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뜨겁고 아름답고 서글프다 [쿡리뷰]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뜨겁고 아름답고 서글프다 [쿡리뷰]

기사승인 2022-11-24 06:00:09
뮤지컬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공연 장면. 쇼노트

영국 대문호 셰익스피어의 걸작 ‘로미오와 줄리엣’. 오랜 세월 반목해온 두 가문 청춘 남녀의 비극적 사랑은 후대 예술가에게 끊임없이 영향을 줬다. 지난 16일 개막한 뮤지컬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도 ‘로미오와 줄리엣’에 영감을 받아 탄생한 작품이다. 사사건건 부딪치는 이민자 집단과 그 안에서 사랑을 키운 남녀를 통해 사랑과 화합의 가치를 역설한다.

이야기는 1950년대 빈민들이 모여 사는 미국 맨하튼 서부지역을 배경으로 펼쳐진다. 이곳을 주름잡던 갱단 제트파는 신진 세력인 샤크파를 눈엣가시로 여긴다. 샤크파도 제트파가 못마땅하긴 마찬가지다. 만나기만 하면 으르렁대는 두 집단 사이에 금지된 사랑이 싹튼다. 주인공은 한때 제트파 일원이던 토니와 샤크파 우두머리의 동생 마리아. 짧지만 강렬했던 두 사람의 만남은 곧 두 세력의 전쟁으로, 씻을 수 없는 비극으로 이어진다.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는 1957년 미국 브로드웨이에서 초연돼 60년 넘게 전 세계에서 리메이크됐다. 뉴욕 필하모닉 최연소 음악감독으로 유명한 레너드 번스타인이 작곡했고 ‘브로드웨이의 아버지’로 불리는 스티븐 손드하임이 가사를 썼다. 연출은 전설적인 안무가 제롬 로빈스가 맡았다. 한국에서는 1997년부터 2007년까지 세 시즌 공연했다. 15년 만에 돌아온 네 번째 시즌에선 김준수·박강현·고은성(이상 토니), 한재아·이지수(이상 마리아) 등이 캐스팅됐다.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공연 장면. 쇼노트

세력으로 자기 존재 의미를 증명하려는 젊은이들의 치기는 군무를 타고 뜨거운 에너지를 전달한다. 배우들은 말 그대로 몸을 던져 춤을 춘다. 모던 발레부터 라틴 댄스까지 다양한 장르를 소화하며 시선을 잡아끈다. 샤크파와 제트파가 부딪치는 무도회 장면은 백미다. 이글대는 혈기, 두 집단 간 팽팽한 긴장이 춤으로 분출된다. 쇼노트 관계자는 “제롬 로빈스에게 사사한 공식 후계자 훌리오 몽헤가 한국에 와 직접 오디션을 심사했다”며 “해외 프로덕션에 참여한 경험을 토대로 작품에 필요한 안무를 완벽하게 소화할 수 있는 배우들로 선발했다”고 귀띔했다.

증오의 고리를 끊는 사랑 이야기는 아름답고 숭고하다. 제트파 원년 멤버였던 토니는 갱단에서 손을 씻고 새 삶을 꿈꾼다. 마리아는 자신들 때문에 싸움이 벌어질까 마음을 졸인다. 증오가 전쟁을 낳고, 복수가 복수를 잉태하는 시대. 토니와 마리아는 “용서의 마음 배우며 새롭게 살아갈 날들”(노래 ‘썸웨어’)을 꿈꾼다. 두 사람의 순수함과 아름다움은 훗날 벌어질 비극을 더욱 가슴 아프게 만든다. 샤크파 리더 베르나르도의 여자친구인 아니타는 두 주인공만큼이나 돋보인다. 유머와 카리스마로 관객을 휘어잡을 뿐 아니라, 슬픔과 분노를 뛰어넘는 사랑의 위대함을 보여준다.

무엇보다 ‘로미오와 줄리엣’을 현대로 가져와 동시대적 메시지를 전하는 통찰력이 돋보인다. 제트파와 샤크파는 미국 사회로 흡수되지 못한 비주류다. 푸에르토리코에서 돈을 벌러 미국에 온 샤크파는 유색 인종이라는 이유로 매사에 차별받는다. 폴란드 출신 이민 2세대인 제트파도 사정은 별반 다르지 않다. 가난과 학대에 방치된 채 길거리를 전전한다. 서부지역을 관리하는 슈랭크 형사는 “깡패, 쓰레기”라며 이들을 경멸한다. 작품은 인종 분열, 세대 갈등, 계급 격차를 모두 아우르며 증오로 분열된 현대 사회를 돌아보게 한다. 공연은 커틀콜로 완성된다. 마침내 화합한 제트파와 샤크파를 뒤로 하고 토니와 마리아는 평화롭게 무대를 떠난다. 그 뒷맛은 아련하고 서글프다. 공연은 내년 2월26일까지 서울 충무아트센터에서 이어진다.

이은호 기자 wild37@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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