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종아리를 구한 교실 페미니즘

[기자수첩] 종아리를 구한 교실 페미니즘

기사승인 2021-05-27 06:00:07

[쿠키뉴스] 한성주 기자 =중학교 3학년 때 신체 콤플렉스가 생겼다. 체육 시간에 줄넘기 수행평가를 치른 날이었다. 특목고에 가고 싶었던 나는 A를 받기 위해 2단뛰기를 연속으로 20번 해냈다. 뿌듯하던 차에 남자아이 무리가 내 종아리를 가리키며 “그러다 말근육 된다”고 놀렸다. 버럭 화를 내며 맞섰지만, 교실로 돌아와 내내 종아리를 주물렀다.

그 뒤로 종아리 박해가 시작됐다. 영어단어를 외우면서, 친구와 떠들면서, 수업을 들으면서 종아리를 주물렀다. 나뿐만 아니라 꽤 많은 여자아이들이 다리를 주무르는 습관이 있었다. 종아리 ‘알’이 생기지 않게 해준다는 슬리퍼도 유행했다. 교실마다 ‘종아리 롤러’, ‘사각턱 롤러’로 불리는 조잡한 플라스틱 마사지 도구를 가지고 다니는 여자아이들이 서너명은 있었다. 가끔 마사지한 자국대로 푸르스름하게 멍이 들기도 했다. 특목고는 떨어졌다.

박해는 1년 만에 끝났다. 고등학교에서 만난 영어 선생님 덕분이었다. 우리는 교과목 이름과 선생님의 성을 합쳐 그를 ‘영최’라고 불렀다. 어느 날 교재에 최초의 여성 마라토너에 대한 지문이 나왔는데, 영최가 그 선수의 실제 사진을 스크린에 띄웠다. 사진을 본 우리는 ‘기골이 장대하다’며 키득댔다. 키득대는 순간에도 나는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종아리를 주무르고 있었다. 영최는 별안간 싸늘하게 꾸짖었다. “운동선수가 기골이 장대하면 웃긴 거니? 이 선수가 남자였어도 너희가 똑같이 웃었을까?”

중학교 때 남자아이들은 내 몸에 근육이 붙는 걸 놀림거리로 삼았다. 근손실도 아니고, 근성장이 놀림감이 된다니 너무 이상하지 않나. 근육이 발달해 건강한 여성의 몸을 부정적으로 인식하고 있었던 거다. 게다가 나는 남자아이들이 말근육이라고 해서 버럭했다. 그러니까 내 몸을 평가해서가 아니라, 내 몸을 좋게 평가해주지 않았다고 화를 냈다. 뒤통수가 얼얼했다. 페미니즘과 최초로 마주친 순간이었다.

성차별은 교묘한 모습으로 진화하며 잔류한다. 눈에 보이는 노골적인 성차별은 사라진 지 오래다. 19세기와 달리 여자아이들에게도 체육활동의 기회가 주어진다. 20세기와 달리 여성 운동선수들이 설 자리도 많아졌다. 그런데 여전히 여자아이들은 종아리 근육이 커질까 걱정한다. 여성 운동선수에게는 역량보다 외모에 대한 평가가 쏟아진다. 19세기~20세기의 젠더 감수성을 가지고 있다면, 이런 세상을 완벽한 평등의 시대라고 호평할 수 있다.

돌이켜 보면 특목고 불합격은 행운이었다. 영최가 아니었다면 지금도 기사를 쓰면서 종아리를 주물렀을 것이다. 내 몸에 대한 타인의 평가를 용인하고, 하나하나 응수하는 피곤한 인생을 살았을 것이다. 근육이 발달한 여성의 몸을 보고 키득대거나, 말근육이라고 놀리는 성희롱범이 됐을 수도 있다. 나랑 같이 다리근육을 고민했던 여자아이들도, 나를 놀렸던 남자아이들도 모두 영최같은 선생님을 만났을까.

castleowner@kukinews.com

한성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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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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