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창에서 석 달 살기] 선운사의 백파와 추사 그리고 미당

[고창에서 석 달 살기] 선운사의 백파와 추사 그리고 미당

고창의 은퇴자공동체마을 입주자 여행기 (3)

기사승인 2020-10-03 00:10:02
선운사 주차장에서 차을 세우고 일주문을 향해 가다보면 생태공원을 만난다. 이곳의 꽃무릇이 워낙 화려해 자칫 선운사마저 잊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쿠키뉴스] 고창의 선운산은 특히 여행의 사전 조사와 준비가 중요한 곳이다. 아무 생각 없이 9월 중순에 이곳 선운사의 꽃무릇을 보러 온다면 일주문 앞에 펼쳐진 생태공원을 물들인 붉은 꽃에 정신을 빼앗겨 선운산과 선운사를 잊기 쉽다. 고창에서 태어난 서정주의 ‘선운사 동구’가 새겨진 ‘미당서정주시비’가 눈에 들어올 리가 없다. 어디 그뿐인가. 백파와 추사의 이야기는 관심에서 더 멀어질 것이다. 
일주문은 절집에 들어가는 첫 번째 문이다. 선운사 일주문의 현판 글씨 ‘兜率山禪雲寺 (도솔산선운사)’는 일중 김충현이 썼다. 그의 인품만큼이나 넉넉하고 모난 곳이 없는 글씨여서 아무리 바라보아도 싫증나지 않는다. 일주문을 들어서서 선운사 앞을 흐르는 개천인 도솔천을 건너지 않고 오른쪽으로 걸으면 곧 울창한 삼나무 숲 안쪽에 자리한 선운사 부도밭에 이른다.

어느 절집을 찾아가든 절집 마당에 이르기 훨씬 전에 부도밭을 지난다. 그 절을 이끌었던 고승들을 기리는 비석과 부도가 모여 있는데 조금만 주의 깊게 살피면 한 번쯤은 들어본 스님들을 만날 수도 있다. 선운사의 부도밭은 절집 담장 가까운 곳에 있지만 그 앞에 울창한 삼나무 숲이 있어 눈에 잘 띄지 않는다.

이곳에 추사 김정희가 쓴 ‘백파율사비’가 있다. 다른 비석과 비교해 볼 때 크기나 모양 등이 두드러지지 않아 주의 깊게 살펴야 찾아낼 수 있다. 부도밭 문을 들어서서 왼쪽의 큰 바위 앞에 서 있는 이 비석의 앞면엔 두 줄로 華嚴宗主白坡大律師大機大用之碑 (화엄종주백파대율사대기대용지비)라 새겨져 있다. 뒷면엔 자유분방하며 거친듯한 글씨의 비문이 새겨져 있는데 사람들이 추사체라고 하는 글씨 형태가 이 비석의 글씨체다.
 
선운사 부도밭의 출입문은 특히 편안하고 따뜻한 느낌을 준다.
비석에 남아 있는 백파와 추사의 첫 인연은 험했다. 선운사의 백파가 선문수경이라는 저술을 통해 전통적인 선 수행을 설파하자 대흥사의 초의가 선문사변만어(禪門四辨漫語)를 펴내 전통적인 선 수행 방법에 대한 개혁을 주장하면서 시작된 선문논쟁은 1926년까지 100년 가까이 계속되었다.

부도밭 문을 들어서면 선운사를 이끌었던 많은 고승들의 사리탑과 비석이 방문객을 맞이한다. 왼쪽의 커다란 바위 앞에 추사가 쓴 백파율사비가 있다. 다른 비석에 비해 크지 않다.
1767년생인 선운사의 백파와 1786년생인 해남 대흥사의 초의는 19살의 나이 차이에 불구하고 논쟁에서 한 치의 물러섬도 없었다. 이 논쟁에 초의의 동갑내기 친구 추사가 끼어들었다. 당시 추사는 제주에 유배 생활을 하고 있을 때였다.

당시 58세였던 추사가 77세의 백파에게 ‘백파 망증 15조’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낸다. 그 글은 이렇게 시작한다. ‘... 선문(禪門)의 모든 사람이 거의 다 무식한 무리뿐이라 이렇고 저렇고 따질 상대가 되지 못하오. 내가 이들을 상대로 그렇고 저렇고 따지는 것이 철부지 어린애와 떡 다툼하는 것 같아서 도리어 창피하니 이것이 스님의 망증(妄證) 제1이요, ...’

백파율사비의 뒷면엔 추사가 짓고 쓴 비문이 새겨져 있다. ‘우리나라에는 근세에 율사(律師)의 한 종파가 없었는데 오직 백파(白坡)만이 이것에 해당할 만하다. 그러므로 율사로 썼다. 대기(大機)와 대용(大用)은 백파가 80년 동안 착수하고 힘을 쏟은 분야이다. -중략- 예전에 백파와 더불어 자못 왕복하면서 어려운 문제를 분변한 적이 있었는데, 이는 곳 세상 사람들이 함부로 떠들어 대는 것과는 크게 다르다. 이 점에 대해서는 오직 백파와 나만이 아는 것이니 비록 온갖 말을 한다 하더라도 사람들이 모두 이해하고 깨닫지 못하는 것이니, 어찌 율사를 다시 일으켜 세워 오게 하여 서로 마주하여 한번 웃을 수 있겠는가. 지금 백파의 비석에 새길 글자를 지음에 만약 대기대용(大機大用)이라는 한 구절을 큰 글씨로 특별히 쓰지 않는다면 백파의 비(碑)로서 부족할 것이다. -후략-’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에서 발췌]
불교를 천시하는 흐름이 여전히 남아 있었음을 감안하고 읽어도 추사의 글은 차마 입에 담기 어려울 만큼 험악하다. 그러나 백파는 “반딧불로 수미산을 태우려고 덤비는 꼴”이라며 가볍게 넘겼다.

추사는 그러나 백파 입적 후 그의 묘비에 ‘대기대용의 비’라고 썼다. 백파가 평소에 펼치던 지론을 요약한 말이다. 뒷면의 비문 내용 역시 공손하여 스님에 대한 존경이 극진하다. 그렇게 추사는 백파와 화해했다. 그 화해의 흔적이 선운사의 백파율사비다.

부도밭을 나와 돌아보면 화창한 햇볕 속에 모두들 조심해서 가라고 배웅을 하는 듯하다.
백파와 추사 사이에 미당 서정주가 끼어들며 ‘추사와 백파와 석전’이라는 시를 남겼다. 1974년 시문학 7월호에 발표한 이 산문시는 이듬해 발간한 시집 ‘질마재 신화’에 수록되어 있다. 

부도밭은 나오면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도솔천을 바라볼 수 있다. 11월 말 단풍이 짙어지면 이 도솔천에 비치는 단풍 색을 마음과 카메라에 담기 위해 많은 사람이 찾아와 북적인다. 


추사(秋史)와 백파(白坡)와 석전(石顚)/서정주

질마재 마을의 절간 禪雲寺(선운사)의 중 백파한테 그의 친구 추사 金正喜(김정희)가 晩年(만년)의 어느 날 찾아들었습니다.
종이쪽지에 적어온 石顚(석전, 돌이마)란 雅號(아호) 하나를 백파에게 주면서,
‘누구 주고 싶은 사람 있거던 주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백파는 그의 생전 그것을 아무에게도 주지 않고 아껴 혼자 지니고 있다가 이승을 뜰 때, ‘이것은 추사가 내게 맡겨 전하는 것이니 후세에 임자를 찾아서 주라.’는 遺言(유언)으로 감싸서 남겨놓았습니다.
그것이 李朝(이조)가 끝나도록 절간 서랍 속에서 묵어오다가, 딱한 일본식민지 시절에 朴漢永(박한영)이라는 중을 만나 비로소 전해졌는데 석전 박한영은 그 아호를 받은 뒤에 30년간이나 이 나라 불교의 大宗正(대종정) 스님이 되었고, 또 불교의 한일합방도 영 못 하게 막아냈습니다.
지금도 선운사 입구에 가면 보이는 추사가 글을 지어 쓴 백파의 비석에는 大機大用(대기대용)이라는 말이 큼직하게 새겨져 있습니다.
​추사가 준 아호 ‘석전’을 백파가 생전에 누구에게도 주지 않고, 이 겨레의 未來永遠(미래영원)에다 가만히 유언으로 싸서 전하는 것을 알고 추사도 ‘야! 段數(단수) 참 높구나!’ 탄복한 것이겠지요.

오근식은 1958년에 태어났다. 철도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철도청 공무원으로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다. 군 복무를 마치고 복직해 근무하던 중 27살에 대학에 진학했다. 졸업 후 두 곳의 영어 잡지사에서 기자로 일했으며, 인제대학교 백병원 비서실장과 홍보실장, 건국대학교병원 홍보팀장을 지내고 2019년 2월 정년퇴직했다. 2019년 7월부터 1년 동안 제주여행을 하며 아내와 함께 800km를 걷고 돌아왔다. 9월부터 고창군과 공무원연금공단에서 마련한 은퇴자공동체마을에 입주해 3달 일정으로 고창을 여행 중이다.

글/오근식 ohdante@daum.net  편집/이미애 truealdo@kukinews.com
이미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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