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딥사이드] 슬릭, 꺾이지 않는 목소리

[딥사이드] 슬릭, 꺾이지 않는 목소리

슬릭, 꺾이지 않는 목소리

기사승인 2020-05-24 07:00:00

[쿠키뉴스] 이은호 기자 =이번에도 Mnet은 먹잇감을 놓치지 않았다. Mnet ‘굿 걸: 누가 방송국을 털었나’(이하 굿 걸)의 래퍼 슬릭은 크루 탐색전에서 성 소수자들과의 연대를 노래한 ‘히어 아이 고’(Here I Go)를 불렀고, 이후 유닛 선호도 조사에서 다른 출연자 9명 중 4명에게 ‘한 팀이 되고 싶다’고 선택받았다. 출연자 10명 중 가장 적은 득표였다. 이어진 2인 1조 공연에선 누구에게도 선택받지 못했다. 짝을 찾지 못한 효연이 슬릭과 한 팀이 되지만 둘은 선곡부터 난항을 겪는다. 자신 취향의 노래를 소개하는 슬릭과 떨떠름한 표정의 효연, 그리고 “미안한데 무대 올라가서 괜히 쭈뼛쭈뼛할 거면 안 하느니만 못하다고 생각한다”는 인터뷰. Mnet의 여느 예능 프로그램이 그랬듯 ‘잠시 후 계속됩니다’라는 자막 뒤에 계속된 건 다음 회 예고뿐이었다. 

불특정 다수의 판타지를 자극하며 음악 시장의 주류를 이끌어온 아이돌 그룹의 춤 멤버와 에코 페미니즘을 실천하는 비주류 언더그라운드 래퍼. 걸어온 길도, 잘하는 것도 다른 두 뮤지션이 한 팀을 이루는 과정에서 진통을 겪는 것은 당연하다. 게다가 무대를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은 약 하루 정도로 매우 짧았다. 다른 출연자들도 “지금 당장으로서는 내일 해야 하는 게 숙제”(윤훼이)라거나 “(슬릭과의 무대는) 구성이나 연출적인 부분이 굉장히 중요해서 시간이 모자라지 않을까”(전지우) 등 무대를 꾸릴 시간이 부족하다는 점을 슬릭을 선택하지 않은 이유로 꼽았다. 

그런데 한편에선 이런 상황을 ‘페미니스트 여성과 페미니스트가 아닌 여성의 갈등’ 구도로 몰아가려는 시도가 이어지고 있다. 페미니스트 여성은 (페미니즘 선언을 하지 않은) 다른 여성들에게 환영받지 못한다는 취지의 주장이 나오는 것이다. 남성 이용자가 많은 온라인 커뮤니티 ‘도탁스’에는 슬릭이 ‘히어 아이 고’ 무대를 보여준 뒤 유닛 결성에서 누구에게도 선택받지 못했다는 내용의 편집본이 ‘페미니스트 랩퍼(래퍼) 슬릭의 하루’라는 제목으로 올라왔다. 페미니스트를 ‘남들과 쉽게 어우러지지 못하는 별난 존재’로 그려내는 ‘굿 걸’의 편집과 페미니즘에 대한 반발이 함께 빚어낸 웃지 못할 광경이다. 

‘흥’이라는 문법이 지배하는 쇼 비즈니스 업계에서 올바름을 말하는 건 좋았던 분위기를 갑자기 불편하게 만드는 대역죄와도 같은 일이다. 지난달 MBC ‘라디오스타’에서 임현주 아나운서가 ‘여성스럽다’ ‘남성스럽다’는 표현이 성 고정관념을 강화한다고 문제를 제기하자, 온라인 커뮤니티에선 해당 장면에 악의적인 코멘트를 단 글들이 ‘오늘자 라디오스타 갑분싸’라는 제목으로 퍼져나갔다. 임 아나운서에겐 조롱과 비난이 쏟아졌다. 하지만 누군가 임 아나운서의 말을 불편하게 느꼈다면, 그것은 임 아나운서가 옳지 않은 주장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성 역할에 관한 고정관념을 갖고 있었음을 인식하는 것 자체를 껄끄럽게 여기기 때문이다. 질문은 간단해진다. 그름을 참고 흥에 동조할 것인가. 아니면 불편함을 감수하고 올바름을 말할 것인가.

슬릭과 임 아나운서를 향한 조롱은 당사자뿐 아니라 그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이들에게도 침묵을 강제하는 힘을 가진다. 하지만 아무도 지쳐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임 아나운서는 자신의 의견을 꾸준하게 개진하는 한편 허위사실유포와 모욕에 대해 법적으로 대응하겠다고 밝혔다. 슬릭은 첫 번째 유닛 결정이 끝난 뒤 말했다. “크루탐색전 무대를 너무 내 마음대로 했나 싶은 생각은 했는데, 그렇다고 충격을 받거나 ‘어떻게 아무도 나랑 안 할 수가 있어?’ 이러진 않았어요. 어차피 내가 혼자 보여줄 수 있는 무대는 이거 하나밖에 없으니까 내 마음대로 하자고 해서 한 거지, 후회는 절대 없습니다.” 침묵의 지층을 뚫은 목소리가 우리에게 향하고 있다. 절대 꺾이지 않을 목소리들이.

wild37@kukinews.com / 사진=Mnet ‘굿 걸’, MBC ‘라디오스타’ 방송화면

이은호 기자
wild37@kukinews.com
이은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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