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필리핀 아길레스. 한눈에 봐도 불량스러운 두 사내가 시답지 않은 대화를 주고받는다. “권무십일홍이라고 아세요, 형님? 꽃이 열흘 동안 붉을 수 없다. 그런 뜻이죠.” “권무가 아니고 화무십일홍. 꽃을 권력에 비유한 말이야, 인마. 책 좀 봐. 권력이고 인생이고 다 무상하다, 이런 뜻이야.” 대화는 복선이다. 잠시 뒤 형님이라 불린 사내가 미국 연방수사국에 붙잡힌다. 혐의는 살인. 사내는 욕지거리를 내뱉는다.
배우 최민식이 주인공으로 출연하는 디즈니+ 오리지널 ‘카지노’가 시즌1 반환점을 돌았다. 필리핀에서 카지노의 왕으로 살던 남자가 모든 것을 잃고 목숨 건 게임에 복귀하는 이야기를 그린 드라마다. 1~4회는 197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 여러 시간대를 오가며 차무식(최민식)이 필리핀 카지노 거물로 떠오르는 과정을 보여준다. 화면 바깥까지 담배 냄새가 옮겨오는 듯한 ‘아저씨 느와르’에 진저리칠 때쯤, 정 붙이기 어렵지만 미워할 수도 없는 캐릭터가 슬그머니 고개를 든다.
차무식이 그렇다. 툭하면 감옥에 들락거리는 아버지 아래서 가난하게 자란 그는 부산에 카지노 바를 열어 떼돈을 번다. 건달의 신이 도우사, 국세청 조사를 피해 건너간 필리핀에서도 카지노 사업에 발을 들여 승승장구한다. 그는 도무지 속내를 알 수 없다. 이름처럼 무식하고 어리숙해 보이다가도, 느물대며 센 척할 땐 구역질이 절로 난다. 영화 ‘범죄와의 전쟁: 나쁜 놈들 전성시대’(감독 윤종빈) 속 최익현에게서 비장함을 덜어낸 느낌이랄까. 기세로 상대를 제압하고 충심으로 보스를 감동케 하며 한국형 깡패의 비범함을 보여준다.
차무식의 불우한 유년기와 화려한 청년기를 그린 첫 화는 깡패물의 전형이 반복되는 듯해 흡인력이 떨어지지만, 차무식이 필리핀에 입성한 후로는 긴장감이 붙는다. MBC ‘사랑과 이별’ 이후 24년 만에 드라마에 출연하는 최민식은 가히 ‘카지노’의 치트키(상황을 유리하게 이끄는 장치)라 부를 만하다. 때로 징그럽고 때론 지질한 차무식을 매력적으로 그려낸다. 차무식 어머니 이숙자 역의 배우 배해선은 자칫 빤하게 보일 캐릭터에 생동감을 불어넣는다. 얼결에 연행된 차무식을 보며 “네가 어쩌다가 빨갱이가 됐노”라고 흐느낄 땐 웃음을 터뜨리지 않을 도리가 없다. 메가폰을 잡은 강윤성 감독(영화 ‘범죄도시’ ‘롱 리브 더 킹: 목포 영웅’ 연출)은 필리핀 카지노 주인 등을 취재해 실화와 허구를 뒤섞어 ‘카지노’의 세계를 만들었다.
‘카지노’는 루크 강 월트디즈니컴퍼니 아태지역 총괄 사장이 2023년을 이끈 콘텐츠 중 하나로 꼽을 만큼 일찍부터 주목받은 작품이다. 제작비로 약 200억원이 든 대작이기도 하다. 영화 ‘범죄도시’와 ‘롱 리브 더 킹: 목포 영웅’을 연출한 강윤성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다. 지난달 30일 공개된 넷플릭스 오리지널 ‘더 글로리’에 화제성은 밀리지만, 조용히 입소문을 타고 있다. 3일 OTT 순위 사이트 플릭스 패트롤에 따르면 ‘카지노’는 4화와 공개된 지난달 30일부터 한국 디즈니+ 드라마 시청 시간 1위를 달리고 있다. 타이완, 인도네시아, 싱가포르, 홍콩 등 한류에 관심 많은 아시아 지역에서도 시청 시간 톱10에 들었다.
4일 공개되는 5화에선 JTBC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와 영화 ‘범죄도시2’(감독 이상용)로 주가를 높인 배우 손석구가 필리핀 제1대 코리안 데스크(외국에서 일어나는 한인 관련 사건을 전담하는 경찰 부서) 오승훈으로 합류한다. 4화 마지막에 등장한 고 회장(이혜영)의 이야기도 펼쳐질 예정이다. ‘카지노’ 관계자는 3일 쿠키뉴스와 통화에서 “‘카지노’는 세계 최대 규모 콘텐츠 평점 사이트 IMDb에서 8.4점을 얻었다. 비슷한 시기 공개된 한국 오리지널 시리즈 중 가장 높은 점수다.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호평이 많아져 입소문을 타고 있다”면서 “5화부터는 차무식 등이 한국인 VIP를 대상으로 판을 짜는 이야기가 나오며 사건 규모가 커진다. 오승훈, 고 회장, 진영희(김주령) 등 새로운 캐릭터들이 차무식과 얽혀 흥미를 돋울 것”이라고 귀띔했다.
이은호 기자 wild37@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