삭발, 단식, 죽음에도 바뀌는 건 없다

삭발, 단식, 죽음에도 바뀌는 건 없다

돌봄책임에 지치는 가족들…발달장애인 분향소에 늘어나는 영정
정부 정책은 재탕 수준…국가 책임 강화해야

기사승인 2022-06-04 06:31:02
3일 서울 용산 삼각지역 1번 출구 인근에 설치된 발달장애인 추모 분향소 모습.   사진=정진용 기자

또 한 명이 숨졌다.

전국장애인부모연대(부모연대) 전남지부가 2일 가족의 폭행에 의한 60대 발달 장애인의 죽음을 알렸다. 전남 여수에 거주하는 60대 발달장애인의 사망 신고가 접수된 건 지난달 17일이다.

부모연대 전남지부에 따르면 폭행 흔적을 이상하게 여긴 장례식장 직원의 의심에서 수사가 시작됐다. 경찰 수사 결과, 숨진 여성은 조카의 폭행으로 사망한 것으로 드러났다. 

부모연대 전남지부는 “발달장애인이 함께 살던 가족에게 폭행당해 사망에 이르렀다”면서 “반복되는 사망사건을 보면서 어찌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은 없고 시간이 지나면 잊히고 마는 것이 대한민국 현실”이라고 꼬집었다.
발달장애인 추모 분향소 벽에 붙어있는 추모 내용이 담긴 포스트잇.   사진=정진용 기자 

적막한 분향소...8일 만에 영정 3개에서 4개로

“故000(6세)” 서울 성동구 발달장애아동
“故000(40대)” 서울 성동구 발달장애부모
“故000(30대)” 인천 연수구 중증뇌병변장애인
“故000(60대)” 전남 여수 지적장애인

부모연대와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 한국뇌병변장애인인권협회, 한국장애인자립생활센터협의회 등 시민단체는 지난달 26일 발달장애인 추모 분향소를 서울 용산 4호선 삼각지역 1번 출구 앞에 마련했다. 대통령 집무실이 있는 국방부 청사와 걸어서 5분 거리다. 지하철 보안요원과의 몸싸움 끝에 분향소는 간신히 출구 앞에 자리잡을 수 있었다.

운영 8일째인 3일, 삼각지역 분향소는 적막했다. 시민들은 출근길 발걸음을 재촉했다. 영정은 그 사이에 하나가 더 늘어 4개가 됐다. 탁자 위에는 숨진 6살 발달장애아동을 추모하기 위해서인 듯 뽀로로 비눗방울, 젤리, 음료, 과자가 놓였다. ‘살고 싶다’고 적힌 포스트잇이 눈에 띄었다.  

분향소는 부모연대와 전장연 활동가들이 돌아가며 지키고 있다. 우연히 지나가다 발걸음을 멈추는 행인보다는 멀리서부터 꽃을 사 들고 조문을 하러 오는 이들이 많다는 게 부모연대 관계자 설명이다. 관계자는 “항상 자리를 지키지는 못한다”고 했다.

삼각지역을 비롯해 전국 20곳에 발달장애인 추모 분향소가 세워졌다. 당초 2일까지 였지만 시민단체들은 분향소 운영을 49재인 내달 10일까지로 연장하기로 했다. 
부모연대가 지난달 26일 서울 용산구 전쟁기념관 6.25 상징탑 앞에서 ‘죽음을 강요당한 발달장애인과 그 가족에 대한 추모제’를 열고 있다.   사진=임형택 기자

발달장애인 돌봄 제공자…가족이 92.77%

발달·중증장애인 부모가 자녀를 살해하고 자신도 스스로 목숨을 끊는 참사가 끊이지 않는다. 지난달 23일 서울 한 아파트에서 40대 여성이 발달장애를 앓던 아들과 함께 아파트에서 투신해 숨졌다. 같은 날 인천에서도 60대 모친이 30대 중증장애인 딸에게 다량의 수면제를 먹여 숨지게 하고 자신도 극단적 선택을 시도했다. 지난 3월 경기 시흥에서는 50대 여성이 발달장애가 있는 20대 딸을 살해한 혐의로 경찰에 붙잡혔다.

발달장애인은 지난 2000년 8.8만명에서 2020년 24.8만명으로 3배 가까이 증가했다. 전체 등록장애인 9.42%를 차지한다. 가족까지 합하면 61.5만명으로 추산된다.

지난해 한국장애인개발원의 연구 보고서에 따르면 발달장애인 돌봄 제공자는 가족이 92.77%로 압도적이다. 일상생활에서의 도움 필요 정도를 보면 발달장애인의 경우 모든 일에 남의 도움이 필요한 비율은 12.71%다. 비발달장애인은 4.86%다.

한시라도 아이에게서 눈을 뗄 수 없는 부모는 결국 직장을 관두고, 생계는 어려워진다. 부모들은 돌봄 책임이 온전히 가족에게만 지워지는 것에 부담을 토로하고 있다. 발달장애인 낮시간 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장애인 주간 보호시설, 장애인 복지관 등 지역사회 다양한 기관에서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지만 다수가 아동, 청소년 발달장애인 대상이라 성인기 발달장애인이 소외되는 실정이다. 서비스 내용이 불명확하거나 서로 중복되기도 한다.

박미라 부모연대 성동지회장은 지난달 26일 열린 기자회견에서 “10달 동안 품었던 자식을 품에 안고 뛰어내린 어머니의 심정은 오죽했겠는가”라며 “이 세상은 발달장애인으로 살아가기에는 너무나 고달프기에 다른 선택이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달 19일 오후 서울 종로구 청와대 앞 효자치안센터에서 앞에서 발달장애인 가족의 단체 삭발식이 진행되고 있다.   사진=임형택 기자

“사람 죽어가는데 갈수록 후퇴하는 정책”

시민단체들은 문재인 정부가 발표한 ‘제1차 발달장애인 생애주기별 종합대책’의 후속으로 2차 종합대책을 수립하고, 당사자 요구가 담길 수 있도록 민관협의체를 구성하자고 새정부에 요구해왔다. 답은 없었다.

부모들은 무엇을 더 해야 국가의 대답을 들을 수 있을지 막막한 심정이다. 지난 4월19일에는 청와대 근처에서 발달장애인 부모 555명이 삭발식을 했다. 곡기를 끊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4명이 대통령직인수위원회(인수위)에 지원대책을 촉구하며 보름간 단식농성을 진행했다.

하지만 인수위가 내놓은 110대 국정과제 발달장애 영역은 전임 정부 정책 재탕 수준에 그쳤다는 게 부모연대 평가다. 발달장애인이 지역사회에서 살아가는 데 필요한 구체적인 방안도 없었다.

윤진철 부모연대 사무처장은 “정권이 바뀌자마자 2차 종합대책을 수립하지 않을 수 있다는 얘기가 들리고 있다”며 “사람이 죽어 가는데도 정책은 후퇴해간다”고 비판했다.

윤석열 대통령 집무실에는 발달장애 작가 그림 2개가 걸려있다. 윤 대통령은 한미 정상회담 단독 환담을 마치고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에 그림을 직접 설명하기도 했다. 윤 사무처장은 “한마디로 이율배반적이라는 생각”이라면서 “발달장애인에 관심이 많다는 건 좋은 일이지만 사람들이 살려달라고 외치는데 생존 문제부터 관심을 갖는 게 맞지 않나”라고 반문했다.

김용득 성공회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지금의 발달장애인 지원체계는 파편화돼있어 하나의 연결성이 부족하다. 예산 배정에서도 번번이 후순위로 밀리는 것이 현실”이라며 “이용자 개별 특성에 맞는 섬세한 지원 서비스를 구축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시민단체들은 오는 7일은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8일에는 전남 여수를 찾아 가족의 폭행으로 숨진 60대 발달장애인을 추모하는 기자회견을 연다.

정진용 기자 jjy4791@kukinews.com
정진용 기자
jjy4791@kukinews.com
정진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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