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딸 백두혈통 4대...신앙인, 독립운동가 김형직 가계의 돌연변이

김정은 딸 백두혈통 4대...신앙인, 독립운동가 김형직 가계의 돌연변이

[MZ세대를 위한 시사 漢字 이해] 피(血)의 큰 줄기(統) '혈통'
산 기도 시간에 약지 끊어 혈서 '대한독립' 쓴 김일성 아버지 김형직
김형직 '숭전' 동창 고 배민수 목사 "김일성 본명 김성주는 '불기둥'이란 뜻"

기사승인 2023-02-13 10:00:39
북한이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딸 김주애 ‘우상화’에 나선 정황이 포착되고 있다.

12일 조선중앙TV에 따르면 지난 8일 개최된 인민군 창건 75주년 기념 열병식 녹화중계 화면에 김주애가 타는 것으로 보이는 `백마`가 등장했다.

중앙TV는 "우리 원수님 백두전구를 주름잡아 내달리셨던 전설의 명마, 그 모습도 눈부신 백두산군마가 기병대의 선두에 서있다"며 "사랑하는 자제분께서 제일로 사랑하시는 충마가 그 뒤를 따라 활기찬 열병의 흐름을 이끌어간다"고 보도했다.

여기서 `백두전구를 주름잡아 내달리셨던 전설의 명마`는 김 위원장이 하노이 북미정상회담 결렬 8개월 만인 2019년 10월 타고 백두산 일대를 달렸던 말을 가리킨다.

‘사랑하는 자제분’은 김주애를 지칭하는 표현인데, 김주애가 백두혈통(血統) 혈통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백마를 거느리고 있으며 그의 말이 열병식에 참여했음을 공개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김주애가 군 통수권자인 김 위원장의 딸이자 정통성 있는 백두혈통 4세대임을 공표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정부 관계자들은 김주애를 후계자로 평가하지는 않고 있다. (이하 생략·출처 한국경제TV)
그래픽=연합뉴스

 □ 血統(혈통)=피(血)의 큰 줄기(統)

최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딸 김주애(10)가 북한 언론에 자주 등장해 북한 정권의 세습 구도를 드러낸 것 아니냐는 추측을 낳고 있다.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 김주애로 이어지는 후계 구도의 가능성을 열어 두고 상황을 예의 주시하고 있다”는 것이 우리 통일부 관계자의 얘기다. 소위 백두혈통(白頭血統)의 권력 대물림이다.

‘백두혈통’은 김일성 직계가족을 일컫는 말로 김일성과 그의 부인 김정숙이 백두산(白頭山) 인근 지역에서 항일독립운동을 했다며 김정일 집권 이후 신격화를 위해 사용 중인 용어다.

우리 민족이 백두산을 성산(聖山)처럼 여겨왔으므로 북한 정권이 이를 김일성 가계에 적용하여 권력 강화에 이용했다..

사실 그들이 말하는 백두혈통은 돌연변이에 가깝다. 김일성 아버지 김형직(1894~1926), 즉 김정은의 증조부는 북한 공산주의 정권이 불구대천지 원수로 여기는 ‘미국 기독교 앞잡이’였다. 미국북장로회 해외선교부가 운영하는 평양숭실학교(대학과정)를 졸업한 교회 장로이기도 했다.
김일성 아버지 김형직. 김정은의 증조부. 북한 제작 초상화.
김일성 어머니 강반석. 김정은의 증조모. 북한 제작 초상화.

김정은의 증조모 강반석은 ‘반석=베드로’이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 한국 개신교 초기 모태 신앙 가계이다. 이런 혈통(血統)이 김일성이라는 돌연변이로 변질되어 민족을 피로 물들게 했다니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사실 그들의 논리대로라면 증조부모는 부관참시라도 해야 한다. ‘인민의 적’이므로 아들이 아버지를 고발하는 북한식 선전선동 영화의 한 장면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북한은 1988년 평북 후창군을 ‘김형직군’으로, 평양사범대학을 김형직사범대학 등으로 개칭할 정도로 숭배의 대상으로 삼았다. 그의 동상과 반신상 등이 곳곳에 있다.

“1913년 어느 주일날, 나는 김형직과 덕순과 함께 숲으로 기도하러 들어갔다. 그때 형직이 한 가지 제안을 했다. 혈서(血書)를 쓰자는 것이다. …형직은 날이 번뜩이는 작을 칼을 그의 약지에 대고 그었다. 베인 상처에서 붉고 끈끈한 혈액(血液)이 물컹물컹 흘러나왔다. 우리는 침을 꼴딱 삼키면서 그의 피가 하얀 천위에 글자로 어우러지는 것을 보고 있었다. 천위에 커다랗게 ‘대한독립’이라는 글과 ‘김형직’이라는 이름이 붉게 아로 새겨졌다…형직은 나보다 두세 살 위였다.”

이 생생한 장면은 독립운동가 배민수(1897~1968) 자서전에 나온다. 배민수는 김형직과 평양숭실학교 동기동창으로 두 사람은 재학 중 조선국민회를 조직, 항일독립투쟁을 벌였고 함께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김형직은 만주로, 배민수는 함북 성진으로 가서 항일독립운동을 지속한다.

1946년 배민수의 기억.

“…김일성이 다름 아닌 1918년 독립운동 때 나와 같이 평양 감옥에 있었던 친구 김형직의 아들이라는 놀라운 사실…형직은 10개 월 간의 형기를 마치고 그의 가족과 함께 만주로 가 버렸다.

그리고 형직은 만주인 폭도에 의해서 목숨을 잃었다. 그 아들 일성은 모스크바에 가서 훈련을 받았다. 1950년 미국 잡지 ‘라이프’는 김일성의 본명이 알려져 있지 않다고 했으나 나는 그의 이름을 그가 네다섯 살 밖에 안됐을 때부터 알고 있었다.

그의 본명은 김성주(金 聖柱)였고 ‘불기둥’이라는 뜻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조국을 위해 눈물로 기도하던 가장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어쩌다 그 신실한 가정에서 그런 악당이 나게 됐을까. 나는 형직의 친구로서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을 느꼈다. 차라리 북한 공산당의 괴수 김일성이 내가 생판 모르는 자였다면 이렇게까지 한탄스럽지 않았을 것이다.”

김형직의 친구 배민수는 청주 의병장 배창근의 아들로 평양과 성진에서 항일독립운동을 하다 몇 번씩 옥고를 치루고 월남하여 지금의 남대문시장 인근 성도교회를 설립했다. 미 군정청 통역을 했으며 6·25전쟁 직후 농민운동가로 계몽 및 교육에 힘썼다. 1993년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지금의 경기도 고양시 연세대 삼애캠퍼스가 배민수가 세운 농민학교 ‘삼애농업기술학원’ 부지로서 그가 영면 직전 연세대에 기부했다. 그 기부 목적은 ‘우리 농업 발전’이었다. 한데 땅값이 천정부지로 오르면서 사용 목적을 바꾸려는 통에 내부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피       
큰 줄기

전정희 편집위원 lakajae@kukinews.com
전정희 기자
lakajae@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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