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세연 감독 “피눈물 흘린 팬들 얘기 ‘성덕’, 좀 웃깁니다” [쿠키인터뷰]

오세연 감독 “피눈물 흘린 팬들 얘기 ‘성덕’, 좀 웃깁니다” [쿠키인터뷰]

기사승인 2022-09-30 17:15:01
오세연 감독. 오드(AUD)

2019년 3월. 몇몇 연예인이 단체 카톡방에서 성관계 영상을 불법 촬영하고 유포한 사건이 대대적으로 보도됐다. 그중 한 연예인의 대표적인 ‘성덕’(성공한 덕후) 오세연 감독이 더 이상 성덕이 아니게 된 순간이다.

혼란스럽고 힘든 시간이 찾아왔다. 시간이 흘러 이젠 웃으며 얘기할 수 있는 흑역사가 됐을 쯤, 친구들 사이에서 장난처럼 이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면 재밌겠다는 얘기가 나왔다. 대학에서 영화를 전공하는 오 감독은 그 이야기를 그냥 넘기지 않았다. 상처를 입고 충격을 받아 더 이상 그 연예인을 좋아할 수 없게 된 오 감독의 반대편엔 여전히 그 연예인을 지지하고 옹호하는 팬이 존재했다. 어떻게 그 일 이후에도 계속 좋아할 수 있을까. 그 마음이 궁금했다. 그래서 카메라를 들었다.

오세연 감독이 연출한 ‘성덕’은 한순간에 ‘덕질’을 강제 종료 당한 팬들의 이야기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다. 충격과 상실을 경험한 팬들의 목소리가 영화 대부분을 채운다. 누군가를 좋아하며 덕질을 하는 것이 대체 어떤 의미인지, 그들이 이제 더 이상 좋아할 수 없게 된 누군가를 좋아한 긴 시간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등을 담담하게 이야기한다. 지난 23일 서울 용산동 한 카페에서 오세연 감독을 만나 ‘성덕’을 기획해서 찍고 편집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 영화를 찍어야겠다고 마음먹은 순간과 찍기 시작한 다음은 다르잖아요. 영화를 처음 시작할 때 어땠는지 궁금해요.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이 맞아요. 처음엔 아무것도 모르잖아요. 영화는 카메라 하나만 있으면 찍는 거란 생각으로 냅다 뛰어들었죠. 하지만 아니었어요. 기술적인 문제가 많았더라고요. 하나부터 열까지 제가 다 챙겨야 하는 상황에서 잠깐 정신을 놓으면 촬영이 불가능해졌어요. 부산에서 서울까지 갔는데 SD카드를 안 가져가기도 했고, 촬영하고 이상해서 돌려보니까 슬로우 앤 퀵 모드로 촬영해서 소리가 녹음되지 않았어요. 웃을 수 없는 실수가 많았습니다. 기획단계에선 남아있는 팬들에서 시작해 우리 사회의 그릇된 우상화를 그리는 대서사시를 상상했어요. 영화를 찍을수록 그것에 대해 여전히 잘 모르겠고, 감당할 수 없는 영역이란 생각이 들었어요. 눈앞에 있는 팬들에게 집중하고 싶었어요. 기획부터 완성까지 점점 범위를 좁혔습니다.”

영화 ‘성덕’ 스틸컷

- 영화에 대한 생각이 처음과 다르게 어떻게 바뀌어갔나요.

“영화를 만드는 기간이 꽤 길었어요. 2019년 5월부터 2년6개월 정도니까 제 인생의 10분의 1을 쓰면서 만들었죠. 이야기에 깊이 들어가고 못 빠져나와서 감정적으로 힘든 순간이 오더라고요. 시작할 때 너무 용감했던 나머지 이 작업으로 내가 상처받을 수 있다는 것, 슬프고 힘든 일이라는 걸 몰랐어요. 영화를 만드는 중간에 3개월 정도는 아무것도 못했어요. 보기도 싫어서 누워 있었죠.”


- 3개월 동안 누워서 어떤 생각들을 했나요.

“막막했어요. 그전까지 한 편의 영화를 끝까지 만든 경험이 없었거든요. 동시에 그 사람의 팬이었던 내가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싶어 슬프기도 했고요. 3개월 동안 책상 앞에 앉지 않으려고 하면서 편집하는 시간을 피했어요. 영화를 완성하는 것이 무섭기도 했어요. ‘성덕’이 내 첫 영화라는 걸 받아들일 용기가 없어서 두려웠고, 내 손을 떠나보내는 게 무서웠죠. 그래도 어떻게든 ‘성덕’을 부산국제영화제에 올리고 싶은 마음이 강했어요. 부산국제영화제는 제게 의미가 있는 영화제고, 영화감독이면 한번쯤 가보고 싶잖아요. 마감을 지키려고 이 악물고 겨우겨우, 누가 보면 남이 시킨 일 하는 것처럼 편집을 시작했어요. 막상 다시 작업을 하니까 재밌더라고요.”


- 영화 전반에 웃음이 가득한 느낌이었어요. 시사회 도중에도 객석에서 웃음이 여러 번 터지더라고요.

“저희가 스타들의 범죄 때문에 피눈물 흘린 사람들이잖아요. 눈물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들이 울어야 하는데, 우리가 왜 울지 싶더라고요. 어떤 사건으로 우리의 덕질이 파괴됐지만, 우린 삶을 재건해서 잘 살아야 하잖아요. 과거를 슬퍼하기보다 웃으면서 보내주고, 다시 잘 살았으면 하는 마음이었어요. 인터뷰이 눈에서 눈물이 나오는 모습은 절대 보고 싶지 않았어요. 우리가 그런 일 때문에 울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과해지니까 웃겨야겠다는 생각으로 바뀐 것 같아요.”

‘성덕’ 공식 팬클럽 오덕과 팬미팅 현장에 참석한 오세연 감독. 오드(AUD)

- ‘성덕’ GV(관객과의 대화)가 특히 재밌다는 반응이 많더라고요.

“시간 내서 영화를 보러 오는 것 자체도 감사한 일이잖아요. 영화를 만든 사람에게 궁금한 게 남아서 대화하는 시간까지 자리를 지키는 건 정말 감사한 일이죠. 전 영화 보고 GV가 있으면 배고프고 힘들어서 바로 도망가거든요. GV를 하면서 영화는 관객이 보면서 완성된다는 걸 체험했어요. 관객들에게 응원을 많이 받았고, 만들길 잘했구나 싶었어요. 그동안 힘든 시간들이 미화되더라고요. 비슷한 경험을 한 관객이 많아서 저도 많이 배워요. 관객 중 한 분이 누구의 팬이었다고 말하면, 객석에서 ‘아~’ 하는 탄성이 나와요. 아무래도 ‘성덕’이 유머러스하고, 저도 똑같은 덕후라는 생각에 친근하게 느끼는 것 같아요.”


- 혹시 GV에서 기억에 남는 관객이나 질문이 있나요.

“말문이 막히는 질문들이 있어요. 하나는 감독님이 누군가의 팬으로 살았지만, 이젠 감독님에게 팬이 생겼다면서 어떻게 살 거냐고 묻더라고요. 웃기지만 심각한 질문이잖아요. 난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나, 그 자리에서 고민했어요. 답변은 ‘일단 저를 좋아하지 말아주실래요. 저도 어떻게 될지 모르잖아요. 그래도 잘 살아보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또 그 사람의 노래를 계속 들어도 될까 하는 질문도 고민됐어요. 제가 박사님이라도 된 것처럼 들으시면 안 된다고 하는 것도 좀 그렇잖아요. 범죄자에게 금전 이득이 가도록 하면 안 될 것 같지만, 불법 다운로드를 받는 것도 아닌 것 같고요. 전 ‘몰래 몰래’라고 얘기했어요. 아마 다들 그리울 때 숨어서 노래를 듣다가 얘기하는 것 아닐까요.”


- 영화감독의 꿈은 언제 어떻게 시작됐는지 궁금해요.

“고등학교 입학할 땐 예능 프로그램 작가나 방송국 PD가 되고 싶었어요. 덕질 영향이 컸죠. 오빠가 예능에 출연하니까 난 작가가 되겠다고 생각했어요. 지방 학생들은 서울에 가면, 방송국에 가면 연예인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고등학교 1학년 때 우연히 영화의 전당에서 단편영화를 제작하는 워크숍에 갔다가 영화라는 세계를 완전히 알아버렸어요. 전혀 몰랐던 세상이었죠. 궁금해져서 독립영화들을 검색하고 영화제를 찾다가 영화에 빠졌어요. 시나리오를 쓰는 학원도 가고 영화 평론을 공부하는 아카데미도 갔어요. 영화를 정말 열심히, 많이 봤어요. 하고 싶은 일도, 할 수 있는 일도 영화밖에 없다는 생각으로 영화과에 지원했고 운 좋게 합격했습니다.”

오세연 감독. 오드(AUD)

- 혹시 감독님은 지금 누군가를 덕질하고 있는지, 앞으로는 어떨지 궁금해요.

“전 언제나 누군가를 사랑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준비는 됐지만 지금은 덕질할 거리가 보이지 않아요. 두루두루 관심은 많아요. 어제도 그룹 르세라핌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혼자 오열했어요. 뉴진스가 단국대 축제에 갔다고 해서 무대 영상도 찾아봤고요. 하지만 이건 덕질이 아니라 관심 같아요. 진짜 덕질이면 느껴야 하거든요. 내 인생 새 챕터가 시작됐다는 걸요. 재밌는 것 있으면 추천해주세요. 최근에 트위터에서 도는 얘기를 봤어요. 예를 들어 어떤 분이 남자 아이돌을 좋아한다고 하시면서, 오세연 감독님은 안 좋아했으면 좋겠다고 하더라고요. 억울해요. 좋아할 생각도 없는데 이렇게 배척할 수 있나요.”


- 혹시 감독님이 과거 좋아했던 그 연예인이 ‘성덕’을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보셨나요.

“처음 ‘성덕’을 만들 때 걱정하고 긴장도 했어요. 그가 나중에 언젠가 ‘성덕’을 알게 될까, 보게 될까, 찾아볼까 싶었죠. 영화를 만들면서 ‘성덕’이 향하는 방향이 그들이 아니라 우리 팬들이란 생각이 들었어요. 전 팬들에게 하고 싶은 얘기, 팬들이 봐줬으면 하는 얘기를 하고 싶었거든요. 나와 비슷한 입장의 사람들이 공감해줘야 할 텐데 하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그분들이 ‘성덕’을 봤으면 좋겠다, 안 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없어요. 봐도 굳이 저한테 연락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 ‘성덕’을 볼 관객들에게 해주고 싶은 얘기가 있나요.

“영화 제목부터 ‘성덕’이고 덕후 얘기잖아요. 그래서 덕질을 해본 사람만 이해하는 영화로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하지만 누군가를 좋아했고, 사랑했고, 상처받았고, 실망한 보편적인 경험을 한 분들은 ‘성덕’에서 공감 포인트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요. 그리고 영화가 좀 웃깁니다. 친구, 가족들과 같이 보면서 실컷 웃을 수 있어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대화할 얘기도 많으니, 여럿이서 손잡고 보셨으면 해요. 또 옆자리 관객들의 웃음소리로 채워지는 영화라서 꼭 극장에서 봐주셨으면 합니다.”

이준범 기자 bluebell@kukinews.com
이준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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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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