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한표의 사진 하나 생각 하나] “사람은 겉 모양보다 마음이 중요하다”

[박한표의 사진 하나 생각 하나] “사람은 겉 모양보다 마음이 중요하다”

박한표(우리마을대학 제2대학 학장)

기사승인 2021-05-29 10:53:06
박한표 학장
음식은 소금으로 간을 맞추고, 사람은 마음으로 맞추는 것이라는 말을 나는 좋아한다. 정철의 <사람사전>은 마음을 이렇게 말한다. 마음은 "몸의 주인. 마음이 시키면 몸은 한다. 뜨거운 사랑도 하고 차가운 이별도 한다. 총칼을 쥐어 주면 전쟁도 한다. 몸은 죽는 날까지 마음을 행한다. 몸이 마음을 거역하는 사건은 일생에 딱 한 번, 마음은 죽고 싶지 않은데, 마음은 하루만 더 살자고 하는데 몸이 이를 거부하는 사건, 반항이 아니라 충심이다. 몸은 자신이 늙는 것은 견딜 수 있지만 마음이 늙어 추해지는 꼴은 차마 보지 못한다." 

오늘 읽은 <장자>는 ‘사람은 겉모양보다 마음이 중요하다’는 주제였다. 

常季曰(상계왈) 彼爲己(피위기) 以其知得其心(이기지득기심) 以其心得其常心(이기심득기상심) 物何爲最之哉(물하위최지재) [물: 여기서는 '사람들', 최: 여기서는 모일 취(聚)의 뜻으로 '모여든다'이다.]

상계가 말했다. 그는 '앎'으로 그 마음을 터득하고, 그 마음으로 영원한 마음을 터득하는 등 자기 수양에만 전념했는데, 어떻게 사람들이 모여듭니까?"

仲尼曰(중니왈) 人莫鑑於流水(인막감어류수) 而鑑於止水(이감어지수)
공자가 대답했다. 사람은 흐르는 물에, 자신을 비쳐보지 않고 멈춰 있는 물에 바쳐본다.

唯止能止衆止(유지능지중지)
이처럼 멈춰 있는 것만이 능히 다른 것을 멈추게 할 수 있다.

마음의 문제라면 그런 마음이란 '명경지수(明鏡止水)'와 같다고 공자는 말한다. 남의 눈치나 칭찬을 의식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자기 실현만을 위해(爲己, 자기 자신이기 위해)', 차분하고 조용히 정진했을 뿐인데도, 사람이 모여드는 것은 이런 거울같이 맑은 마음에 자기들의 참모습을 비추어 보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더 나아가, 장자는 제4편 "인간세"에서 마음을 굶기(심재, 心齋)라고 한다. 

回曰(회왈) 敢問心齋(감문심재)
안회가 물었다. "마음을 굶기기는 어떤 경지를 이르는 것입니까?"

仲尼曰(중니왈) 若一志(약일지)
공자가 대답했다. "너는 뜻을 하나로 하여라."

无聽之以耳(무청지이이) 而聽之以心(이청지이심) 无聽之以心(무청지이심) 而聽之以氣(이청지이기)
귀로 듣지 말고 마음으로 듣도록 하라. 다음엔 마음으로 듣지 말고, 기(氣)로 들어라.

聽止於耳(청지어이) 心止於符(심지어부)
귀는 소리를 들을 뿐이요 마음은 사물에 응할(인식할) 따름이다.

氣也者(기야자) 虛而待物者也(허이대물자야)
그러나 기는 공허하여(텅 비어서) 모든 사물을 다 받아들이는 것이다.


'심재'의 적합한 번역은 '마음을 굶기다'로 나는 본다. 그냥 비우는 것보다 더 적극적인 행위이다. 이는 제2편에서 말한 '오상아(吾喪我)' 그리고 제6편에 나오는 '좌망(坐忘, 앉아서 잊어버림)'과 함께 <장자>의 가장 중요한 사상이다. 표현은 다르지만 다 같이 우리의 욕심, 분별심, 이분법적 의식(意識), 일상적 의식, 자기 중심 의식인 보통 마음을 완전히 버리고 이를 추월하는 초 이분법적 의식, 빈 마음, 새로운 마음을 갖는 방법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 새로운 의식에 도달하는 길이 무엇인가? 공자는 우선 마음을 하나로 모은 다음, 귀 대신 마음으로 듣고, 다음엔 기(氣)로 들으라고 했다. 귀는 소리를 들을 뿐이고 마음은 대상을 인지할 뿐이지만, 기(氣)는 텅 비어 모든 것을 수용하니 이렇게 텅 빈 기(氣)로 사물을 대하면, 그 빈 곳에 도(道)가 들어온다. 이렇게 도(道)가 들어오도록 마음을 비우는 것, 이것이 마음을 굶기는 것, '심재'라는 것이다. 심재란 우리의 감각 작용이나 인식 작용을 초월하여, 빈 마음, 새로운 마음으로 도(道)와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 상태를 장자는 이렇게 말한다. 

瞻彼闋者(첨피결자) 虛室生白(허실생백) 吉祥止止(길상지지)
저 빈 곳을 보라. 텅 빈 방에 밝은 햇빛이 찬다. 행복은 고요함 속에 머무르는 것이다.

夫且不止(부차부지) 是之謂坐馳(시지위좌치)
고요함 속에 머무르지 못하면, 이를 일러 '앉아서 달림(좌치)이라 한다. 

'자신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을 심재라 할 수 있다. 심재를 하면, 일상의 의식 속에서 이루어진 옛날의 '작은 나(self, 小我)'가 사라지고, 새로운 큰 나(Self, 大我)'가 탄생한다. 그런 근본적인 변화가 생겼을 때 명예나 실리 추구에 초연하게 된다. 물론 그런 일이 쉽지는 않다. 세상과 완전히 인연을 끊고 은둔하면 몰라도, 사회에 참여하면서 마음을 비우고 살기는 몹시 어렵다. 그렇지만, 진정으로 심재를 하며 마음을 완전히 텅 빈 방과 같은 상태가 되면 그 '텅 빈 방이 뿜어내는 흰 빛', 곧 순백의 예지가 생기는 것을 체험하리라는 것이다. 

이를 위해, 1) 고요히 머물러야 한다. 가만히 앉아 몸과 마음을 고요히 하는 것, 2) 그 중에서 특히 '마음을 모으는 일'이 기본 요건이다. 몸은 가만히 앉아 있으나 마음이 함께 앉아 있지 못하고 사방을 쏘다니게 되면 헛일이다. 이렇게 몸은 앉아 있으나 마음이 쏘다니는 상태를 '좌치'라고 하는데, 가만히 앉아 자기를 완전히 잊어버린다는 좌망과 맞서는 개념이다. 좌망이 마음의 구심(求心)운동이라면, 좌치는 마음의 원심(遠心) 운동인 셈이다. 

일상에서는 마음을 다스리려면, ‘耳目內通(이목내통) 外於心知(외어심지)’, 즉 "귀와 눈을 안으로 통하게 하고 마음의 앎을 밖으로 향하게 하라"고 했다. 우리의 '귀와 눈을 안으로' 통하여 깊은 내면의 세계를 들여다보게 하고, 우리의 일상적 의식에 속하는 마음이나 거기에서 나오는 앎을 '밖으로 하여' 버릴 때, 지금까지 경험해 보지 못한 '초월적 힘'이 발동하리라고 했다.
최문갑 기자
mgc1@kukinews.com
최문갑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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