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육계 (성)폭력, 실태파악 했지만… 안일한 대응 ‘도마’

체육계 (성)폭력, 실태파악 했지만… 안일한 대응 ‘도마’

신체폭력, 학생 ‘16%’ < 성인 ‘26%’ < 대학생 ‘33%’… 실태조사 후 대책은 ‘기다림?’

기사승인 2020-07-07 05:00:23
스포츠·시민사회단체 대표들이 6일 국회 소통관에서 고(故) 최숙현 선수 사망사건 관련 진상조사와 책임자 처벌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사진=연합뉴스

[쿠키뉴스] 오준엽 기자 = “체육계 인권유린에 대해 이미 10년 전 전반적인 진단을 거쳤음에도 개선되지 못했으며 초·중·고 어린 학생들을 인권의 사각지대에 방치한 데 대해 깊은 책임을 통감하며 이런 일이 다시는 반복돼서는 안 된다는 각오로 대책을 마련하겠습니다.”

2019년 1월, 쇼트트랙 국가대표 심석희 선수의 ‘미투(#MeToo)’ 폭로로 다시 한 번 체육계 (성)폭력 문제가 사회적 질타를 받게 되자 도종환 당시 문화체육관광부 장관(현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위원장)이 국민 앞에 약속한 말이다.

도 전 장관 옆에는 유은혜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도 함께였다. 유 부총리는 도 전 장관과 함께 “더 이상은 안 된다. 체육계 지도자들이 선수들에게 가한 심각한 갑질과 폭력, 성폭력을 정부는 더 이상 용납하지 않겠다”면서 정부 차원의 근절대책을 수립하겠다고 약속했다.

국회도 힘을 보탰다. 당시 더불어민주당과 자유한국당, 바른미래당, 민주평화당 등은 체육계 (성)폭력 근절을 당론으로 정하고, 국회 문체위원장이었던 안민석 민주당 의원과 문체위 소속 염동열(자유한국당)·김수민(바른미래당)·최경환(민주평화당) 의원이 합심해 ‘운동선수보호법’ 혹은 ‘(성)폭력 근절법’으로 불리는 ‘국민체육진흥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하지만 1년 6개월여가 지난 지금, 국회는 만22세의 나이로 극단적 선택에 내몰린 최숙현 트라이애슬론(철인3종경기) 선수가 생명을 바쳐 던진 화두에 들썩이고 있다. 일부에서는 정책입안자들의 안이한 인식이 또 한 명의 생명을 앗아갔다는 비난을 쏟아내기도 했다.

◆ 실태조사 했지만… 후속조치는 ‘미적미적’

2019년 1월, 심 선수의 폭로로 재부상한 체육계의 (성)폭력 실태에 문체부와 교육부 등 정부기관은 국민인권위원회 산하에 1년의 기한을 둔 한시조직인 ‘스포츠인권특별조사단’을 구성, 체육계에 몸담고 있는 초·중·고·대학생 및 실업계 선수를 대상으로 한 전방위 실태조사에 나섰다.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는 6일 전체회의를 열고 고(故) 최숙현 선수 사망사건 관련 긴급현안질의를 갖고, 경주시 트라이애슬론팀 감독 A씨 등에게 사건진위와 사과의향 등을 물었다. 사진=연합뉴스

이후 11월7일, 특조단은 초·중·고 학생 6만3211명에 대한 인권실태 전수조사 결과 9035명이 언어폭력을, 8440명이 신체폭력을, 2212명은 성폭력을 경험했다고 밝혔다. 아울러 공적 피해구제 시스템이 전혀 작동하지 않았으며 학생들 또한 피해를 드러내지 못해왔던 것으로 조사돼 학생선수들의 인권보장 대책마련이 시급하다고 보고했다.

11월25일에는 실업팀 소속 성인선수들의 피해상황을 전했다. 인권위에 따르면 성인선수 1251명 중 언어폭력에 33.9%, 신체폭력에 15.3%, 성폭력에 11.4%가 시달려왔던 것으로 드러났다. 이어 “성인임에도 거의 매일 맞는 경우가 8.2%로 피해가 심각하다. 특히 여성선수의 보호가 시급하다. 학생선수보다 위험에 더 크게 노출돼있다”면서 조속한 개선을 주문했다.

가장 심각한 피해는 대학교에 소속된 운동선수들이었다. 12월16일 인권위가 발표한 조사결과에 의하면 102개 대학 7031명의 학생을 대상으로 진행한 인권상황 실태조사에서 (성)폭력을 경험한 이들이 선수층 중 가장 많았다. 언어폭력에는 31%, 신체폭력에는 33%, 성폭력에는 9.6%가 노출된 것으로 조사됐다.

이와 관련 인권위는 “상습적인 신체폭력 경험은 2010년 조사(11.6%)에 비해 오히려 증가했다. 일상적인 폭력과 통제도 초중고 학생들보다 더욱 심각함을 확인했다. 관리라는 명목으로 통제된 삶을 살고 있어 자기결정권이 억압받고 있었다”며 ▲자율 중심의 생활로의 전환 ▲운동중심의 운동부 문화 해체 등을 제안했다.

연말에는 일련의 조사결과를 바탕으로 대한체육회, 한국대학스포츠협의회, 문체부 및 문체부 혁신위원회 등 체육관계자와 전문가들이 참여하는 정책간담회를 개최해 세부적이고 구체적인 정책대안을 마련하고 인권상황 개선을 위한 정책권고를 이어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제대로 된 권고조치나 후속대안은 여전히 마련되지 않고 있다. 심지어 5일 국회 문체위 소속 전용기 의원(더불어민주당)에 따르면 감사원이 지난 2월 ‘국가대표 및 선수촌 등 운영·관리 실태’를 통해 (성)폭력 등의 이유로 지도자 자격을 취소(4명) 혹은 정지(93명)한 이들 중 일부가 여전히 학교 등에서 지도자로 활동해오고 있다는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다.

6일 국회에서 열린 문화체육관광위원회 전체회의에서 경주시청 트라이애슬론 팀 감독과 선수들(뒷줄)과 대한체육회 등 관련 단체장들(앞줄)이 국회에 출석해 질의에 답했다. 사진=연합뉴스

고(故)최숙현 선수는 대한체육회와 대한철인3종경기협회, 국가인권위원회 등에 진정서를 제출하는가 하면 폭행 등을 이유로 법적절차까지 밟았지만 문제가 해결되기는커녕 인권문제의 기본이라는 ‘피해자와 가해자의 분리조치’조차 제대로 이행되지 않아 2차 피해에까지 노출됐던 것으로 드러났다. 사실상 최 선수의 피해를 정부기관이 방조한 셈이다.

◆ 집권여당조차 체육계·문체부 안일대응에 ‘맹폭’


행정당국의 태도도 도마에 올랐다. 6일 국회 문체위 긴급현안질의에서 드러난 사실 등에 따르면 최 선수에 대한 폭행문제는 실태조사에서 파악되지 않았다. 나아가 최 선수가 폭행사실을 체육회 클린스포츠센터에 알렸지만 해결은커녕 문제해결을 포기했다. 

앞서 2월 사건진정서를 접수한 경주시체육회는 법정시한(14일)을 넘겨서야 정체가 불분명한 ‘치료사’ 1명의 책임이라고 사건을 축소하기까지 했다. 이 가운데 체육회와 문체부는 치료사의 정보조차 입수하지 못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게다가 경주시체육회가 문제를 해결하겠다며 내놓은 대책이 최 선수가 폭행을 당했던 경주 트라이애슬론 팀 해체였던 점도 문제로 꼽혔다.

이에 미래통합당 김은혜 대변인은 3일 논평을 통해 “최 선수를 살릴 기회가 있었다. 버티다 못해 최 선수가 체육회와 인권위, 철인3종협회에 도움의 손길을 요청했었다. 그러나 외면당했다”면서 “행정당국은 소극적 태도로 일관했다. 심지어 경찰에서는 ‘운동선수 폭행은 다반사’라는 말로 더 큰 상처와 좌절감을 줬다”고 질타했다.

이어 “국가와 체육계, 경찰과 행정당국. 이 중 단 한 곳만이라도 최 선수의 간절한 호소를 들어줬다면 지금의 비극은 없었을 것”이라며 “2016년 테니스 김은희 선수, 2018년 쇼트트랙 심석희 선수, 2018년 리듬체조 이경희 코치 등 스포츠계의 폭행과 성폭력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대책이 나왔지만 여전히 스포츠계의 현실은 가혹한 제자리”라고 꼬집었다.

박양우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6일 국회 문체위 전체회의에서 고개를 숙였다. 사진=연합뉴스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도 4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최 선수의 명복을 빌며 “최 선수는 6월25일 체육회 스포츠인권센터로부터 ‘경주시청 측이 변호사를 선임하고 혐의를 모두 부인하고 있어 어떻게 해줄 수 없다’는 통보를 받은 다음 날 새벽 모든 것을 포기해버렸다. 선수를 지켜야할 센터가 결정적 가해자가 된 것”이라고 강하게 비난했다.

나아가 “체육계의 학대·폭행 사건은 연례행사처럼 반복되고 있다. 일명 ‘운동선수보호법’이 올해 2월 국회를 통과하고 8월 시행을 앞두고 있지만 그 취지는 현장에 전혀 전달되지 않은 듯하다. 그러나 개정법이 시행됐다고 상황이 달라졌을 것 같지 않다. 문제는 수사와 처벌이 아닌 피해자 중심주의의 부재”라며 법적 보완과 함께 태도와 인식전환의 필요성을 시사했다.

오는 8월 시행을 앞둔 ‘운동선수보호법’ 개정에 참여했던 김수민 전 바른미래당 의원도 “법은 통제하고 규정할 수 있을 뿐이다. 법 개정을 추진할 때도 아쉬움이 많았지만 법이 만들어졌다고 모두 끝나는 것도 아니다”라면서 “결국 필요한 것은 인식의 변화와 바꾸려고 하는 행정당국의 의지”라고 강조했다. 

한편 박양우 문체부 장관은 6일 문체위 전체회의장에서 “특별조사단을 구성해 철저한 조사는 물론 기존 시스템의 작동문제를 확인해 이런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노력하겠다”면서도 “스포츠윤리센터는 수사 고발까진 할 수 있지만, 강제권 없는 조사만 할 수 있다. 제대로 일을 하려면 법을 개정해서라도 특별사법경찰제도를 도입해야 한다”고 제도보완을 주문했다.

이 가운데 고(故) 최숙현 선수가 생전 폭행·폭언 가해자로 지목한 경주시청 감독과 선배 선수 2명은 국회에서도, 대한철인3종협회에서도 폭행사실을 전면 부인했다. 하지만 대한철인3종협회 스포츠공정위원회는 비난여론을 의식한 듯 6일 국회 현안질의 후 심의를 거쳐 경주시청 팀 감독과 여자 선배에게는 영구제명을, 남자선배에게는 10년의 자격정지 처분을 내렸다.

oz@kukinews.com
오준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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