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대표 다큐’가 던진 질문, 이젠 응답할 때” [쿠키인터뷰①]

“‘국가대표 다큐’가 던진 질문, 이젠 응답할 때” [쿠키인터뷰①]

기사승인 2021-08-23 07:00:12
KBS1 ‘다큐 인사이트’ 예고 화면.   KBS 제공.
[쿠키뉴스] 이은호 기자 =언니는 어려서부터 운동신경이 뛰어났고 그 자신도 운동을 좋아했다. 교내 대표로 이런 저런 대회에 자주 나갔고, 공놀이를 좋아해 집에는 축구공이며 농구공이 굴러다니곤 했다. 일곱 살 때, 언니가 친구와 농구하는 모습을 구경하다가 떨어지는 공에 맞아 코피를 쏟은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얼마 전 SBS ‘골 때리는 그녀들’을 보며 ‘여자아이들에게도 축구를 시켜야 한다’던 신봉선의 말을 곱씹고 있는데, 언니가 말했다. “나 축구하다 ‘미친년’ 소리 들었잖아. 초등학생 때, 6학년 오빠한테.” 언니만 그랬던 게 아니었다. ‘여자는 원래’라는 말과 함께 스포츠에서 배제됐던 여성들은 온라인에 모여 자신이 겪은 차별 경험을 성토했다.

왜 여자선수 경기는 주목받지 못할까, 왜 여자선수는 더 높은 상금이나 연봉을 받지 못할까, 왜 여자선수는 남자선수처럼 은퇴 후에 지도자가 되지 못할까, 왜 여자선수는 남자선수들과 달리 외모품평을 당할까, 왜 여자선수는, 왜 여자는…. 지난 12일 방송한 ‘다큐인사이트’ 국가대표 편에서 박세리·남현희·김연경·김온아·지소연·정유인 등 전·현직 국가대표 선수들이 던진 질문을 따라가다 보면, 자꾸만 그 ‘여자는 원래’라는 말을 마주하게 됐다. 여자는 원래 스포츠의 주인공이 아니니까, 여자는 원래 스포츠를 못하니까, 여자는 원래 스포츠에 관심 없으니까, 여자 스포츠는 원래 돈이 안 되니까….

국가대표 편을 만든 이은규 PD는 프로그램을 제작하면서 “원래 당연한 것은 없다”는 깨달음에 도달했다고 한다. 지난 16일 KBS 신관에서 만난 그는 “우리는 아주 기초적인 질문을 하려고 한 것”이라며 “그 질문이 후대에까지 이어지지 않길 바라는 마음”이라고 했다. 2014년 KBS에 입사해 ‘역사저널 그날’, ‘추적 60분’ 등을 거쳐 온 그는 ‘다큐인사이트’ 개그우먼 편과 윤여정 편 등 여성 아카이브 시리즈를 제작해 주목 받았다. 아래는 그와 나눈 일문일답이다.

Q. 방송 이후 어떤 시간을 보내고 있나요.

“시청자 여러분이 남겨주신 글들을 읽곤 했어요. 많이 남겨주셨더라고요.”

Q. 시청자 게시판에만 1200개 넘는 글이 올라왔죠. 뜨거운 반응 속에서 어떤 마음이나 열망이 읽혔으리라 생각됩니다.

“저는 저희 방송이 기초적인 질문을 했다고 생각해요. 선수들이 제시한 질문 이상으로 뭔가를 선언하거나 정답을 내려고 하지는 않았거든요. 이제 우리가 그 이야기를 듣고 반응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 그리고 선수들을 향한 애정과 그들이 보낸 시간에 대한 존경심이 지금 같은 반응으로 이어진 것 같습니다.”

Q. 다큐멘터리 국가대표의 시작이 궁금합니다.

“지난해 6월, 여성 희극인에 관한 아카이브X인터뷰 형식의 다큐멘터리 기획을 사내 공모전에 제출했어요. 좌충우돌 끝에 만들었는데 반응이 좋았고, 다른 직군도 방송해달라는 요구가 있어서 세 편 더 만들어보기로 했습니다. 올해 초 제작팀이 다시 만나 기획을 구체화하는 중 ‘여름에 올림픽이 열리니 운동선수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자’고 뜻이 모였어요.”

‘다큐 인사이트’ 개그우먼편 캡처.
Q. 흔히 국가대표 다큐멘터리라고 하면 인간 승리 서사를 떠올리기 마련인데, 이번 방송은 그런 예상을 기분 좋게 벗어났습니다.

“저희끼린 당연히 이 이슈를 다룰 거라고 생각했어요. 스포츠 역사에서 여성이 어떻게 지워졌는지, 또 그것을 각 개인이 얼마나 초인적인 힘으로 뚫고 왔는지에 관한 이야기는 사실 오랜 시간 반복되어 왔거든요.”

Q. 방송을 보며 E채널 ‘노는 언니’에서 나온 이야기들도 생각났어요.

“‘노는 언니’ 팀이 워낙 신호탄을 잘 쏘아 올려주셨어요. 박세리 감독이 왜 여자 선수는 미디어에 노출되지 않느냐고 묻기 전까지는, 저 역시 그런 사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죠. 여자 선수들은 현역 때도 은퇴 후에도 미디어 노출이 적고 그게 여러 차별로 이어지지 않았나 싶습니다.”

Q. 여성 창작자들이 많이 참여했다고요.

“이은비 촬영감독님, 후반작업을 해주신 배수연 감독님, 이미성 음악감독님, 2D그래픽을 디자인해주신 이현정 감독님, 김선하·허여진 작가님 등이 계세요. 워낙 실력이 뛰어나셔서 1순위로 섭외하고 싶었던 분들이에요. 개그우먼 편부터 시리즈를 함께 해왔고, KBS1 ‘추적 60분’ 때부터 호흡을 맞춘 분들도 많습니다. 모두 자기 일처럼 공감하고 고민하며 힘을 보태주셨는데, 각자의 삶에서 여성으로서 느낀 뭔가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Q. 문제점을 선명하게 짚어주신 박주미 기자의 말씀도 인상적이었습니다.

“2007년 KBS에 입사해 김연경 선수, 지소연 선수 등의 경기를 취재하신 분이에요. 흔히 전문가라고 하면 중년 남성을 떠올리기 마련이고 그들을 섭외하는 게 방송계 관행이기도 해요. 하지만 이번 다큐만큼은 여성 전문가가 동료로서 목소리를 더해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Q. 2016년 리우올림픽 당시 스포츠국에서 일한 경험이 이번 다큐 제작에도 영향을 준 걸로 압니다.

“여자선수들이 땀 흘리고 소리 지르며 경기하는 모습이 정말 멋있었어요. 선수들 모습만 모아서 방송해도 재밌겠다고 생각했을 정도로요. 여자선수들의 활약상을 모아 보여준 이번 방송 오프닝이 그때 하고 싶었던 연출이에요.”

전신을 가리는 경기복을 입고 2020 도쿄올림픽에 참여한 독일 여자 기계체조 대표팀.    ‘다큐 인사이트’ 방송화면.
Q. 선수 인터뷰 외에 다방면으로 자료를 조사하신 것 같습니다.

“1988년 서울올림픽 이후 운동선수를 다룬 다큐가 많이 제작됐어요. 남자 선수와 여자 선수가 어떻게 다르게 그려졌는지, 그 자료들에서 극명하게 드러나요. 남자선수는 호랑이처럼 웃통을 벗고 달리는 장면이 많은 반면, 여자선수는 하이틴 장르처럼 화기애애한 모습이 주가 됩니다. 손뜨개질하는 장면도 많고요.”

Q. 해외에서는 스포츠계 성차별에 어떻게 대응하는지도 들여다보셨다고요.

“지소연 선수를 인터뷰하며 영국이 빠르게 변한다는 사실을 알았어요. 영국 공영방송인 BBC 스포츠가 그런 변화를 주도하고 있고요. BBC스포츠는 2014년부터 전 세계 종목별 상금 격차를 비교해 발표하고 있는데요(BBCsports study - prize money in sports), 2021년 기준 48개 종목 중 3개 종목(축구·골프·농구)만이 주요 챔피언십 등에서 남녀 선수에게 다른 상금을 제공했어요. 그 후엔 이런 질문이 따르죠. 일부 종목은 왜 여전히 상금에 차이가 있을까? 상업적 요인 때문이구나. 그러면 상업성 차이는 무엇 때문이지? 미디어 노출 때문이구나. 그러면 (여자선수 경기를) 미디어에 더 노출시키자.”

Q. 결국 스포츠에서 여성을 배제하는 가시적·비가시적 억압이 오랜 시간 작동한 결과 중 하나라고 봅니다. 이렇게 복잡하고 긴 이야기를 주어진 러닝타임에 압축해 전달하는 게 쉽지 않았으리라고 짐작되는데요.

“마감의 힘 아니었을까요.(웃음) 올림픽 도중 발생한 이슈가 많아서 뒷부분이 초기 편집과 많이 달라졌어요. 시의성을 반영하려 했거든요. 그리고 저희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이야기를 한 게 아니잖아요. 기존에 진행된 담론이 있었기 때문에 제작진이 A를 말하면 보는 사람들이 B, C, D를 이어 말할 수 있었다고 봐요.”

Q. 국가대표 다큐멘터리에서 제작진이 던지고 싶은 궁극의 질문은 무엇이었나요.

“두 가지를 전달하고 싶었어요. 하나는 업계에서 10년, 20년 동안 성과를 만드신 분들이 가진 생각을 잘 전달하고 싶었어요. 그들이 품은 의문이 후대에까지 이어지지 않길 바랐고요. 또 다른 하나는… 요즘 여성들이 고립돼 있다고 느끼는 일들이 많잖아요. ‘나만 힘들고 예민하고 불편한 게 아니구나. 구조의 문제구나’라는 사실에 공감하고 서로 기운을 나눌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다음 기사: 이은규 PD “과소평가된 목소리에 힘을 실어주고 싶다” [쿠키인터뷰②]

wild37@kukinews.com
이은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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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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