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름투성의 '나환자 여인' 부축한 신사의 정체

고름투성의 '나환자 여인' 부축한 신사의 정체

[근대 인술의 현장(4)] '조선 나환자'의 아버지 의사 포사이드(하)
강도 당해 죽음 위기 넘긴 서양 의사 '선한 사마리아인' 된 이유

기사승인 2022-10-17 08:33:32
전편('썩은 개고기를 먹는 소년들..의사 포사이드와 비참한 조선' 참조) 요약

서양 의사 포사이드(한국명 보위렴·1873~1918). 1904년 8월 초 고국 미국 뉴욕을 떠나 9월 29일 미국남장로회 전주선교부에 도착한 의료선교사였다. 우리 땅에서 러일전쟁이 발발한 해였다. 그는 전주-군산을 중심으로 가난한 조선의 민중 구제에 힘쓴다.

그러던 어느날 만경강 하구 목천포(현 전북 익산시 목천동 일대)에서 왕진을 끝내고 환자의 집에서 하룻밤 묵던 중 떼강도를 만나 군도에 귀가 잘리고 몸이 난자 당한다. 

간신히 목숨을 건진 그는 고향 미국으로 후송된다. 그는 끔찍한 기억에도 몸을 움직일 정도로 회복되자 다시 조선으로 들어와 인술 활동을 계속한다.
러일전쟁 중 조선에 들어온 미국 의사 포사이드가 강도떼에 습격을 당해 중상을 입은 터로 추정되는 호남평야 만경강 하류 목천포. 지금의 전북 익산시 목천동과 김제시 백구면 유강리 일대다. 사진은 포사이드 활동 터 유강리에 세워진 '만경강문화관'. 사진=전정희


하편
1909년 3월 포사이드는 목포 진료소(목포 프렌치병원 전신) 의료 장비를 확충하고 섬 지방 순회 진료 등에 힘쓰고 있었다. 한데 급전(急電)이 왔다. 친구이자 의사인 오웬(1867~1909)이 위독하니 광주(光州)로 와달라는 통보였다. 그는 조랑말을 타고 나주를 거쳐 광주로 향했다.

그런데 나주~광주 간 신작로 길가에 피고름으로 얼룩진 누더기를 입은 여인이 쓰러져 있었다. “살려 주세요”라며 손을 내밀었다. 얼굴은 흉측했고 손발이 짓물러져 있었다. ‘나병’(정식 명칭 한센병)이었다. 아무도 접근하지 않았다.

포사이드는 여인에게 다가가 그를 안아 말에 태워 광주로 향했다. 시간이 꽤 지체됐다. 그렇게 광주 양림동 제중원(광주기독병원 전신)에 도착해 여인을 내려놓자 환자 등이 아우성쳤다. 절대 함께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친구 오웬은 그가 도착 전 폐렴으로 사망했다. 여인은 광주 동남쪽 옹기 가마터에 마련한 임시 거처에 살게 했다. 이 이야기는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로 지금도 회자된다.
일제강점기 전남 광주군(당시) 외곽 옹기 가마터와 포사이드. 그는 누구도 접촉을 꺼리는 '나환자'(한센병)를 거두어 가마터를 임시 거처로 제공했다. 대표적 '나병원' 여수 '애양원'은 그로부터 시작됐다. 

오웬 부인 조지아나는 포사이드의 지체로 남편을 잃었다고 오해함직도 했다. 그렇지만 그해 8월 ‘더 미셔너리’지에 ‘살신성인 정신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을 포사이드는 행동에 옮겼다…신사복 차림으로 고름투성의 환자의 팔을 잡고 부축하였으며 그 광경에 사람들이 놀랐다’라고 썼다.

이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가 전국에 퍼지면서 나병 환자들이 하나둘 광주로 몰렸다. 포사이드는 1912년 광주군 효천면 봉선리(현 봉선동 일대)에 환자 수용소와 광주나병원을 세웠다.

1919년 한국에는 나환자만 2만여 명이었다. 결핵은 집계가 불가할 정도로 퍼져 있었다.
포사이드(오른쪽)와 한국인 조력자들. 기독교를 통한 계몽 활동 모습으로 보인다. 

포사이드는 한국 재임 5년간 나환자와 결핵환자를 위해 헌신했다. 본국 재산을 팔아 봉선동 대지를 마련하기도 했다. 하지만 강도 후유증과 풍토병 스푸르(sprue) 등으로 더는 일할 수 없었다.

나병 환자들에게 ‘성인(聖人)’ ‘아버지’로 불렸던 포사이드는 귀국해 전국을 순회하며 “조선의 가난한 이들이 질병에 노출되어 무방비로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들을 빨리 도와주어야 합니다”라고 외쳤다. 성금이 답지하면 한국으로 보냈다. 미국의사협회를 향해 한국 등 동양에 질병 예방 치료를 위한 조처를 하라고 호소했다.

1918년 5월 9일 그가 죽었다. 그리고 1926년 일제가 의료체계 재편 명분 아래 광주나병원을 전남 여수군 신풍리로 옮겼다. 봉선동 그의 기념비를 나환자들이 떠메고 걸어서 신풍리까지 가져가 다시 세웠다.


<포사이드 약력>

1873년 미국 켄터키 주 머서 출생

1891년 미주리 주 풀튼 웨스트민스터대학 수학

1895년 켄터키 주 루이빌의과대학 수학

1898년 쿠바 전쟁 군의

1904년 한국 전주진료소 도착

1905년 익산 목천동에서 상해 입음

1906년 상해 후유증으로 귀국

1909년 한국 재입국 목포 중심 활동

1910년 여동생 밀러 목포 합류 봉사

1911년 풍토병 감염 귀국

1911~18년 한국 의료지원 호소 미국 순회

1918년 5월 9일 별세


포사이드가 '나환자'를 대하는 것을 보고 놀란 최흥종(독립운동가)은 깡패짓을 버리고 개과천선하게 된다. 


포사이드 의료활동에 충격 받은 독립운동가 최흥종

구한말 건달패 최망치. 이 ‘망치’라고 불리는 불량 청년은 다름 아닌 독립운동가 최흥종(1880~1966)이다. 목사이자 조선노동공제회·신간회 광주지회장을 역임한 사회운동가이기도 했다.

그가 개과천선한 것은 의사 포사이드로부터 받은 충격 때문이기도 했다. 20세기에 막 들어서 광주 양림동(현 호남신학대학 캠퍼스 동산 아래)에 미국남장로회 광주선교부가 조성되기 시작했는데 왈패 최망치가 건축 현장에서 훼방을 놓았다.

그러다 그곳 김윤수 집사의 겸손한 태도를 보면서 기독교에 호기심을 가졌고 급기야 유진 벨(1868~1925)와 친해지면서 스승처럼 따랐다. 그 유진 벨이 1909년 4월 초 최흥종에게 광주로 들어오는 포사이드를 마중 나가 모시고 오라고 했다.

그 포사이드를 도상에서 만났는데 그가 나환자 여인을 금쪽같이 대하며 치료를 해주고 섬기는 것을 보고 자신도 나환자를 위해 살겠다고 결심했다. 당장 그는 양림동 임시 나환자촌에서 몰려드는 환자의 피고름 빨래하며 그들을 도왔다. 그리고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봉선동 땅을 기부, 나환자전문병원 설립에 이바지한다. 나환자 치료시설 확보를 위해 광주~서울을 걸어 호소하는 ‘구라대행진’을 하기도 했다.

1937년 조선나병환자구제회를 창립했고 무등산 계곡에서 병자·빈민과 공동체 생활을 하기도 했다.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전정희 편집위원 lakajae@kukinews.com
전정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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