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쿡리뷰] ‘내가 죽던 날’ 침묵하는 낯선 타인들의 정서적 연대

[쿡리뷰] ‘내가 죽던 날’ 침묵하는 낯선 타인들의 정서적 연대

기사승인 2020-11-10 06:35:02
▲ 영화 '내가 죽던 날' 포스터

[쿠키뉴스] 이준범 기자 = 아무도 자신의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대신 남들이 내뱉는 공허한 말이 떠다닌다. ‘내가 죽던 날’(감독 박지완)은 사실과 거짓, 남의 이야기와 내 이야기를 정돈하거나 구분할 의지가 별로 없다. 사건을 수사하는 경찰로선 별 의미 없는 사건과 말들을 수집하고 다니며 자신만의 진실을 찾아가는 현수(김혜수)의 이야기만 의미를 갖는다.

‘내가 죽던 날’은 세상을 살아갈 기운과 희망을 잃어버린 채 긴 공백기를 가졌던 형사 현수가 운명인지 필연인지 모를 한 사건을 맡으며 시작하는 이야기다. 범죄 사건의 주요 증인이었던 세진(노정의)이 외딴섬에서 유서 한 장만 남긴 채 절벽 아래로 사라진 사건이다. 시체도 없고 목격자도 없지만 모든 정황이 세진의 극단적 선택을 가리키고 있는 상황. 현수는 세진의 행적을 쫓으며 항상 혼자였을 그가 느꼈을 고통에 가슴 아파한다. 그리고 세진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본다.

‘내가 죽던 날’은 기본적으로 후일담 형식의 영화다. 제목이 암시하듯 삶과 죽음의 경계를 오간 순간부터 그 이전의 과거를 되짚는다. 내용이 복잡하진 않으나 잘못하면 길을 잃기 쉽다. 현수의 수사가 어느 순간부터 단순히 사건을 해결하는 것에 그치지 않기 때문이다. 집요하게 한 사람(세진)의 삶과 행적을 추적하는 현수는 116분 영화 한 편에 담기 벅찰 정도로 방대한 양과 깊이를 마주한다.

▲ 영화 '내가 죽던 날' 스틸컷

처음엔 형사가 진실을 추적하는 것처럼 보였던 영화는 사건이 다양한 각도로 해석될 수 있는 여지를 모두 받아들인다. 불행에 빠지는 한 가족의 이야기, 불쌍한 소녀를 애틋하게 여긴 형사의 이야기, 말없이 그녀를 바라본 마을 주민의 이야기 등 어느 쪽을 다뤄도 충분히 한 편의 영화가 탄생한다. 하지만 ‘내가 죽던 날’은 그 대신 묵묵히 사건을 파헤치는 현수를 통해 세진에게서 한 줄기 희망을 발견하려고 애쓴다.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죽은 소녀와 나누는 깊은 정서적 연대감이 영화의 가장 큰 동력이고 그걸 설득해낸다.

죽은 세진의 이야기는 넘쳐나는 반면에 현수의 이야기는 막막하고 불충분하다. 자신의 삶에 대해 누구에게도 직접 얘기한 적 없는 것 같은, 얘기할 생각도 없는 것 같은 현수의 마음은 세진이라는 창을 통해서만 유추할 수 있다. 물리적으로 언어를 발화하기 어려운 순천댁(이정은)은 영화를 관통하는 침묵의 현신과 같은 존재다.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고 말도 걸지 않는 순천댁이 현수와 나누는 필담은 그래서 더 인상적이다. 현수의 침묵과 세진의 침묵, 순천댁의 침묵은 모두 다르지만 결국 같다.

‘내가 죽던 날’은 서로 아무 인연도 없는 세 여성의 보이지 않는 연대를 섬세하게 다룬다. 영화의 결말에 이르러 다시 처음을 돌이켜 보면 이야기가 닿고자 했던 지점을 더 분명하게 느낄 수 있다. 대부분 장면에 등장하며 이야기를 앞에서 이끌어간 배우 김혜수의 안정적인 가이드가 빛난다. 말 못할 인물들의 사연 속으로 순식간에 몰입시키는 배우 이정은의 묘한 표정은 그 어떤 말보다 더 많은 걸 말해준다.

오는 12일 개봉. 12세 관람가.



bluebell@kukinews.com
이준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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