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뉴스] 오준엽 기자 = 13일 오전 10시30분, 이태원이 정치판에 소환됐다. 이태원 중심도로 뒤편 먹자골목 삼거리에는 제1야당인 국민의힘 전신인 미래통합당 원내대표를 역임한 법관출신 정치인 나경원이 운동화를 신고 눈밭에서 사진세례를 받았다. 서울시장 출마선언장으로 이태원 뒷골목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왜 나경원은 다른 이들과 달리 이태원에서 선거전을 시작했을까.
전문가들은 14일 나 전 의원의 선택은 통상적인 정치인들의 정지적 의도가 깔린 선택이자 이미지 정치의 산물이라고 입을 모았다. ‘독하게 섬세하게’라는 선거슬로건을 내걸고 젊음의 열기 대신 차가운 눈이 쌓인 이태원 고개와 ‘장사하고 싶다’는 팻말이 붙은 폐업점포 유리창들로 문재인 정부와 서울시의 실정을 질타하고 새 시대를 열겠다는 뜻을 보였다는 해석이다.
실제 나 전 의원은 출마장소 선택의 이유에 대해 “뒤로 보이는 ‘장사하고 싶다’ 저 한 마디가 많은 것을 의미한다. 서울시민이 가장 힘들고 가장 아픈 것이 무엇인지 생각했고, 이것을 보듬는 것부터 시장되는 사람이 할 일이라고 생각해 이 자리를 선택했다”고 밝혔다. 이날 운동화를 신은 의미도 “위기의 시대 운동화 신고 구석구석 누비며 살피겠다”는 것이었다.
직접 밝히지는 않았지만 정치평론가들은 2030세대 젊은이들과 외국인들의 집결지로 통한 이태원, 활력과 치열함, 다양성이 공존했지만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코로나19)로 소상공인·자영업자도, 청년들도, 외국인도 떠나 위기에 직면한 공간의 상징성을 통해 시대의 어려움을 극명히 보여주고 이를 극복하겠다는 의지를 극명한 대립을 통해 보이려는 의도였다고도 봤다.
다만 그 결과에 대해서는 반응이 엇갈렸다. 직접 정치에도 뛰어들었던 유용화 한국외국어대학교 초빙교수는 “대개 정치인들은 이미지를 만들기 위한 장소로 공감을 끌어내면서도 정치인으로서의 의지 등을 부각할 수 있는 곳을 택한다”며 “왜 이태원이어야 했는지 모르겠다. 독특했고, 나름의 상징성도 있지만 이미지가 명확하지 않았다”고 부정적 견해를 보였다.
나아가 “정몽준 전 의원이 백범 김구의 의지를 계승하겠다며 선택했던 백범기념관이나 소상공인과 자영업자의 어려움을 극명히 보여주면서도 지지를 끌어낼 수 있도록 자신의 지역구이기도 한 동작구에 속한 사당동 고개나 사당역 인근, 기존의 부유한 강남 얌체 아가씨 이미지를 상쇄할 도봉동이나 시장 같은 지역을 선택했다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고 덧붙였다.
노무현 대통령 시절 대통령자문정책기획위원회 위원이었고 2010년 민주당 개혁특별위원회 자문위원으로도 활동했던 박상철 경기대학교 정치전문대학원 교수는 “출마선언과 같은 행사에서 정치인들의 단어선택이나 시간, 장소는 굉장히 중요한 정치적 메시지를 담는 일종의 퍼포먼스”라며 “자신이 지향하는 바나 자기를 드러낼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이 사용된다”고 했다.
이어 “이태원 출마선언은 개인적으로 실패했다고 본다. 어려운 자영업자들을 달래고 서울시정의 공백과 젊은 세대의 호응을 얻어내려는 의도가 이태원과 선뜻 연결되지 않는다. 독하게 섬세하게라는 슬로건과도 직관적으로 어울리지 않는다”면서 “트럼프의 ‘미국을 위대하게’나 바이든의 ‘아메리카 어게인’과 같이 간결하면서도 강렬한 메시지 전달이 아쉽다”고 평했다.
그러면서 “오히려 과감하게 광화문이나 서울시청 앞에서 했어도 좋지 않았나 싶다”며 “여성으로서 섬세한 터치를 하겠다는 점, 서울시를 잘 안다는 점, 오로지 몸으로 뛰겠다며 운동화를 신고 길거리에서 출마선언을 하는 것은 과히 나쁘진 않았지만, 제일 중요한 시기와 내용을 좀 더 어필하는 방향이 나았을 것 같다. 임펙트(충격)이 약했다”고 덧붙였다.
반면 정치컨설팅 전문가인 배종찬 인사이트케이 연구소장은 ‘나름의 성공’이라는 긍정적 평가를 내렸다. 그는 “홍석천이나 유명인사의 가계가 밀집한 이태원조차 문을 닫을 어려운 경제상황이나 이번 서울시장 보궐선거가 2030세대, 중도층, 가정주부층을 끌어들여야 한다는 측면에서 ‘이태원조차 불빛이 보이지 않는다’는 분명한 상징성을 내포한 장소선택이었다”고 말했다.
아울러 “무엇보다 젊은 세대들의 생명력 넘치는 공간에서 오히려 죽은 공간이 됐다. 이는 ‘독하게 섬세하게’라는 슬로건과 함께 박영선이든 우상호든 여권 시장후보와 각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문재인 대통령을 향한, 이른바 반문세력의 결집을 위한 선택이었다고 판단된다”며 “서울경제 측면에 큰 성과가 없는 박원순 시장과의 차별화도 강조한 행보였다”고 부연했다.
덧붙여 정치인들의 장소선택이나 구사하는 언행을 두고 “통상적으로 출마선언 등 정치적 행보를 발표할 때는 언론의 노출을 고려한 기자회견장이나 국회, 당 사무실 등에서 이뤄지는 경우가 많지만,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이 시카고라는 다인종·다문화 도시에서 출마선언을 하며 첫 흑인 대통령에 대한 열망을 부추긴 것처럼 배경은 강력한 힘을 발휘하기도 한다”고 했다.
나아가 “앞으로 이같은 이미지 전략이 더욱 강조되고 힘을 발휘할 것”이라며 “정치도 공급자 중심에서 유권자, 정치소비자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다. 나경원은 정치와 연관성이 없던 이태원을 선택해 이미지를 환기시키고 가치를 부여했다. 일상의 모습을 보여주는 관찰카메라나 유튜브 등도 이미지 극대화 전략의 일환으로 차츰 활용되고 있다”고 시대의 변화도 시사했다.
한편 나머지 18명의 서울시장 출마선언자들은 대부분 국회 기자회견장이나 자신의 사무실, 소속 정당의 당사 등 언론과의 접촉이 용의하거나 좀 더 공식적이고 권위적인 공간에서 출마선언을 했다. 이를 두고 전문가들은 민의의 전당인 국회나 정치권을 존중하는 의미에서, 공식적이고 무게감 있는 연출을 위한 흔한 장소선택이라고 설명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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