꺾이지 않는 음악, 박효신은 삶을 담았다 [불멸의 베토벤①]

꺾이지 않는 음악, 박효신은 삶을 담았다 [불멸의 베토벤①]

기사승인 2023-02-17 09:00:06
뮤지컬 ‘베토벤’ 공연 실황. EMK뮤지컬컴퍼니

죽어서도 끝나지 않는 운명이 있다. 뮤지컬 ‘베토벤’이 펼쳐내는 작곡가 루드비히 반 베토벤의 운명이 그렇다. 베토벤 사후 200여년 만에 만들어진 이 작품은 베토벤의 음악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불멸하는 음악을 증명한다. 모두에게 추앙받았으나 진실로 사랑받진 못했던 음악가는 관객이 보내는 연민과 공감 속에서 비로소 평화를 찾는다.

때는 베토벤이 40대 초반이던 1810년. 온 유럽이 찬양한 천재 음악가는 괴팍하고 자존심이 강하다. 자신을 후원하는 귀족에게도 고개 숙일 줄을 모른다. 귀족들과 입씨름 벌이느라 연주회를 망친 어느 날, 베토벤은 처음으로 자신을 이해하는 여자를 만난다. 이름은 안토니 브렌타노. 명망 높은 귀족 가문 출신으로 16세 때 사업가와 정략 결혼해 세 아이를 뒀다.

베토벤과 안토니는 사랑에 빠진다. 단순한 로맨스는 아니다. 둘은 결핍과 슬픔으로 서로를 알아본다. 안토니는 사랑 없는 결혼에 숨이 막힌다. 운명에 갇히기는 베토벤도 마찬가지. 그는 유년기의 상처와 난청의 비통함을 음악으로 승화하고자 한다. 이런 그를 보며 안토니는 노래한다. “깊어진 슬픔이/ 나와 같아” 베토벤도 화답한다. “만약 당신에게/ 자유가 있다면…” 극본을 쓴 미하엘 쿤체는 “‘베토벤’은 사랑 이야기지만 흔한 멜로는 아니다”라며 “상처받은 영혼이 다른 사람에게 구원받는 이야기를 만들고 싶었다”고 했다.

이야기는 사랑과 음악을 동력 삼아 흐른다. 안토니를 만날 무렵 베토벤은 청력을 잃는다. 지휘 도중 박자를 놓쳐 연주회를 망치기 일쑤다. 그러나 이 시기 베토벤은 운명 교향곡 등 숱한 역작을 써낸다. “베토벤은 청력을 잃는 위기에도 안토니에게서 새롭게 힘을 얻었고, 이를 통해 계속 음악을 만들었다”(쿤체)는 해석이다. 베토벤은 생전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적었다. “나는 운명의 목덜미를 움켜쥘 작정이라네. 운명이라는 놈이 나를 굴복하게 하거나 완전히 으스러뜨리진 못할 거야.”

‘베토벤’에서 주인공 루드비히 반 베토벤을 맡은 배우 박효신. EMK뮤지컬컴퍼니

배우 박효신이 연기하는 베토벤, 일명 ‘쿄토벤’은 보여준다. 고통과 절망에도 무릎 꿇지 않는 자의 꼿꼿한 품위를. 또한 들려준다. 상처투성이가 되고도 음악에 삶을 헌신한 자, 그만이 부를 수 있는 치유의 음악을. 가시밭길 위에서도 “잇츠 고너 비 올라잇”(It’s gonna be alright·다 잘 될 거야)을 외치던 박효신은 베토벤에 자기 자신을 투영한 듯하다. “고통도 절망도 날 막지 못해 / 자유, 그것이 나의 운명”이라고 노래하는 대표곡 ‘너의 운명2’에서, 박효신은 가사 한 소절 한 소절에 인생을 담아 사자후를 토해낸다.

신들린 가창력으로 이미 정평이 난 그는 ‘베토벤’에서 작정한 듯 목소리를 악기처럼 연주한다. 그 음성은 때로 바이올린처럼 섬세하며 아름답고, 때론 비올라처럼 우아하고 신비롭다. 뮤지컬 ‘웃는 남자’의 대표곡 ‘그 눈을 떠’와 같이 고음을 뽐내는 노래는 적지만, 보컬의 다채로움을 비교하면 ‘베토벤’이 한 수 위다. 깊고 단단한 저음부터 힘차고 육중한 고음까지, 박효신은 각 음계에 어울리는 가장 아름다운 목소리를 찾아내 들려준다. 1999년 데뷔한 24년 차 가수는 그렇게 또 한 번 새로운 목소리를 단련해 ‘베토벤’에 입혔다.

목소리로만 감동을 주는 게 아니다. 뮤지컬 ‘엘리자벳’ ‘모차르트!’ ‘팬텀’ ‘웃는 남자’ 등을 거치며 갈고닦은 연기력도 빛을 발한다. 박효신은 운명 앞에 위태롭게 흔들리면서도 끝내 삶을 지켜내는 자의 상처와 결의를 동전의 양면처럼 보여준다. 연기는 커튼콜로 완성된다. 마지막 지휘를 마친 박효신은 무대에 처음 등장할 때 그랬듯 어깨를 웅크리고 뒷짐을 진 채 무대 뒤편으로 걸어나간다. 관객들은 그의 굽은 등에서 베토벤이 생전 짊어졌을 고독과 고뇌의 무게를 가늠한다. 이제 베토벤은 천재 음악가로 추앙받을 뿐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도 이해받고 사랑받는다.

‘베토벤’ 공연 실황. EMK뮤지컬컴퍼니

다만 작품을 향한 반응은 호불호가 갈리는 분위기다. 기실 ‘베토벤’은 약점이 적지 않은 뮤지컬이다. 짧은 구절에 너무 많은 가사를 욱여넣거나, 원곡의 존재감에 메시지가 압도되는 곡들이 많다. 베토벤과 안토니의 심경 변화보다 그들을 둘러싼 외부 갈등에 집중해 사랑보다 불륜이 먼저 보이기도 한다. 무엇보다 두 주인공의 관계를 묘사하는 어휘가 빈약하다. 성애 이상의 사랑을 표현하겠다는 의지는 가상하나, ‘구원’ ‘치유’ 등 일차원적인 단어만 반복해 오히려 관객이 상상할 여지를 제한한다.

헐거워진 고리를 붙드는 건 배우들 몫이다. 1981년생 동갑내기 세 배우 박효신, 박은태, 카이가 베토벤을 연기한다. 안토니는 조정은, 옥주현, 윤공주가 번갈아 맡는다. EMK뮤지컬컴퍼니가 선보이는 다섯 번째 창작 뮤지컬이다. 뮤지컬 ‘엘리자벳’ ‘모차르트!’ ‘레베카’ 등 히트작을 탄생시킨 실베스타 르베이 작곡가와 미하첼 쿤체 작가가 7년간 개발했다. 공연은 베토벤 기일인 다음달 26일까지 서울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이어진다.

이은호 기자 wild37@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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