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 방탄소년단은 여러 이름으로 불려 왔다. 소속사 하이브가 작은 기획사였던 데뷔 초엔 ‘흙수저 아이돌’로, 한국 가수 중 처음으로 미국 시상식 무대를 밟았을 땐 ‘신기록 제조기’로, 그리고 전 세계를 들썩이게 하는 지금은 ‘글로벌 슈퍼스타’로. 그러나 방탄소년단을 충분히 담아낼 이름은 오직 방탄소년단뿐이다. 이들이 누구인지는 지위가 아닌 과정이 말해주기 때문이다. 새로운 장을 펼칠 방탄소년단의 9년을 그들이 불러온 가사로 돌아봤다.
“내가 진짜 나이고 싶게 해” - ‘힙합성애자’(2014)
RM은 말했다. “방탄소년단을 오래 하려면 내가 나로서 남아 있어야 한다”고. 돌아보면 방탄소년단은 언제나 그랬다. 방탄소년단의 지난 9년은 주변이 정의하는 대로가 아닌 자신이 원하는 대로 존재하기 위한 여정이었다. “지금 네 거울 속엔 누가 보여”라는 데뷔곡 ‘노 모어 드림’(No More Dream) 속 질문은 “더는 남의 꿈에 갇혀 살지마”라는 ‘N.O’의 호소로 이어졌다. 언급한 두 곡이 또래 청중 보편의 이야기라면, 이듬해 낸 노래 ‘힙합성애자’는 훨씬 개인적이다. 방탄소년단이 에픽하이와 제이지와 나스를 보며 꿈을 갖게 된 과정을 보여준다. “할 말이 많아서 남들이 해주는 얘기로 부족하다 느꼈”던 소년들은 “내가 진짜 나이고 싶게” 하는 무언가로서 음악을 받아들였다. 역사는 이렇게 시작됐다.
“꾸질한 기억, 잊진 말고 딱 넣어두자고” - ‘이사’(2015)
서울 논현동 3층, 사무실을 개조한 숙소에 살던 시절. 이 때의 방탄소년단은 노래 ‘바다’ 속 가사처럼, “방송에 잘리기는 뭐 부지기수”에 “회사가 작아서 제대로 못 뜰 거”라는 예단을 견뎌야 했다. 3년간의 분투가 고스란히 새겨진 숙소를 떠나 새 집으로 향하던 시기. 방탄소년단은 ‘이사’ 가사에 적었듯 “더 높은 곳으로” 비상을 꿈꾸면서도 “꾸질한 기억 잊진 말고 딱 넣어두자”고 서로에게 약속했다. 숙소에 밴 “우리의 냄새”를 “향기”라고 부르며 “잊지 말자”고 다짐도 했다. 인기의 크기가 아닌 노력의 양으로 과거를 기억하는 것. 가장 높은 곳에 있을 때조차도 스스로를 ‘증명’(Proof·방탄소년단 신보 제목)해 보이려는 방탄소년단의 각오는 바로 이런 태도에 뿌리를 두고 있다.
“태양이 아닌 너에게로” - ‘작은 것들을 위한 시’(2019)
‘러브 유어셀프’(Love Yourself) 연작 음반으로 세계적인 성공을 거두며 빌보드 차트 정상에 오른 2018년, 방탄소년단은 뜻밖의 고백을 꺼냈다. “마음이 많이 힘들었어요. 우리끼리 해체를 할까 말까 고민도 했고….”(MAMA 시상식) 자신이 쓰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던 왕관의 무게를 견디기 어려웠던 걸까. 방탄소년단은 이듬해 낸 음반에서 “나는 내가 개인지 돼진지 뭔지도 아직 잘 모르겠는데, 남들이 와서 진주목걸일 거네”(‘인트로 : 페르소나’)라고 조소했다. 자신을 비추는 빛이 밝을수록 그림자도 길어지는 것 같아 괴로웠다는 이들은 그러나 가야 할 길이 어디인지는 잊지 않았다. “네가 준 이카로스의 날개로, 태양이 아닌 너에게로.”(‘작은 것들을 위한 시’) 더 높은 곳을 향하기보다는 사랑하는 이와 눈 맞출 수 있기를 택하겠다고 말하는 이 음반의 주제는 ‘영혼의 지도’. 방탄소년단은 그렇게 자신들이 탄 배의 키를 단단히 쥐었다.
“그날을 향해, 더 우리답게” - ‘옛 투 컴’(Yet To Come)(2022)
방탄소년단이 단체 활동에 브레이크를 걸며 낸 노래 제목은 ‘옛 투 컴’으로, 풀이하면 ‘아직 오지 않았다’는 뜻이다. 개인 활동에 집중하기로 한 팀의 결정과 군 입대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현실 위에서, 방탄소년단은 ‘다시 돌아오겠다’는 빤한 인사 대신 ‘최고의 순간은 아직 오지 않았다’는 패기로 시간을 잠시 매어 놓는다. 이전보다 뛰어난 성과를 거둘 수 있다는 과시가 아니다. 전에 없이 높이 오를 수 있다는 자만은 더더욱 아니다. 다만 가장 좋은 순간이라고 부를 수 있는 “그날을 향해 더 우리답게” 달리겠다는 약속이다. 정체성을 잃지 않고, 과거를 잊지 않고, 가야 할 길을 놓치지 않으며 찍은 쉼표. 가장 방탄소년단다운 모습으로 1막을 마무리했다.
이은호 기자 wild37@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