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뉴스] 이준범 기자 = 소소하게 시작해서 밋밋하게 끝난다. 마블 새 캐릭터 샹치를 관객들에게 소개하는 사용설명서 같은 영화다. 부모님을 둘러싼 전설 같은 이야기부터 아버지로부터 도망친 사연, 함께하는 동료들과 스스로의 정체성까지. 앞으로 펼쳐질 마블 네 번째 페이즈에서 샹치가 어떤 캐릭터로 활약할지 그려볼 수 있다. 뻔한 이야기를 흥미롭게 전개하는 마블의 솜씨가 여전히 놀랍다. 첫 아시아인 캐릭터를 소개하는 태도는 어딘지 아쉽다.
영화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감독 데스틴 크리튼)은 어둠의 세상을 지배해 온 웬우(양조위)와 평범한 삶을 선택한 그의 아들 샹치(시무 리우)의 갈등을 그린 작품이다. 샹치는 아버지로부터 벗어나 미국에서 친구 케이티(아콰피나)와 함께 호텔 주차요원으로 평범한 일상을 보내고 있다. 출근길 괴한의 습격을 받은 샹치는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펜던트를 빼앗긴다. 같은 펜던트를 갖고 있는 동생 샤링(장멍)이 위험할 것을 예상해 케이티와 함께 마카오로 향한다.
우리에게 익숙한 마블 캐릭터 무비와 결이 다르다. 그동안 캡틴 아메리카, 아이언맨, 스파이더맨 등을 다룬 첫 번째 영화가 평범한 인간에서 특수한 능력을 갖게 된 과정을 보여준 것과 달리, 샹치는 이미 뛰어난 무술 실력의 소유자로 등장한다. 이웃과 가족을 안전하게 지키고 사악한 빌런과 대결하는 구도도 아니다. 세상 사람들이 모르는 전설 속 공간으로 들어가는 것 역시 낯설다. 다만 주인공과 그의 가족이 이야기 중심에 있고, 히어로를 신화화하는 대신 우리처럼 땅에 발붙인 인물로 그리는 점은 마블 페이즈4의 첫 영화인 ‘블랙 위도우’와 비슷하다.
배우 시무 리우가 연기한 주인공 샹치가 특별한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하는 건 커다란 약점이다. 그의 성장과 정체성 확립보다 그를 장악하고 있는 아버지 웬우의 캐릭터와 야망이 더 잘 그려졌다. 샹치는 모든 장면과 상황마다 중심에 서 있지만, 그만의 독자적인 고민에 빠지거나 의외의 결정을 내리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다. 압도적인 무술 실력으로 쾌감을 주는 것도 아니고, 주변 인물을 휘어잡는 카리스마를 갖고 있지도 않다. 특별한 가정환경과 혹독하게 수련한 어린 시절만이 그를 설명하는 중요한 키워드다.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은 샹치의 캐릭터 설명서보다 그의 배경 설명서라고 보는 게 더 정확하다. 영화를 보고 제목을 다시 읽으면 ‘샹치’보다 ‘텐 링즈의 전설’에 무게감이 더 실린 듯 보인다.
백인으로 가득했던 마블 히어로에 흑인인 블랙 팬서가 합류한 것처럼, 아시아인 히어로가 첫 등장한 건 의미가 있다. 배우들은 물론, 일본계 미국인인 데스틴 크리튼 감독 등 주요 제작진이 아시아계로 채워졌다. 아쉬움도 있다. ‘샹치’가 1960~70년대 중국 무협 영화와 이소룡에게 영향을 받아 탄생한 캐릭터라 그런지, 새로운 느낌이 들지 않는다. 기본적으로 등장인물 모두 무술에 재능이 뛰어나고, 동양을 신비로운 전설이 숨겨진 공간으로 보는 등 아시아인을 백인 시선으로 대상화하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 주요 장면에서 흑인 문화를 상징하는 힙합 음악이 들려올 때마다 자꾸 ‘블랙 팬서’가 떠올라 몰입을 방해한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배우 양조위와 양자경 캐스팅은 영화의 완성도를 한 차원 높였다. 양조위가 미국 마블 영화, 그것도 빌런으로 활약하는 모습이 처음엔 어색하지만, 뛰어난 연기력과 존재감으로 마치 그가 주인공인 것처럼 느끼게 한다. 등장하는 순간부터 대단한 몰입감을 선사하는 전설의 마을 탈루는 영화의 또 다른 주인공이다. 쿠키 영상이 2개다.
1일 개봉. 12세 이상 관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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