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올빼미’(감독 안태진)엔 25년 차 배우 유해진의 새 얼굴이 담겼다. 소시민부터 인텔리 악역까지, 너른 역할을 맡아온 그가 조선시대 왕 연기에 처음 도전했다. 2005년 영화 ‘왕의 남자’(감독 이준익)에서 광대 육갑을 연기한 그는 올해 ‘올빼미’에서 인조 역으로 새로운 모습을 보여준다. ‘왕의 남자’ 조감독을 맡았던 안태진 감독과 함께 선보이는 신작이다. 개봉 전 서울 삼청동 한 카페에서 쿠키뉴스와 만난 유해진은 ‘올빼미’에 대해 “연극 무대에 서는 마음으로 임한 작품”이라고 자평했다.
극 중 유해진은 인조로서 근엄한 모습부터 불안감, 저열함, 열등감 등 여러 감정을 표현한다. 병자호란 이후 배경인 ‘올빼미’에서 인조는 불안정하다. 히스테리가 가득해 구안와사로 고통받고, 청나라에서 돌아온 아들 소현세자(김성철)를 은근히 견제하며 불안 증세를 보인다. 그가 가진 트라우마와 욕망은 극 전반에서 기형적으로 작동한다. 유해진은 얼굴 근육까지 활용해 신경쇠약에 시달리는 인조를 섬세히 그려냈다. 손으로 용안을 감싸고 거친 눈빛을 보여주는 연기가 인상적이다. 왕 역할과 잘 어울렸다는 기자의 말에 유해진은 “그런 말은 크게 해 달라”며 호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처음으로 왕을 연기한 만큼 작품에 임하기 전 고민이 깊었단다.
“왕 역할을 제안받았을 땐 ‘그래, 할게’라고 흔쾌히 답했어요. 하지만 점점 두려움이 생기더라고요. 관객들이 제게 가진 친숙한 이미지가 있잖아요. 인조 역할이 잘 와닿지 않거나 저 때문에 극에 몰입하지 못하면 어쩌나 싶고…. 가장 걱정한 건 첫 등장 신이었어요. 원래는 제가 갑자기 나오는 장면이었어요. 관객에게 왕이 된 유해진을 받아들일 시간을 줘야 한다는 생각에, 제 모습이 서서히 보이는 장면으로 방향을 틀었어요.그래서 발 뒤에 있던 제 모습이 서서히 보이는 것으로 방향을 틀었어요. 시사회 때 저를 보고 웃는 분이 없어서 다행이다 싶었죠.”
두려움을 떨쳐낸 비결은 간단했다. 장면 하나하나에 집중하는 것. 여러 부담에도 ‘올빼미’를 택한 건 이야기의 힘이 컸다. “쫄깃한 재미가 있었어요. 물론 왕을 제안해서 좀 더 호기심이 생기긴 했는데….” 특유의 입담에 기자들 사이에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유해진이 연기한 인조는 그동안 사극에서 볼 수 있던 왕과는 사뭇 다르다. 다르게 보이려고 의도한 결과다. 유해진은 “전형성을 깨고 싶다는 마음으로 접근하진 않았다”면서 “‘인조라면 이때 이러지 않았을까?’를 생각하곤 했다”고 설명했다. 역사가 아닌 영화 속 인조에 접근한 만큼 스릴러 장르에 꼭 맞는 ‘올빼미’만의 인조가 탄생했다.
유해진은 인조를 연기하며 연극 무대로 돌아간 기분을 느꼈다. 세자빈 강빈(조윤서)과 마주하는 장면이 특히 그랬다. ‘올빼미’의 큰 전환점이 되는 신이다. 유해진은 “단상에서 내려올 때부터 인조가 내뱉는 모든 대사까지 연극 무대에 서던 때를 떠올리게 했다”면서 “대사 하나하나에 신경 썼다. 내가 하는 말을 주변 인물이 듣게 할지, 스크린 너머의 관객만이 알아듣게 할지도 고민했다”고 설명했다. 해당 장면에서 인조는 무대 위에서 에너지를 쏟듯 굵직한 감정을 토해낸다. 유해진은 “연극 무대에 서던 경험이 큰 자산으로 남은 걸 느꼈다”며 감회에 젖은 모습을 보였다.
유독 ‘왕의 남자’가 생각나던 작품이다. 당시 조연과 조감독이던 유해진과 안태진 감독은 17년이 지난 뒤 주연과 감독으로 재회했다. 일부 장면은 ‘왕의 남자’를 찍던 부안 세트장에서 촬영했다. “무덥던 여름에 돌바닥에서 납작 엎드리던 게 엊그제 같은데 이번엔 위에서 누군가를 내려다봤다”고 회상하던 유해진은 “관광객이 아닌 배우로서 이 세트장에 다시 올 수 있어 다행이라 생각했다”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곤룡포를 입어보니 뭐가 된 기분이긴 하더라고요. 가만히 있다가도 ‘거 참, 내가 왕을 다 하네’라며 혼자 피식 웃곤 해요. 하하. ‘올빼미’는 마음의 준비를 참 많이 한 작품이었어요. 심리적으로도 진지하게 접근하고, 목소리 톤과 표현 수위에 대해서도 고민을 거듭했죠. 저는 그저 관객들이 재밌게 보면 좋겠어요. 다른 건 생각도 못해봤어요. ‘올빼미’는 신선한 설정과 쫀쫀한 긴장감이 매력적인 영화거든요. 제겐 도전이었던 이 작품이 관객에겐 행복한 기억으로 남길 바랍니다.”
김예슬 기자 yeye@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