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이순신이다. 이순신 장군의 명량해전을 다룬 영화 ‘명량’이 개봉한 지 8년. 이번엔 한산대첩을 다룬 후속작 ‘한산: 용의 출현’이 지난달 27일 개봉했다. 김한민 감독이 그대로 연출을 맡았다. 이야기의 시점은 5년 전으로 돌아갔다. 이순신 장군은 배우 최민식에서 박해일로 바뀌었고, 와키자카는 조진웅에서 변요한으로, 임준영은 진구에서 옥택연으로 바뀌는 등 시점에 맞춰 새로운 영화로 출발했다. ‘한산: 용의 출현’(이하 ‘한산’)은 개봉 8일 만에 300만 관객을 돌파하며 호응을 얻고 있다.
박해일은 김한민 감독을 역사 선생님 같다고 표현했다. 개봉 전 ‘한산’ 제작보고회에서도, 언론 시사회에서도 김한민 감독은 역사 선생님처럼 임진왜란과 이순신 장군 이야기를 길게 늘어놨다. 개봉 전 서울 삼청동 한 카페에서 만난 김한민 감독은 역사 사료에 기반한 이야기로 영화를 설명했다. ‘명량’에서 ‘한산’, ‘노량’으로 이어지는 이순신 3부작 프로젝트부터 이순신 장군 이야기, 제작 환경의 변화 등 김한민 감독에게 궁금한 점을 들어봤다.
- ‘명량’이 기록한 역대 최다 관객수 1700만 기록이 아직도 깨지지 않고 있어요.
“‘명량’은 기대하지 않았던 흥행 스코어를 기록했어요. 사실 지금도 미스터리예요. 분명한 사인이 있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한산’과 ‘노량’을 3부작으로 준비하면서 이순신 장군 이야기를 잘 만들겠다고 다짐하는 계기가 됐어요. 그러다보니 ‘한산’을 바로 선보이지 못하고 개봉일 기준으로 8년이 흘렀어요. 열심히 준비했습니다.”
- ‘명량’에 대해 다양한 평가가 나왔어요. 후속편은 어떤 방향으로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셨나요.
“해전이 가진 성격에 분명 차이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명량’은 뜨거운 역전승 느낌이 강한 작품이었죠. ‘한산’은 수세 국면에서 차갑게 상황을 계산하는 느낌이에요. 수세를 승세로 바꾸려는 이순신의 균형 잡힌 자기 판단이 필요했죠. 이순신 캐릭터부터 전쟁까지 성격이 달라요. ‘명량’은 고독한 이순신이 보여주는 불굴의 의지에 집중했다면, ‘한산’은 이순신을 둘러싸고 도운 주변 장수들 이야기가 훨씬 비중이 커요. ‘한산’은 물처럼 포용하고 받아들이면서 리더십을 발휘하는 이순신이었고, ‘명량’은 뜨거운 불처럼 관찰하고 격정적인 느낌의 이순신이었고요. 그래서 이순신 장군 캐스팅도 다르게 할 수 있었어요. 실제 역사에 존재한 인물이라 배우가 바뀌어도 괜찮겠다는 판단이 들었습니다. 만약 마블 영화에 나오는 허구의 인물을 다른 배우가 연기하면 이상했겠죠.”
- 한산도 앞바다에서 펼쳐지는 전투를 어떻게 표현할지 고민이 많았을 것 같아요.
“‘한산’을 만들어야 하는 이유였어요. 모두가 아는 익숙한 전투라 생각할 수 있어요. 유인전을 해서 학익진을 펼치고, 적당히 활약해서 적당히 대승을 거두는 전투라고요.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매우 어려운 국면에서 매우 어려운 전투를 했어요. 유인전도 쉽지 않았고, 학익진을 펼치는 것도 실전에서 처음 시도하는 거였죠. 거북선에 있는 문제를 보완해서 다시 활약하게 하는 미션도 있었고요. 이순신 장군이니까, 학익진이니까, 거북선이니까 쉽게 이겼을 거라고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관객들이 영화를 보면서 이순신과 주변 장수들이 노력했다는 걸 새롭게 느꼈으면 좋겠습니다.”
- 해상 전투 장면에서 시각적인 것, 청각적인 것을 구체화하는 느낌이 들었어요.
“해전을 보여주기 식으로 표현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한산 해전은 그 시기 전 세계적으로 전무후무한 해전이었다고 생각해요. 당시엔 체계적 진법과 정교한 유인술을 쓰고 첨단 무기(거북선)를 이용해 완벽하게 궤멸하는 해전이 없었죠. 우리가 굉장한 자긍심을 갖고 해전을 봐야 하지 않나 생각했어요. 그럼 해전을 제대로 보여줘야죠. 영화적 스펙터클과 정교한 전술이 필요했어요. 그 과정에서 이순신의 중요한 덕목인 유비무환이 드러나요. 정직하게 사람들과 소통하면서 성실하고 집중력 있게 전쟁을 준비하죠. 영화를 열심히 만들지 않을 수 없었어요.”
- 430년 전 이순신 장군이 지금 이 시대에 어떤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하시나요.
“이순신 장군은 실존한 역사 속 인물 가장 오염되지 않은 인물이라고 생각해요. 지금 시대에 중요한 통합과 화합의 아이콘으로 중요한 지점에 계신 분이죠. 나라를 구한 성웅 이미지로도 지금 대한민국 사회에 기능할 수 있지만, 더 중요한 건 당시 이순신이 가진 정신에 있어요. ‘한산’에서도 얘기가 나오지만, 의(義)와 불의(不義)의 전쟁이란 명제를 내세우잖아요. 지금 우린 임진왜란을 조선과 일본이 싸운 7년 전쟁이라 생각해요. 하지만 당시 조선 사회에 일반 백성들은 나라와 나라의 싸움이라 인식하지 않았어요. 의와 불의의 싸움이었고 의를 실천하는 핵심 인물이 이순신이죠. 의는 대한민국 사람에게 DNA로 각인된 것 같아요. 격변의 근현대사를 거치며 민주화를 이루는 데까지 그 중심엔 의라는 코드가 있었다고 생각해요. 이순신을 새롭게 재평가하고 세계사적 인물로 등장시킬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 이순신 3부작의 배우 캐스팅이 모두 달라요.
“다른 배우가 연기해도 결국 이순신이 다양한 면들을 총합한 매력을 가진 분이라고 생각해주면 좋겠어요.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한산’의 이순신은 지장, ‘명량’에선 용장, ‘노량’에선 현장이라고 말씀드리고 있어요. 이순신 장군은 상황에 따라 대처하는 유동성이 대단하신 분이에요. 과묵하고 말수가 적고 균형을 갖춘 분이 유연하게 대처하는 걸 보면 굉장히 매력적이죠. 이런 리더면 부하들이 정말 신뢰했겠단 느낌이 들어요. ‘한산’에서 지략적이고 섬세한 이순신을 표현하는 데 있어 배우 박해일이 필요했어요. 잘 어울렸어요. 젊기도 하고요.”
- ‘한산’에서 ‘명량’과 다르게 보완하려고 한 점은 무엇인가요.
“‘명량’은 정말 맨땅에 헤딩이었다. 1시간 분량의 해전을 구현하는 것 자체가 당시 굉장히 힘든 작업이었죠. 그땐 물을 표현하는 시뮬레이션을 개발하는 일이 지금보다 훨씬 힘들었어요. 영화 ‘2012’에서 CG를 담당한 사람이 이 예산으로 만들면 욕먹기 딱 좋을 거라고도 했고요. 그래도 용기를 낸 건 울돌목 해상이 지금도 실제로 존재한다는 점 때문이었어요. 그 소스를 잘 적용하면 어느 정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싶어 시도했지만 역시나 힘들었습니다. ‘명량’은 공정을 하나하나를 다 우격다짐으로 처리했지만, ‘한산’과 ‘노량’은 그렇게 하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어요. 사전 시각화와 물에 대한 검증을 많이 거쳤습니다. 그래서 8년 걸렸어요.”
- 사전 시각화가 무엇인가요.
“보통 영화는 콘티(각본을 바탕으로 촬영에 필요한 사항을 기록한 것)를 통해 만들어요. 사전 시각화는 콘티를 넘어 애니메이션 수준으로 만드는 거죠. 액션이나 다이나믹한 장면에서 구현하기 힘든 걸 동영상 콘티로 작업하지만, 그걸 넘어선 버추얼 프로덕션 작업이에요. 버추얼 스튜디오에서 애니메이션을 만든다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쉬울 거예요. 사전 시각화 작업을 해야 해전을 잘 구현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70%는 성공이라 생각하지만, 보완해야 할 점이 30% 이상 남은 것 같아요.”
- ‘한산’은 배를 물 위에 띄우지 않고 촬영했다고 들었어요. 그런 작업 방식을 선택한 이유가 있나요.
“영화계 현장이 많이 바뀌었어요. 52시간 근로제를 엄격히 준수하고 있죠. 또 영화를 만들면서 스케줄링이 매우 중요한 시대가 됐어요. 전체 제작비가 오른 만큼 효율적으로 스케줄과 회차를 관리해야 합니다. 그래서 ‘명량’처럼 바다에 배를 띄우고 날씨를 천운에 맡기며 찍기엔 무리예요. 좋은 그림을 담보할 수 없거든요. 그래서 바다에서 직접 촬영하는 건 하지 말자고 결정했어요. 평창 올림픽에서 쓴 3000평 정도 되는 400미터 스케이트장을 VFX 세트장으로 만들어서 찍었습니다. 아주 잘한 선택이라고 생각해요.”
- 영화를 만들면서 스트레스가 많았을 것 같아요. 왜 이런 일 벌였나 싶을 것 같기도 하고요.
“아이러니하지만, 그럴 때마다 ‘난중일기’를 끼고 있었어요. 희한하게 ‘난중일기’를 보면 마음에 위안이 되거든요. 남의 일기장 훔쳐보듯이 수시로 봤어요. ‘그래, 이렇게 힘들게 사셨어’라고 위로를 얻으며 잠들기도 했고요. 이순신 영화 세 편이 빡빡하게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현재 관객에게 위로와 용기, 힘이 됐으면 좋겠어요. 저는 정말 이순신 3부작이 그런 영화가 되길 바랍니다.”
이준범 기자 bluebell@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