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 리더십' 박용만 회장이 남긴 것

'소통 리더십' 박용만 회장이 남긴 것

80년 이어온 형제경영 끝내고 4세 경영 열어
소비재에서 중후장재형 그룹으로 변화 주도
세계 최초 민간 주도 '규제샌드 박스 지원 센터' 출범

기사승인 2021-11-10 15:33:44
박용만 회장.  연합뉴스


80년 넘게 이어온 형제경영을 끝내고 두산의 4세 경영시대를 연 박용만 회장이 두산그룹에서 완전히 떠난다. 1982년 두산에 첫발을 디딘 지 40년 만이다. 

박 회장은 그룹의 핵심 부서인 두산 전략기획본부장을 맡으면서 오비맥주 매각과 한국중공업·고려산업개발·대우종합기계 인수 등을 통해 소비재 위주의 그룹을 중후 장대형 그룹으로 변신을 이끌었다. 

사실 두산이 소비재위주에서 중후 장대형으로 변신한 결정적 계기는 '페놀사태'로 재계는 꼽는다. 두산에게는 위기였지만 빠른 사업재편과 전략적 인수합병 등 과감한 결단으로 전화위복할 수 있었다. 그 중심에 박 회장의 역할이 절대적이었다는게 재계의 평가다.

100년 기업 두산의 초석인 '박승직상점' 이후 사업구조는 크게 바뀌었지만 이를 잇게 한 것은 사람이었다. 두산은 이를 '사람이 미래다'로 표현하고 있는데, 박 회장의 경영 스타일에서 잘 나타난다. 그는 인재 영입을 위해선 해외 출장도 마다하지 않았고, 직접 대학 채용설명회에 참석해 인재 유치에 적극적이었다고 한다. 

소통의 리더십은 박 회장을 표현하는 또 다른 이름이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마니아로 잘 알려진 박 회장은 젊은 세대들이 인터넷상에서 사용하는 용어를 사용하며 젊은 세대들과 양방향 소통했다.  

2013년 대한상공회의소(대한상의) 회장에 오른 박 회장은 국정농단 사태로 유명무실해진 전국경제인연합회를 대신해 경제계와 정치권의 가교 역할을 해내며 대한상의를 명실상부 경제 1단체로 이끈 주역으로 평가받는다.

박 회장은 대한상의 회장 취임 직후부터 소통의 리더십답게 정재계 소통을 위한 광폭행보를 이어간 것으로 유명하다. 취임 후 1년간 해외 출장만 50회였다. 비행거리로 28만km에 달할 정도였다. 국회 방문 횟수도 50차례에 달한다.

박 회장은 최태원 SK회장에 상의 회장직을 물려줄 때까지도 젊은 기업인들에게 남다른 애정을 쏟았다. 그는 규제 앞에서 좌절하는 젊은 기업인을 위해 스스로 규제 해결사를 자처하며 20대 국회를 16번이나 찾았다. 하지만 구체적 성과는 내지 못했다. 박 회장은 기자간담회를 통해 "동물국회 식물국회로 불리는 20대 국회와 같은 국회가 다시는 반복되지 않아 경제 입법을 가로막지 않기 바란다"며 작심 발언을 쏟아내기도 했다. 

박 회장이 규제 해결사를 자처한 것은 낡은 규제로 좌절하는 젊은 기업가가 없도록 하기 위해서다. 그렇게 생겨난 것이 규제샌드박스 지원센터다. 세계 최초다. 그래서 박 회장은 상의 재임 기간 가장 잘한 일이 규제샌드박스라고 할 정도로 남다른 애정을 보였다.

지원센터 출범식 때 박 회장은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혁신을 도모하는 젊은이들이 늘고 있지만, 규제로 인해 시도조차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며 "입법 지연이나 소극 행정으로 사업을 추진하지 못하는 이들이 마지막으로 찾는 최후의 보루가 바로 샌드박스"라고 했다. 

박 회장은 상업자본을 산업자본으로 탈바꿈시킨 고 박두병 두산그룹 초대 회장의 5남이다. 그는 경기고와 서울대, 보스턴 대학교 MBA를 졸업했다. 1982년 두산건설에 입사 후 두산음료, 동양맥주, 두산건설을 거쳐 90년대부터 임원에 올랐다. 

OB맥주 부사장, 두산 중공업 부회장, 두산인프라코어 회장 등을 거쳐 2012년 두산 그룹 회장에 오른 박 회장은 4년만인 2016년 큰형인 박용곤 명예회장의 장남 박정원 회장에게 그룹 회장 자리를 물려줬다.

윤은식 기자 eunsik80@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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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unsik80@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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