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한표의 사진 하나 생각하나] 우리를 노예처럼 부리는 건 제어되지 않은 욕망

[박한표의 사진 하나 생각하나] 우리를 노예처럼 부리는 건 제어되지 않은 욕망

박한표(우리마을대학 제2대학 학장)

기사승인 2021-08-05 23:22:18
박한표 학장.
리플리 증후군(Refley syndrome)을 앓는 사람들이 주변에 꽤 있다. 그냥 소설이나 영화의 이야기인 줄 알았다. 이 증후군은 현실 세계를 부정하고 허구의 세계만을 진실로 믿으며 상습적으로 거짓의 말과 행동을 일삼는, 반 사회적 인격 장애이다. 거짓이 탄로 날까 봐 불안해 하는 단순 거짓말쟁이와 달리, 이 증후군을 앓는 사람은 자신이 한 거짓말을 완전한 진실로 믿는다. 나를 위해 나를 속이는 거다. 

이 말은 1955년에 패트리샤 하이스미스가 쓴 연작소설 <재능 있는 리플리>의 주인공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그리고 1960년에 알랭 들롱(Alain Delon, 우리나라에서 알랑 드롱이라 부른다) 주연의 영화 <태양은 가득히>와 앤소니 밍겔라 감독의 1999년 작 <리플리> 역시 이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몇 년 전에 이 문제를 다룬 드라마가 있었다. 

리플리 증후군은 거짓말과 다르다. 일반적으로 거짓말은 다른 사람을 속임으로써 자신이 얻게 되는 이득을 목적으로 하고 반복된 거짓말이 대개 심리적 불안과 죄책감을 야기한다. 반면, 리플리 증후군은 현실을 부정하고 자신이 만든 허구를 진실인 것처럼 믿게 되는 정신적 증상으로, 보통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이룰 수 없는 상위의 영역이나 자신의 사회적 역할을 극대화 할 수 있는 거짓말을 반복하는 것을 말한다. 리플리 증후군을 사람들은 '환상 거짓말' 혹은 '병적 거짓말'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런 사람들을 나는 '허언증' 환자라 보기도 한다. 허언증 환자도 자신이 한 거짓말을 사실인 것처럼 믿어 버린다. 

전문가들은 이 증후군의 원인을 자기애의 손상, 열등감, 과도한 성취욕으로 본다. 그들은 현재 자신의 능력으로는 스스로 높은 욕구를 충족시킬 수 없기에 피해 의식을 가지게 되고, 무의식적으로 자신이 처한 현실을 부정(denial)하고 자신만의 허구 세계(fantasy)를 창조한다. 그리고 그 환상 속에서 본인이 이상적으로 생각해온 신분, 인품, 능력을 만들어 내며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 왜 그럴까? 허구의 세계 속에서 성취감과 편안함을 느끼기 때문에 자신의 질병을 인정하지 않으며 치료에 저항한다는 것이다. 


SNS에 중독된 사람들에게 리플리 증후군이 나타나기 쉽다. SNS상에서는 행복한 일만 생기고 걱정 없이 사는 것처럼 가면을 쓴다. 물론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자신을 포장하고 싶은 욕구가 있는데, 현실과 그 욕구가 만든 자신과의 괴리가 커지면 자아를 잃고 하나의 정신병으로 발전하는 것이다. SNS 자체가 리플리 증후군을 만든다고 볼 수는 없지만, 상대적으로 자아가 강하지 않고 상대적 박탈감을 잘 느끼는 사람이 SNS에 의존하게 되면 허구세계를 만들어 리플리 증후군을 겪기 쉽다. 

그런 경우 SNS를 멀리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나는 누구인가'를 묻는 고독한 묵상이 필요하다. 그 고독의 힘으로 강한 자아를 길러야 한다. 여기서 인문 운동가의 역할이 커진다. 지금 우리 사회가 심한 '편 가르기'를 앓으면서 민주주의가 위협받고 있는 것도, 우리가 '강한 자아'를 가진 시민으로 만들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강한 자아를 가진 자는 어디서나 당당하게 자신의 주장을 펼치고, 타인의 의사를 존중하고, 불의한 권력에 저항한다. 이런 강한 자아를 갖자는 것이 나의 인문 운동이다. 강한 자아는 공부하고 익혀야 한다. 

지금 우리는 제도적 시스템과 상품 서비스 사이에 있다. 제도는 국가, 정치, 민주주의 이런 식으로 작동한다. 그런데 이 제도의 원리가 상품 서비스로 가면 하나도 작동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민주 시민도 상품 서비스라는 면에서는 완전 노예가 되어 있고, 노예가 되는 걸 받아들인다. 왜 우리는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나? 자신의 삶이 고귀해지기 위해서이다. 그건 권력이 주는 공포에서 벗어나는 거다. 거기에는 자유가 없으니까. 그런데 우리는 아이러니하게도 쾌락에 중독되어 있다. 지금 우리를 노예처럼 부리는 건 우리의 제어되지 않은 욕망이 원인이다. 쾌락이 그렇게 만드는 거다. 쾌락에 중독되고 마비되는 것에는 무방비 상태이다. 

이렇게 상품에 노예가 되어 있고, 쾌락에 중독이 되어 있으면서,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도 마찬가지이다. 예컨대 만나는 사람을 상품으로 취급하고 소유하려 한다. 더 나아가, 우리가 하는 일에 대한 태도, 생로병사, 노후 이런 모든 문제도 이런 식으로 소유가 작동한다. 소유는 지배와 서열을 만들어 낸다. 소유욕이 없다면 쾌락이 가능하지 않다. 그리고 모든 소유는 궁극적으로 폭력을 지향하게 되어 있다. 내가 무언가를 소유하겠다는 것은 그것이 갖고 있는 생명력을 완전히 말살하거나 제압할 때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걸 알면서도 우리는 상품과 서비스를 향한 욕망에 대해서 아무런 저항하지 않는 것이 아이러니이다. 우리가 누리는 많은 문화가 다 소유와 폭력 안에 있다. 

어쨌든 우리는 상품과 서비스에 중독이 되고, 제도 앞에서는 무력해지는 신체성을 지니고 있다. 이 일상의 현장이 뚫고 나가야 되는 늪이다. 일자리 문제도 사람들이 자기 소유를 포기하지 않는 한 일자리가 늘어나지 않는다. 빈부 격차의 불평등 문제도 돈이나 경제적인 부의 증식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최문갑 기자
mgc1@kukinews.com
최문갑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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