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할머니로 변신한 양준모 “열정은 나의 힘” [쿠키인터뷰]

영국 할머니로 변신한 양준모 “열정은 나의 힘” [쿠키인터뷰]

기사승인 2022-10-22 06:00:25
뮤지컬 배우 양준모. 굿맨스토리·샘컴퍼니

인간 본성에서 선과 악을 분리하려는 과학자(‘지킬 앤 하이드’), 가면으로 흉측한 외모를 가린 괴신사(‘오페라의 유령’), 빵 한 조각을 훔친 죄로 교도소에 갇힌 비운의 사내(‘레 미제라블’), 제국의 유력 정치인을 총살한 독립운동가(‘영웅’). 뮤지컬 배우 양준모가 지난 20년동안 무대에서 연기한 인물들이다. 낮고 묵직한 음성과 선 굵은 외모는 그를 근엄하고 진중한 배역으로 자주 데려갔다. 이런 그가 지난 8월말 개막한 뮤지컬 ‘미세스 다웃파이어’에서 ‘19금 농담’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스코틀랜드 출신 할머니를 연기한다. 말 그대로 깜짝 변신이다.

“양준모의 도전이라는 얘기를 많이 들었어요. 하지만 저는 특별하게 생각하지 않았어요.” 지난 7일 서울 잠실동 샤롯데씨어터 근처 카페에서 만난 양준모는 덤덤하게 말했다. 코미디 연기와 여장 모두 이번이 처음이지만 “작품을 고를 때 그런 점이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고 했다. 그가 ‘미세스 다웃파이어’에서 눈여겨 본 건 이야기와 메시지였다. 지난 1994년 개봉한 동명 영화를 각색한 ‘미세스 다웃파이어’는 이혼 후 보모 할머니로 분장해 자녀들에게 다가가는 다니엘을 통해 ‘사랑이 있는 한 가족은 언제나 연결된다’는 주제의식을 전한다.

뮤지컬 ‘미세스 다웃파이어’ 공연 장면. 샘컴퍼니

“나와 정반대인 다니엘, MBTI부터 바꾸자고 생각했죠”


과묵하고 수줍음 많은 양준모와 달리 다니엘은 천방지축 철부지 중년이다. 직업은 성우지만 애드리브를 남발하다 해고당하기 일쑤다. 홀로 가장 역할을 하던 아내 미란다는 “다니엘은 인생 자체가 장난”이라며 이혼을 통보하고 양육권을 가져간다. 양준모는 “연습 시작 전 ‘나 자신을 바꿔야 한다. MBTI(성격 유형)부터 바꾸자’고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었다”고 했다. 공연에서 성대모사, 랩, 탭댄스, 루프 스테이션 연주까지 소화한다. 연습실에 들어가면 일단 탭슈즈부터 신고 ”주변 사람들이 시끄럽다고 할 정도”로 연습에 매달렸다. 몸무게도 10㎏이나 줄었다고 한다. 같은 역할로 캐스팅된 배우 정성화에게 개그맨 이선민, 조훈을 소개받아 코미디 호흡도 배웠다. 덕분에 “경험해보지 않아서 생기는 어려움은 없었다”고 자신하는 경지에 이르렀다.

배우들만 열정을 불태운 게 아니다. 양준모는 “제작진 모두 ‘미세스 다웃파이어’에 애착을 많이 느낀다”고 했다. 작품을 번역한 황석희 번역가는 연습 첫날 자기 전화번호를 책상에 붙여두고 ‘궁금한 게 있으면 언제든 연락하라’고 했다. 커튼콜 땐 “핀 조명을 움직이는 스태프들이 덩실덩실 춤추는 게 보인다”고 할 만큼 모든 제작진이 공연을 즐기고 있다. 유쾌한 분위기는 객석으로도 전염돼 공연 내내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음악과 이야기가 주는 즐거움이 있어요. 그래서 모두들 ‘미세스 다웃파이어’를 사랑하나 봐요. 대본도 촘촘하게 잘 쓰였어요. 에피소드들이 서로 그물처럼 얽혔고, 대사 마다 작가의 의도가 담겼죠. 배우가 억지로 끌고 가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작품입니다.”

‘미세스 다웃파이어’ 공연 장면. 샘컴퍼니

전처 홀린 매력…양준모가 본 다웃파이어는

극중 다니엘은 파탄 난 가족을 되돌리려 기막힌 아이디어를 낸다. 분장사로 일하는 형과 형 남편의 도움을 얻어 할머니로 변장한다. 이후 다웃파이어라는 가짜 이름을 내세워 전처 미란다의 집에 돌봄 도우미로 취업한다. 전처에겐 골칫거리, 큰딸에겐 아픈 손가락 같던 다니엘과 달리, 다웃파이어는 신들린 말발과 솜씨 좋은 가사 능력으로 가족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양준모는 다웃파이어의 매력으로 “공감 능력”을 꼽았다. 하지만 이것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능력은 아니라고 봤다. “다니엘이 절박하게 노력”한 결과라는 분석이다. 그는 “다니엘일 때 보지 못한 미란다의 마음을 다웃파이어가 어루만질 수 있었던 건, 다니엘이 그만큼 절박함을 갖고 노력했기 때문”이라며 “다웃파이어를 연기할 때도 본질은 다니엘”이라고 설명했다.

그래서일까. 요즘 양준모는 다웃파이어로 분장한 채 뱉는 마지막 대사에서 자꾸 울컥한다고 했다. “함께 캐스팅된 (임)창정이 형이 마지막 장면에서 눈물이 날 것 같다고 했을 땐 이해를 못했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저도 그래요. 미란다와 이혼하는 장면부터 감정이 주체가 안 돼요.” 2009년 작곡가 맹성연과 결혼해 슬하에 딸을 둔 그는 “극중 막내 딸 역할을 하는 배우가 내 딸과 비슷한 나이”라며 “어린이 배우들이 우리(성인 배우)보다 더 잘한다. 아이들이 공연을 즐기는 모습을 보며 나도 많이 배운다”고 말했다.

배우·연출·제작자…“열정과 설렘이 원동력”

양준모는 일명 ‘n잡러’다. 뮤지컬 배우로 활동하면서 오페라 ‘리타’를 연출하고, 뮤지컬 ‘포미니츠’를 제작했다. 몇 년 전부터 대학 때 전공한 성악 레슨을 다시 받기 시작해 2018년 오페라 무대에도 섰다. 양준모는 “열정과 설렘이 원동력”이라고 했다. 도전은 양준모가 20년 가까이 활동하며 뜨거움을 잃지 않는 비결이기도 하다. 2004년 뮤지컬 ‘금강’으로 데뷔해 ‘지킬 앤 하이드’ ‘스위니 토드’ ‘레 미제라블’ 등 대극장 뮤지컬 주연을 섭렵한 그는 “즐기지 않으면 남의 인생을 표현할 수 없다”고 믿는다. 그는 ‘미세스 다웃파이어’를 끝낸 뒤 자기 안에 불을 지필 도전을 이어간다. 서울 행촌동에 있는 오래된 가옥 딜쿠샤에 관한 창작 뮤지컬을 제작할 계획이다. “100년 가까이 무너지고 없어질 위기를 버티면서 자리를 지킨 집이에요. 그곳을 거쳐 간 사람들의 이야기가 궁금했어요. KBS에서 딜쿠샤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만든 작가님이 대본을 쓰고, 연말엔 리딩 공연을 하려고요. 쉽지는 않겠지만 잘해보려고 합니다.”

이은호 기자 wild37@kukinews.com

이은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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