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 선예는 그룹 원더걸스 멤버로 바쁘게 활동하던 2013년 결혼한 뒤 아이를 낳으면서 가요계에서 홀연히 사라졌다. 데뷔 초부터 ‘춤 전설’로 불렸고, 그룹 애프터스쿨을 떠난 뒤엔 뮤지컬 배우로도 활동한 가희도 출산 이후 무대 위에서 자취를 감췄다. 그룹 쥬얼리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박정아, 노래 ‘12월 32일’ ‘안부’ 등을 연이어 흥행시켰던 별 역시 사정은 비슷했다. 결혼과 출산은 가사노동과 육아로, 끝내는 경력단절로 이어졌다. 결혼 후에도 본업을 이어간 남편들과 달리, 아내이자 엄마인 이들은 이런 희생을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했다.
지난 4일 종영한 tvN ‘엄마는 아이돌’은 출산 이후 활동을 멈췄던 가수들이 아이돌 그룹으로 데뷔하는 과정을 보여줬다. 각각 캐나다와 인도네시아에서 육아 중이던 선예와 가희를 비롯해 별, 박정아, 현쥬니, 양은지가 그룹 마마돌로 뭉쳤다. “설거지를 끝내고 창밖을 보면서 ‘나는 지금 뭐하고 있지? 무대 위에서 즐기던 때가 있었는데’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었어요.”(박정아), “애 엄마인데, 누가 나를 가수로 불러주겠어”(양은지) 경력 중단으로 인한 허무함, 자신의 가능성을 의심하는 마음에 괴로워하던 이들은 “아직 피가 끓는다”(가희)며 스스로를 다시 일으켰다. 방송은 3% 안팎의 시청률을 기록하며 호평 속에 막을 내렸다.
“시청자들이 응원해주지 않았다면 프로젝트를 완주하기 어려웠을 거예요.” ‘엄마는 아이돌’을 연출한 민철기 PD는 8일 쿠키뉴스와의 통화에서 이렇게 말했다. “몇몇은 10년 넘게 무대를 떠나 있었잖아요. 출산과 육아를 거치며 체력도 많이 떨어졌을 거고요. 3개월 만에 데뷔한다는 게 쉽지 않았을 텐데 결국 해냈어요. 멤버들 모두 중간 중간 위기를 겪었지만 시청자들 응원 덕에 힘을 낼 수 있었어요.” 특히 30·40대 여성들 반응이 뜨거웠다. 육아를 여성 몫으로 규정하는 사회 분위기 탓에 과도한 책임감과 죄책감에 짓눌려온 엄마들이 격렬히 호응한 덕분이다. 민 PD는 “전업주부인 엄마들뿐 아니라 워킹맘들도 많이 공감해주셨다”고 말했다.
‘전에 없던 걸그룹 프로젝트를 해보자’는 각오로 시작한 프로그램이었지만, 섭외부터 난항이었다. 평균 9년8개월에 가까운 공백과 출산으로 인한 신체 변화, 과거의 명성 등 넘어야 할 산이 많았다. “과거에 쌓은 커리어에 오점을 남기는 것 아닐까” 하는 걱정도 컸다. 제작진에게 용기를 준 인물은 가희다. 민 PD는 “가희와 통화하는데, 수화기 너머로 무대를 향한 그의 열정이 느껴졌다”고 돌아봤다. 처음엔 출연을 망설였다는 선예도 이후 마음을 바꿔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이렇게 모인 여섯 멤버들의 경력 단절 기간은 총 2만1089일. 민 PD는 가수 겸 보컬디렉터 박선주, 안무가 배윤정, 프로듀서 김도훈 등 가요계 거물들을 불러 모아 마마돌 제작에 불을 붙였다.
‘엄마는 아이돌’은 매 회 각본 없는 드라마였다. 밴드 벨라마피아에서 보컬로 활동했지만 성대 결절로 자신감을 잃은 현쥬니는 박선주와 훈련하며 두려움을 극복했다. 춤으로는 정평이 나 있었지만 노래할 땐 늘 위축돼 있었다는 가희는 자신의 가능성을 확인하고 감격에 젖었다. 양은지는 이 프로그램에서 가장 많이 성장한 주인공이다. 그는 제대로 된 레슨도 받지 못한 채 2007년 그룹 베이비복스리브로 데뷔했다가 1년 만에 탈퇴했다. 활동 기간이 짧았던 탓에 늘 팀에 폐를 끼칠까 걱정하고 미안해하던 그는 뼈를 깎는 노력과 멤버들의 도움으로 무사히 데뷔 무대에 올랐다. 멤버들의 이런 면면은 제작진을 더욱 진지하게 만들었다. ‘진심을 전하자’는 각오가 말없이도 퍼졌다.
“출연자들을 ‘추억 속 가수’로만 조명하고 싶진 않았어요. 그랬다면 위로를 줄 수는 있었겠지만, 용기를 전하진 못할 거라고 봤거든요. 1, 2회 현실 점검 미션이 가혹하다는 분들도 계셨어요. 하지만 현실은 어떤가요. 경력이 단절됐던 여성을 배려하거나 그들의 상황을 감안해주지 않잖아요. 현실 속 규칙을 프로그램에도 적용하려고 했어요. 게다가 ‘애 엄마니까’ ‘공백이 기니까’라고 핸디캡을 줬다면, 출연자들의 노력이 제대로 가닿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해요. 대신 이 분들의 진심을 고스란히 전달하려고 애썼어요. 어렵게 출연을 결심한 이들에게 누가 되지 않도록요.”
마마돌은 Mnet ‘엠카운트다운’에서 펼친 데뷔곡 ‘우아힙’ 무대를 끝으로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다. 다만 이들이 전한 용기는 오래도록 남는다. 선예를 위해 ‘엄마는 아이돌’을 찾은 박진영은 “이 프로그램을 보는 수많은 엄마들, 혹은 자기 삶은 여기까지인가 체념하신 많은 분들에게 다시 한 번 용기를 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민 PD 역시 이 프로그램이 “용기와 위로, 힘을 주길 바란다”고 했다. “예능은 시청자들에게 휴식이자 재충전하는 시간을 준다고 믿어요. ‘엄마는 아이돌’이 시청자들에게 공감을 얻고 용기 낼 계기를 마련해줬다면, 그것만으로도 의미 있는 프로그램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은호 기자 wild37@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