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장과 화해하는 법, 연극 ‘지장이 있다’ [쿠키인터뷰]

지장과 화해하는 법, 연극 ‘지장이 있다’ [쿠키인터뷰]

기사승인 2021-12-20 07:00:06
연극 ‘지장이 있다’ 공연 장면.   박태양 작가 제공.

10대 소녀 마진(정인지)은 초등학생 때부터 친구인 연이(김수정)를 좋아한다. 연이는 예쁘고 노래도 잘해서 주변에 따르는 사람이 많다. 마진은 그중에서도 자신이 연이와 제일 친하다는 자부심이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연이가 사라진다. 설상가상, 연이의 새로운 친구 해일(이하영)이 나타나 마진에게 통보하듯 말한다. “연이가 너랑 멀어지고 싶대.” 평화롭던 마진의 일상에 그날부터 지장이 생긴다.

지난 16일부터 서울 대학로 미마지 아트센터 눈빛극장에서 공연 중인 연극 ‘지장이 있다’는 삶에 지장이 생긴 마진과 그의 친구 연이, 해일의 이야기를 다룬다. 마진은 자신을 따라다니는 지장(박수진)에게 툭하면 꺼지라고 윽박지르지만, 지장에게도 사연은 있다. 인간으로 태어나 불운으로 점철된 생을 살았는데, 죽고 나니 지장으로 환생해 숙주에게 골칫거리만 안긴다. 지장은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는 자신이 싫다. 흔적 없이 사라지는 것. 지장의 오랜 소원이다.

극본을 쓴 허선혜 작가는 제주 무속 신화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지장을 탄생시켰다. 신화에서 지장은 자신 때문에 가족 모두가 죽어 나가는 비운을 타고 났다. 죽은 뒤에는 지장새로 환생해 만나는 사람마다 부정을 태운다. 지금도 제주굿에선 지장새를 내쫓는 의식이 행해진다고 한다. “우리가 삶에서 지장을 바라보는 모습도 그와 비슷하다고 생각했어요. 어떻게든 지장을 감추려고, 극복하려고 하잖아요. 하지만 지장을 명확하게 바라보지 않으면 그와 헤어질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지장과 주인공이 친해지는 과정을 보여주려 했죠.” 최근 대학로 한 사무실에서 만난 허 작가는 이렇게 말했다.

‘지장이 있다’ 공연 장면.   박태양 작가 제공.

허 작가는 “지장을 따라가 보면 그 끝에는 어린 시절 겪은, 해결되지 않은 아픔이 있다”고 봤다. 주요 인물을 청소년으로 설정한 것도 그 때문이다. 허 작가와 한아름 연출가 등 제작진과 출연 배우들은 작품을 위해 지난 5월, 13~15세 청소년들을 만났다. “제작진·배우들이 청소년들과 1대1로 짝을 지어 함께 시간을 보내고, 각자 비밀을 털어놓기도 했어요.”(한아름) 한 연출가가 이 워크샵에 붙인 이름은 ‘내가 나인 게 싫은 날’. 그룹 방탄소년단 노래 가사에서 따왔다. 그는 “청소년들로부터 텍스트를 뽑아내기보다는 그들과 함께 질문을 던지려고 했다. 어른이라는 이유로 우위에 서서 그들을 관찰하려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고 설명했다.

배우들은 워크샵을 거치면서 각자 맡은 인물들을 구체화하고 입체성을 부여했다. 남모를 아픔을 가진 연이 역의 배우 김수정은 “나의 청소년기를 떠올리며 대본을 읽었다. 그땐 마냥 슬프기만 했다. 그런데 소극적인 듯 해도 솔직한 청소년 짝지를 보며 연이를 표현할 힌트를 얻었다”고 돌아봤다. 마진을 연기한 배우 정인지는 “상상에만 의존했다면 지금의 눈으로만 인물을 봤을 텐데, 워크샵에서 청소년들을 만난 덕에 각 인물을 더욱 또렷하게 알 수 있었다”면서 “먼 존재라고만 여겼던 청소년들에게서 예전의 나를 보는 듯한 기분도 들었다”고 했다.

‘지장이 있다’ 공연 장면.   박태양 작가 제공.

저마다의 지장 때문에 모나고 상처 입은 사람들을 내세우면서도 작품은 유쾌한 분위기를 잃지 않는다. “감정에 너무 푹 적시면 오히려 거부감이 들 수 있고, (관객과 작품이) 연결되지 않을 수 있다”(허선혜)는 판단에 제작진이 의도한 연출이다. 그 덕분일까. 이미 청소년기를 지나 보낸 20·30대 관객들도 작품을 보며 자신 안의 지장을 마주하고 치유 받는 경험을 한다. 공연을 본 관객들 사이에선 “연이의 대사가 내게 하는 말 같아 찔렸다” “분위기를 망치지 않으려고 상대에게만 맞추던 내 모습을 마진이에게서 봤다”는 반응이 줄을 잇는다.

작품에서 마진·연이·해일은 물론, 마진을 지켜보는 달과 지장까지 모든 인물이 성장하고 서로 가까워진다. 마진을 지키고 싶어 지장을 없애려던 달은 마침내 지장과 화해하고, 영원한 소멸을 꿈꾸던 지장은 “다시 태어나도 괜찮다”고 말한다. 달이 지장에게 웃으며 손을 흔드는 마지막 장면은 ‘지장이 있다’의 백미다. 달 역할을 맡은 배우 이예지가 연습 중 즉석에서 선보인 연기를 한 연출가가 포착해 공연에도 녹였다고 한다. 자신에게 지장이 없음을 증명하려 애쓰던 마진은 마침내 지장을 받아들이는 방법을 깨닫는다. 정인지는 “마진이는 언제든 친구들과 싸우고 오해를 쌓을 수 있다. 하지만 중요한 건 언제든 다시 화해할 수 있다는 것”이라며 “그게 지장이 있어도 괜찮은 삶”이라고 짚었다.

허 작가는 이 작품이 ‘그래도 괜찮다’는 메시지를 주길 소망한다. “‘지장이 있다’ 속 인물들은 저마다 지장을 가졌어요. 그걸 숨기려는 마음과 소중한 이에게 털어놓고 싶은 마음, 상대가 먼저 알아주길 바라는 마음이 뒤엉켜서 혼란스러워하죠. 이들처럼 지장과 함께하는 모든 분들에게 이 이야기가 가닿길 바라요.” 한 연출가도 비슷하다. 한 때 ‘지장은 없어야 한다’고 믿으며 자신 안의 결핍을 외면했다는 그는 “‘지장이 있다’가 ‘내게도 지장이 있나’를 돌아보고 인식하게 만드는 작품으로 남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공연은 오는 22일까지 이어진다.

이은호 기자 wild37@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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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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