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백 풍경 속에는 그리움과 향수가 가득 배어 있다. 쿠키뉴스는 오래 전 시간이 멈춘 듯 한 정겨운 고향 마을과 도시 개발로 얼마 남지 않은 골목풍경, 근대문화유산, 전통의 맥을 잇는 사람들을 찾아 ‘레트로 감성 여행’을 떠난다.
‘살아있는 근현대사 박물관’ 서천 판교마을
시계바늘을 한참이나 뒤로 돌린 듯 1930~70년대 소도시 풍경을 간직한 곳이 있다. 충남 서천군 판교면 현암리에 위치한 ‘서천 판교 근대역사문화공간’은 1930년 충남선 판교역 철도 개통과 함께 근대기 서천지역 활성화 중심지였다. 1960~70년대 한국 산업화 시기의 번성기를 맞이하였지만 아쉽게도 80년대 중반 가축시장 폐쇄와 2008년 철도역 이전으로 본격적인 쇠퇴 과정을 맞는다. 판교마을은 굴곡진 근‧현대기 마을의 역사 흐름과 흔적들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역사문화공간이다.
- 오래된 간판 글씨체 ‘글꼴 박물관’
- 극장, 방앗간, 주조장, 이발소, 중국집 옛 모습 그대로
- 도로 뚫리고, 역사 옮겨가며 쇠락
- 문화재청, 마을 통째로 등록문화재 지정
- ‘문화재생사업’ 선정돼 리모델링 추진
“6~70년대 초 까지만 해도 이 마을에는 의원, 시계포, 전파상뿐 아니라 사진관도 두 곳이 있었고 예식장도 있었지”라며 “장날에는 온 동네가 잔칫집처럼 북적였어… 5~60년대 부여 사람들도 여기 와야 기차도 구경하고 짜장면도 맛 볼 수 있었어” 충남 서천군 판교마을에서 50년 넘게 이발소를 운영 중인 정재희(83)씨는 손때 묻은 이발도구를 정리하며 말을 이어간다.
“우리 이발소도 명절을 앞두고는 문전성시를 이뤘어. 그때는 직원을 4명이나 두고 일했는데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쉬지 않고 이발을 해도 3~4시간 기다리는 것은 예사였어”라며 이 마을의 번성기 이야기를 부탁하자 “장날이면 술 먹고 길에서 자는 사람들이 많았어. 그 때는 야간통금이 있었는데 파출소 순경들이 손수레에 이 사람들을 싣고 가서 밤새 유치해 놓으면 새벽에 술이 깨서 싹싹 빌고 훈방으로 나오고 그랬어. 적절한 비유는 아니지만 그 정도로 경기가 좋았지” 노 이발사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간다.
눈 깜박이면 어느새 시간은 오늘을 뒤로하고 내일을 준비한다. 나이가 들수록 시계바늘은 인정사정없이 돌아간다. 야속한 세상에 그래도 옛 정취를 보듬으며 곳곳에 남아있는 ‘레트로 마을’들은 마음의 위로를 준다. 그 시간이 멈춘 마을 중에서도 반세기 이상 겹겹이 쌓인 세월의 흔적을 풍경처럼 펼쳐놓은 추억의 종합선물세트 같은 곳이 서천군 판교면에 숨어있는 현암리 ‘판교마을’이다.
우리 근현대 역사를 잘 간직한 이 마을은 언뜻 보면 마을 전체가 낡고 퇴색한 느낌이지만 예스러운 간판의 식당이나 이발소의 문을 열면 아직도 백발의 어르신들이 당당하게 현업에 종사하고 있다. 살아있는 근현대사 박물관 같은 곳이 판교마을이다.
1900년대 중후반 어디쯤에서인가 멈춘 판교마을을 더욱 예스럽게 보이게 하는 것은 낡은 간판, 혹은 켜켜이 먼지 쌓인 유리창에 붙어있는 옛 글씨체들이다. 지금은 문을 닫은 곳이 많지만 이 글씨체들이 이곳이 정미소, 사진관, 싸전, 극장, 술 만드는 곳이었음을 알려준다.
마을 중간 중간에 전혀 손을 대지 않아 당장이라도 무너질 듯한 건물, 유리창에 억지로 붙어 곧 떨어질 것 같은 촌스러운 옛 폰트, 언제 폐업을 했는지 상가 출입문의 녹슨 자물통과 빛바랜 간판, 유모차를 지팡이 삼아 걸음을 옮기는 등굽은 촌로의 뒷모습이 판교마을의 오늘 풍경이다.
하지만 이것이 판교마을의 본 모습은 아니다.
오늘 날 성남의 판교처럼 예전, 서천의 판교는 인근 도읍에서는 가장 잘나가는 계획도시였다. 지난 1930년 조용하던 마을에 장항선 판교역이 들어서면서 인근에 있던 면사무소·우체국·경찰서 등 관공서가 모두 판교면 현암리로 옮겨왔다. 판교마을은 자연스럽게 역 주변으로 상권이 형성되고 ‘초역세권’ 입지를 구축하면서 인근 중소 읍의 중심지로 떠올랐다. 또한 충남에서 손꼽는 우시장이 열리면서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마을 인구도 8000명을 넘었다.
하지만 판교마을의 호시절은 반세기만에 끝이 났다. 1970년 후반까지 번성하던 역전 마을은 멀리 4차선 도로가 뚫리고 2008년 장항선 직선화 사업으로 판교역마저 다른 곳으로 옮아가면서 급격히 쇠락하기 시작했다. 마을 일대는 철도시설공단 부지로 묶이며 건축 제한에 걸려 개발이 어려워졌고, 1980년대에는 우시장마저 사라졌다. 급변하는 세상의 시간을 못 맞추고 느리게 돌던 시계바늘은 어느 순간 완전히 멈춰서고 말았다. 판교면 전체 주민 수는 현재 2,000여명으로 줄어들었고 썰물처럼 상인과 젊은이들이 빠져나간 마을은 전성기의 흔적만 그대로 남겨둔 체 고향마을을 지키는 어르신들이 옛 영화를 되새김하고 있다.
그나마 레트로 마을로 소문이 나면서 카메라를 멘 젊은이들과 옛 모습을 반추하고 싶은 중장년의 방문이 조금씩 마을의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판교마을 여행의 시작은 옛 판교역에서 시작된다.
판교역은 일제강점기인 1930년 11월 1일 개통되었다. 장항선은 경부선 천안에서 호남선 익산 사이를 연결하는 160.2km 구간을 가리킨다. 초기의 명칭은 충남선으로 1922년 6월 1일에 천안에서 온양온천 사이가 먼저 개통되었고, 1931년 8월 1일에 전구간이 개통되었다. 예산, 홍성, 광천, 대천 등 충남의 주요 지방도시를 연결하는 지방 교통의 간선을 이루는 노선이다.
지역 상권의 시발점이자 중심이었던 판교역은 장항선 직선화 작업으로 2008년 역사(驛舍)를 인근 저산리로 옮기면서 아쉽게도 근대문화유산으로 가치가 높은 역사의 흔적을 남겨놓지는 않았다. 역사 앞 노송 한그루만이 판교역의 주변의 번성기를 기억 할 뿐이다. 역사가 철거된 자리에는 ‘판교 특화음식촌’이 들어서 있다. 건물 한편에 옛 판교 역사를 본떠 만든 조형물이 그나마 아쉬움을 달랜다.
판교면 구양완(68) 전 주민자치위원장은 “1930년 이곳에 역이 개통되면서 양곡을 비롯한 물자수송과 정미, 양곡, 양조산업이 번성했어요. 하지만 이곳은 우리민족의 아픈 역사의 현장이기도해요. 일제강점기 판교역을 통해 징용, 징병, 위안부 수송이 이루어졌거든요. 어째든 판교면이 번성기에는 8천명이 넘게 몰려 살다가 지금은 판교마을에 노인들만 2~300명 살아요”라면서 “한동안 이대로 가면 마을 자체가 사라질까봐 걱정을 많이 했어요. 예전 마을이야기를 잘 구성하면 관심을 좀 받지 않을까 싶어서 ‘시간이 멈춘 마을’ 이라는 이름도 제가 지었어요, 처음에는 마을 형님들이 ‘왜 시간이 멈췄냐’고 하면서 혼내키더라구,.. 그런데 ‘시간이 멈춘 마을’이라고 이름을 지어놓으니 사람들이 찾아오고 문화재 등록까지 되었어요. 독립운동가 고석주 선생의 흔적을 찾으려 하와이까지도 다녀왔다.”고 말했다.
옛 판교역을 나와 우회전하여 걷다가 너더리식당 앞에서 판교면행정복지센터 방향으로 좌회전하여 약160미터 올라가다 보면 좌측에 주조장과 정미소가 위치한다. 회백색 시멘트 건물의 세월의 때가 켜켜이 쌓인 ‘동일주조장’과 출입문 위에 ‘TEL 45’가 눈에 들어온다. 수화기를 들고 통화하고 싶은 사람의 이름을 대면 교환원이 전화를 연결해 주던 시절, 동일주조장의 전화번호이다.
1932년 영업을 시작한 ‘동일주조장’은 이 지역 최고의 부호가 운영하던 술도가였다. 1970년대에는 원활한 쌀 수급을 위해 정미소를 함께 운영했다. 바로 앞에 우시장과 오일장이 열렸으니 술 판매량이 어느 정도인지 어렴풋이 짐작해볼 수 있다. 쌀이 귀해 가정에서 술을 담그지 못하도록 엄하게 단속할 때도 주조장은 밀가루로 막걸리를 빚으며 주민들의 고단한 삶을 달래주었다.
동일주조장 관리인의 협조를 받아 동일주조장 내부를 돌아보았다. 폐업 후 20년 넘게 갖혀있던 추억의 장면들이 여기저기서 손짓한다. 세월의 먼지가 뽀얗게 내려앉은 술배달자전거, 세금을 열심히 납부해 받은 상장, 아직도 2000년 12월인 빛바랜 달력도 보인다. 무엇보다 흥미로운건 막걸리나 탁주를 만들었던 명문 술도가의 제조실 내부이다. 여기저기 깨어지고 눕혀진 술항아리들에서 아직도 고두밥에 누룩과 물이 적당히 맛있게 발효된 술 익는 냄새가 코를 찌르는 듯하다.
하지만 사람들이 마을을 떠나고 술의 종류도 다양해지면서 3대째 이어오던 주조장은 결국 운영난을 견디지 못하고 2000년 문을 닫았다.
주조장과 정미소를 돌아보고 다시 방향을 돌려 마을 중앙으로 100여m 내려오면 우측에 스러져가는 목조건물이 기다린다. 주민들에게 ‘촌닭집’으로 불리는 이 건물 역시 한때 중심 상권이었다. 처음 대서방으로 시작해 양품점, 만화가게, 한의원, 건강원 등을 거쳐 마지막으로 내걸린 상호가 닭집이다. 건물 입구에 ‘생닭’ ‘통닭’ ‘백숙’과 ‘건강원’이라는 색 바랜 문구가 이 건물의 역사를 짐작케 한다.
촌닭집 건너편 2층 건물이 판교마을의 핫플레이스 장미사진관이다.
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자 제법 비싸 보이는 카메라를 멘 사진작가들과 젊은이들이 가장 많이 인증 샷을 남기는 파란색 슬레이트 지붕의 ‘장미사진관’이다. 1932년 일본인 손으로 지어진 것으로 알려진 이 적산가옥은 마을에서 유일한 2층 목조 주택이다. 일부에서는 우리 전통 가옥을 구입해 개조한 건물이라고도 하니 정확한 판단은 뒤로 미룬다. 장미사진관도 마찬가지이지만 판교마을의 일부 적산가옥이라 불리는 건물들도 근대기를 거치면서 지붕은 모두 파랗고 빨간 양철과 슬레이트로 개조해 그냥 근대기 건물이라고 칭하는 게 맞는 듯하다.
어째든 장미사진관은 판교마을의 ‘랜드 마크’이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 부호 10여 명이 수천 명 주민을 쥐락펴락하며 살았던 곳이다. 쌀을 빌리기 위해서는 일본어로 “천황폐하 만세” 삼창을 해야 쌀을 얻을 수 있었단다. 해방 후에는 여인숙, 쌀가게, 사진관으로 운영되다가 폐업 후 수십 년 넘게 빈 건물 상태이다.
장미사진관에서 서너 집 지나면 1930년대 지어진 삼화정미소가 있다. 오 씨가 운영했다고 해서 ‘오방앗간’으로 불렸다. 인근에서는 가장 오래된 방앗간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을 파란 양철지붕의 오방앗간에 명절엔 백여 명이 넘는 사람들이 줄서서 기다리곤 했단다.
사진관 뒤편의 판교 5일장(5,10장)이 서는 넓은 공터가 판교장터이고 현재 보건지소 자리가 옛 우시장 터다.
1930년대 당시 판교 우시장은 광천, 논산과 함께 충남 3대 우시장으로 명성을 날렸다. 소뿐만 아니라 돼지와 닭, 개 등 다양한 가축을 거래하는 가축시장이었다. 지금은 장터 벽면에 그려진 다양한 소 그림으로만 당시의 번성했던 우시장을 가늠해볼 뿐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살 때부터 이곳에서 곰표밀가루 대리점을 운영 중인 차종희(87) 어르신은 “판교장은 천안아래에서 가장 번성한 장이었어. 장날, 날 밝기 전에 먼저 모시장이 서지. 산골마을 여기저기서 모시를 이고지고 내어오면 모시장사들은 어둠 속에서 불을 밝히고 물건을 사고팔았어. 어느 정도 모시장이 파할 무렵이면 우시장이 열렸는데 소 외에도 돼지와 닭, 오리, 개 등 사람과 가축이 어울려 우시장이 한바탕 진행되었고 이후 어물전이 열렸어”라며 “주변에서 가장 규모가 컸던 판교 오일장은 오밤중부터 저녁 늦게까지 들썩거렸어. 사람에 채여 앞으로 나아가지 못할 정도로 좁은 읍내가 북적거렸지. 당시 장터를 따라 원정 다녔다는 쓰리꾼(소매치기)이 제일 많이 모인 곳이 판교장이라고 할 정도였다”며 판교장의 전성기를 회상했다.
5일 장터를 빠져나와 농협 건물 건너편에 판교철공소와 극장이 있다.
마을 중앙도로를 건너 제법 넓은 골목에 들어서자 판교철공소가 위치하고 맞은편에 ‘공관’이라 불리던 극장이 눈에 들어온다. 1961년에 지어진 판교 극장은 과거 판교마을 번영의 상징이다.
건물 입구에는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미워도 다시 한 번’, ‘꼬마신랑’ 같은 1960~80년대 흥행작 포스터가 붙어있다. 매표소 창구에 흰 페인트로 쓰여진 영화 관람료는 일반 500원, 청소년 200원으로 지금의 1/20도 안되는 관람료이다.
하지만 주변 마을의 부러움을 사던 극장은 1970년대 텔레비전 보급과 함께 하향 길로 들어섰다. 극장이 문을 닫은 후에는 마을회관으로 사용하다가 1990년대에 건물은 호신술 도장으로 또 한 번 모습을 달리했다. 입구 유리창에는 ‘호신술’, ‘쌍절봉’, ‘차력’ 등 날카로운 글씨체가 남아 있다.
2대째 판교철공소를 운영하는 손효수(58) 씨는 “2층 건물로 지어진 극장 건물의 용도는 새마을운동 홍보가 주목적이었지만 마을의 문화생활을 책임지는 유일한 공간이었다.”면서 “영화 상영부터 유명 가수들의 공연, 콩쿠르, 집회까지 모두 이곳에서 열렸다. 공연이 있는 날은 극장의 발코니에 밴드가 나와서 유행가를 연주하면 우리들은 박수치며 노래도 따라 부르고 흥겹게 놀았다.”고 추억을 더듬는다. 극장이 드물던 시절이어서 영화가 개봉하는 날이면 멀리 부여·공주·보령 등 주변 도시에서도 찾아올 정도로 인기가 대단했다.
버스가 서는 마을 입구 삼거리 슈퍼에서는 예전 버스 회수권을 여전히 팔고 있다. 교통 카드나 자동 인쇄 승차권에 밀려나 보기 힘들어진 버스표가 손때 묻은 나무상자 안에 담겨 있다.
너,나 없이 한 가족처럼
판교 거리에 문을 연 곳은 상점이나 식당, 방앗간, 이발소, 미장원 모두가 마을 사랑방이다. 일제강점기 문을 열었다는 방앗간에는 동네 아주머니들이 삼삼오오 모여 바쁠 때는 주인 일도 도와주고 음식도 나눠먹는다. 손님이 없어 한가한 이발소에는 어르신 서너 분이 둘러앉아 믹스커피를 나누며 자식자랑에 시간 가는 줄 모른다.
따사로운 오후 햇살을 맞으며 웃음꽃을 피우던 중 길 건너 제재소 정순재(76) 사장은 손님이 왔다는 아내의 전화에 잠시 다녀오겠다며 자리를 비운다. 기자도 레트로 투어를 마친 후 수타짜장으로 유명한 동생춘을 찾았다. 어정쩡한 시간이라 그런지 좁은 식당 안은 손님이 없다. "계셔요" 사람 인기척에 미닫이문을 열고 79세 나이가 믿기지않는 단단한 몸매의 수타짜장 달인 조용덕 씨가 주문을 받는다.
즉석에서 가늘고 길게 면을 뽑아내는 모습에 카메라에 담으려하자 얼른 뒤돌아서며 건네는 주인장의 입담이 밉지 않다. “겨우 짜장면 하나 시키고 사진 찍으면 안되지, 우리 집 탕수육도 유명한데” 미소가 절로 나왔다.
너와 나 구분 없이 가족처럼 어울려 하루를 보내는 판교 사람들. 오늘도 판교의 시계바늘은 도시의 시간보다 훨씬 여유롭게 흘러간다.
현재 판교마을은 문화체육관광부 ‘폐산업시설 유휴공간 문화재생사업’에 선정돼 리모델링을 추진 중이다. 서천군청 관광축제과 김석환(57) 매니저는 “계획대로 진행되면 올해 10월에서 11월 사이 판교극장 등 근대건축물 5개동에 대한 리모델링공사에 들어가서 내년 5월에서 6월 오픈 예정”이라고 밝혔다. 판교극장은 다목적 복합 문화 공간으로, 장미사진관은 마을 전시관으로, 촌닭집은 편집숍과 판매점으로 변신을 앞두고 있다.
판교 중심가에서 충분히 옛 감성을 만끽했으면 인근에 위치한 고석주 선생 기념 공원을 찾아보자. 고석주 선생은 일제 강점기때 하와이에 거주하면서 독립운동에 몸담은 어른이고 학교 선생이었다. 그 후 하와이에서 돌아와 군산에 거처 하면서 3.5 만세 운동을 참여해 옥고를 치른 뒤 판교마을에 정착해 농촌 계몽운동을 시작했다. 그를 기리기 위해서 판교마을에서는 독립운동가 고석주 선생의 기념 공원을 세웠다.
판교마을은 사진을 찍으며 차분히 둘러본 후 솜씨 좋은 노 이발사에게 생생한 예전 마을 풍경 이야기를 들으며 머리 손질을 하고 마을에서 유명한 중국집이나 냉면집, 한우전문식당에서 식사를 마쳐도 반나절이면 충분하다.
서천=글·사진 곽경근 대기자 kkkwak7@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