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에서 1년…궷물오름과 노꼬메오름 (2)

제주도에서 1년…궷물오름과 노꼬메오름 (2)

58년 개띠 퇴직자의 제주도 1년 살기…마흔여덟 번째

기사승인 2020-06-13 00:00:00

6월 둘째 주인데 벌써 장마 이야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제 제주 생활이 3 주 정도 남았는데 아직도 가보고 싶은 곳이 많이 남아 있고 새록새록 새로운 명소가 드러난다. 서부 중산간 지역에 전망 좋은 오름이 있다는 말을 듣고 찾아갔다. 특별한 진입로 없이 농로를 통해 찾아간 오름은 탄성을 지르기에 충분했다.

돌아 나오는 길에 문제가 생겼다. 처음에 들어왔던 길 반대쪽 길로 나가면 조금 더 편하게 나갈 수 있을 듯했다. 넓은 밭이 있고 그 아래엔 골프장이 있으니 당연히 길이 있을 줄 알았다. 길은 끝없이 숲속으로 이어졌다. 그 끝에서 시내로 나가는 도로와 연결될 것이라는 생각에 천천히 차를 몰았다. 내비게이션에는 나타나지 않는 임도였다. 삼십분 넘게 가도 연결도로 안내는 없었다. 깊은 산속 임도에서 산악자전거 타는 사람들을 만나 길을 물었더니 이 길 끝엔 그냥 막다른 길이라 한다. 결국 차를 돌려 원점으로 돌아와 처음 들어왔던 농로를 통해 다시 나올 수 있었다.

제주의 숲은 깊고 깊다. 그 어느 숲길이든 중산간 지대에서는 지정된 길에서 이탈하면 길을 잃기 십상이다. 제주, 특히 중산간 지대의 숲에서 보다 겸손해져야 하는 이유다.

평생 아버지 몸에 천천히 쌓여 편안한 숨쉬기를 방해하고 있었던 연탄가루를 모두 태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 가족들 모두 하루 전 갑작스럽게 접한 황망한 소식을 아직 충분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나 역시 그랬다.

잠시 자리를 떠 걸었다. 어머니를 보살피는 일이 숙제로 남았다. 온갖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뜨거운 햇살에 잔디와 풀이 지쳐가는 모습을 보며 발걸음을 떼고 있었다. 어디선가 노랑나비 한 마리가 팔랑팔랑 날아와 멀지 않은 곳에 앉았다. 그러려니 생각하며 몇 걸음 더 나아가니 나비는 다시 날아올라 저만치 가서 내려앉았다. 그렇게 걷고 날고 내려앉고 서며 함께 걸었다. 다시 가족이 있는 곳으로 방향을 바꾸자 나비는 날개를 팔랑거리며 눈에서 멀어졌다.

아버지가 그 무거운 육신을 벗을 시간이 가까운 듯했다. 나를 기다리고 있던 아들이 나비를 보았느냐고 묻는다. 아들도 보았구나. 가족들이 모여 있던 곳으로 날아 들어왔었단다. 아버지는 그날 그렇게 몸속의 석탄가루를 다 태우고 가볍게 나비가 되어 날아갔다. 제주의 길을 걷다가도 나비를 만나면 그날 내 앞에 앉았다가 가족들 곁을 팔랑팔랑 날아간 나비를 생각한다. 아버지를 생각한다.

궷물오름 능선을 내려가면 남쪽 큰노꼬메오름을 마주보고 펼쳐진 넓은 목초 밭을 만난다. 가장자리에 철조망이 쳐져 있고 출입금지 안내문이 보인다. 이곳에 오기 전 궷물오름을 검색해 보니 ‘궷물오름 폐쇄’라는 내용이 보였는데 아마도 이곳을 말하는 듯했다. 찾아간 날은 목초를 모두 베어 저장준비를 한 생태였다.

철조망을 설치하기 전까지는 이곳 목초 밭의 초록을 배경으로 많은 사람들이 사진을 찍었을 것이다. 방문객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밭으로 들어가 자라고 있는 풀을 짓밟으며 사진을 찍고 나오면, 다른 사람들은 발자국이 없이 흠 없는 초록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기 위해 더 깊이 들어가며 목초지를 훼손했을 것이다. 이를 방치할 수 없어 철조망을 복구하고 출입금지 안내문을 내걸자, 어떤 생각 없는 사람이 궷물오름이 폐쇄되었다는 말을 퍼뜨린 듯하다.

관광객들은 제주도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유채밭을 짓이기며 들어가고, 이삭이 패고 있는 보리밭을 짓밟으며 들어가 사진을 찍는다. 어느 유채꽃 활짝 핀 밭에는 재배용이라는 팻말을 세우고 출입을 막기 위한 줄을 쳐 두었지만 무용지물이었고, 가파도의 청보리밭 가장자리엔 방문객의 사진촬영을 위한 의자를 놓아두었는데, 사람들이 아랑곳하지 않고 보리밭으로 들어가자 아예 일부를 베어내고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했다. 낟알 하나 떨어져도 마음 아파하는 농부의 마음을 헤아려야 할 것이다.

궷물오름에서 큰노꼬메오름을 향해 가는 길에는 명확한 안내문이 없다. 다만 갈림길에서 왼쪽을 향해 족은노꼬메오름 가는 길이라 안내를 하니 오른쪽 길을 따라 걸으면 된다. 삼나무가 우거진 숲을 바라보며 걷다가 어느새 삼나무 못지않게 곧게 자란 소나무 숲을 지나고 무질서하게 마구 자라고 있는 듯 이리저리 굽은 나무가 잘 어울린 활엽수 숲을 지난다. 경사가 심하지 않은 오르막을 만나면 큰노꼬메오름과 족은노꼬메오름 사이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그 위에서 두 오름의 갈림길을 만나고 다시 오른쪽 길을 따라 큰노꼬메오름 오르기를 시작한다.

궷물오름을 넘어와 숲길로 들어선 후 잘 정비된 숲속의 산책길에서 새소리와 조릿대 잎을 스치는 바람소리를 들으며 걷는 동안 하늘마저 나무들이 가리고 있으니 내가 살던 세상을 잊고 시간마저 잊는다. 큰노꼬메오름을 오르는 길은 가파르기가 조금 부담스럽기는 하지만 나무와 풀을 살피며 천천히 오르면 걷기가 가볍다.

그리고 문득 하늘이 나타난다. 그 울창하던 나무들이 한 순간에 모두 사라지고 키 작은 풀과 어린 나무들만 남았다. 한라산을 오르다 어느 순간 숲을 벗어나 열린 하늘을 마주하는 시원함을 맛본다. 여전히 정상 능선을 꽤 걸어 올라야 한다. 큰노꼬메오름 자체의 높이가 제주의 오름 중 가장 높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온 몸으로 느낀다. 그리고 돌아선다. 한라산에 들어서는 절대로 볼 수 없는 장엄한 산을 본다. 장엄하고, 웅장하고, 또... 이 풍경이 주는 느낌을 전할 적당한 단어 찾기가 쉽지 않을 만큼 한라산이 감동적으로 눈에 들어온다.


큰노꼬메오름의 능선까지는 뒤돌아보면 와락 안겨오는 한라산의 웅장함에 취해 힘든 줄 모르고 오른다. 그리고 그 능선에 올라 마주하는 또 다른 풍경은 호쾌하다. 한라산 아래에서 애월의 바다 넘어 수평선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왼쪽으로 눈을 돌리면 가까이에 바리메오름이 손짓하고 오른쪽엔 제주 시내가 다가온다. 그렇게 탁 트인 곳을 바라보다가도 문득 한라산의 풍경이 아쉬워 뒤를 돌아본다. 시원한 바람에 소쩍새와 뻐꾸기, 그리고 이름을 알지 못하는 온갖 새들의 지저귐이 실려 온다. 그렇게 세상의 일을 잊는 곳이 큰노꼬메오름이다.

아쉬움을 남기고 한라산을 바라보며 내려와 족은노꼬메오름으로 향하는 길은 다시 하늘까지 덮은 숲길이다. 잠시 나무가 짧아진 능선 위에서 하늘을 만나지만 곧 다시 숲속에 들어가면 오직 나무와 풀을 보며 걷는다. 새 지저귀는 소리와 바람 소리를 들으며 생각조차 내려놓는다. 궷물오름에서 큰노꼬메오름을 거쳐 족은노꼬메오름을 돌아오는 길은 제법 멀지만 그 길 위에서 잠시 세상을 잊는다.

기고 오근식 1958 년에 출생했다. 철도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철도청 공무원으로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다. 강원도 인제에서 33개월의 군 복무를 마치고 다시 복직해 근무하던 중 27살에 성균관대학교 영어영문학과에 입학했다. 대학 졸업 후 두 곳의 영어 잡지사에서 기자로 일했으며, 인제대학교 백병원 비서실장과 홍보실장, 건국대학교병원 홍보팀장을 지내고 2019년 2월 정년퇴직했다.

[쿠키뉴스] 편집=이미애 truealdo@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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