와 악녀’. 2015년 BBC에서 방영한 ‘닥터 포스터’를 리메이크했다고 한다. 가족의 생계와 양육을 책임지고 전문직 여성으로 완벽하게 수행하는 여인과 그를 완전히 속이고 외도하는 남편이 도입부에 나온다. 그 남편을 돕는 사회상, 그 여인은 돌변한다. 욕망이 남자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여자에게도 있다는 것. 여성의 분노를 해저 밑까지 보여 준 것이다. 가족의 구성에서 주인공들의 착함이란 무엇인가? 애틋하고 그리워하는 맘은 어디로 간 것인가?

1998년에 경북 안동시 정상동 택지개발지구 내 한 무덤에서 410여 년 만에 발견된 '원이 아버지에게'라는 편지가 나왔다. 이 한글 편지는 고성 이씨 문중의 무덤을 옮기던 중 이응태(李應台. 1556∼1586)의 무덤에서 나온 것이다. 이응태의 부인인 '원이 엄마'는 남편의 병환이 날로 나빠지자 자기 머리카락과 삼 줄기로 미투리 (신발)을 삼아 쾌유를 기원하였는데 끝내 남편이 어린 아들인 원이를 남기고 서른한 세 살 나이에 숨지자 사모하는 마음을 편지지에 여백 없이 편지에 적어 관속에 넣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여보, 당신은 언제나 나에게 둘이 머리 희어지도록 살다가 죽자고 하셨지요. 그런데 어찌 저를 두고 당신 먼저 가십니까?” 다른 사람들도 우리처럼 서로 어여삐 여기고 사랑할까요? 라는 대목, 그 그리움을 전했다. (임세권 교수 풀이말 중)이 세상 사람들이 감동으로 다가가 안동에 원이 엄마 상을 세우고 음악을 지어 그를 기리고 있다.

조선의 가부장적인 사회가 붕괴하고 현대 산업사회가 바뀌어도 가족을 가정 안에 두고 부단히 힘쓰는 것도 인권의 한 몫일 것이다. 개인의 그릇된 욕망과 가정 파괴가 인권으로 둔갑하지도 말아야 한다.

화가의 엽서 그림의 서명은 한글을 풀어서 썼다. 그의 한글 이름을 끝내 지키고 부모와 자식 사랑 사상이 보인다. 그리움을 작은 엽서 종이와 담뱃갑 속 은지 등에 끝없이 그렸다. 사후에 부인이 일본에서 한국에 다시 찾아왔다 간 것은 그리움의 아픔을 작게나마 메워 주려나. 그리움으로도 다 치유할 수 없는 아픔이다.

홍재희 기자
obliviate@kukinews.com
홍재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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