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을 향한 리스펙트 [안태환 리포트]

타인을 향한 리스펙트 [안태환 리포트]

글‧안태환 의사, 칼럼리스트

기사승인 2023-07-14 14:23:17

행여 데면데면해질까 노파심에서 만나는 모임이 있다. 고향 친구들과의 자리가 그렇다. 불온한 시대, 굳이 표백된 존재로 마주할 대상이 아니거니와 대화는 유쾌하고 무해하다. 술이 한잔 들어가면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일상의 애환은 봇물처럼 터져  나온다. 청중이 되어야 하는 친구들은 울분의 해우소로 제 기능을 다한다. 이번 자리의 격정적 연사는 다른 친구들에 비해 삶의 부침이 심했던 중견기업의 만년 부장이었다. “직장을 다니면서 받는 월급은 너덜 해진 존엄을 부여잡은 대가”라며 주체하지도 못할 술을 연거푸 들이켠다. 그를 보노라니 고달픈 삶이 절절히 배어 나온다.
         
친구에게만 국한된 애환은 아닐 것이다. 생존을 위해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삭막한 일상의 고백으로도 치환될 것이다. OECD 국가 가운데서도 자영업자 비율의 유독 높은 배경에는 직장의 압박감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노동의 정서도 자리하고 있을 것이다. 한국에서 자영업은 은퇴자의 무덤이라는 현실을 알면서도 인생이 속절없이 소진되는 것보다 차라리 자영업을 선택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직장이라는 조직도 창업도 종국에는 사람 사업이기에 관계 속에서의 존재 훼손은 별반 다를 일이 없을 것이다. 그렇게 한국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다수의 사람들이 존엄을 짓밟히며 살아가지만 어쩔 도리가 없다며 소모돼 간다.

에드워드 파머 톰슨은 역저 ‘영국 노동 계급의 형성’에서 피착취자의 단결과 저항이 경제적 이해관계의 기계적 반영만이 아닌 도덕적 정당성, 사회적 인정 요소와 긴밀히 연관되어 있음을 주장한다. 격한 공감을 불러오는 타당한 말씀. 사실 따지고 보면 인간 존엄을 훼손하는 체제나 사회는 인간들이 만들어낸 인위적인 것이며 우월적 속성을 지니고 있다. 어쩔 수 없이 직면한 자연재난도 순리도 아닌 것이다. 인간이 스스로 존엄하다고 느끼는 동기는 결국 이득을 떠난 타인으로부터의 인정과 배려 속에서만 가능한 일인 것이다.

현실은 암담하다. 사람의 향기보다 도처에서 이기주의, 개인주의가 득세한다. 독자생존의 사회적 분위기 속에 공동체는 느슨해졌고 타인에 대한 관계는 더 험악해졌다.  권위주의, 갑질 행위들이 난무한다. 이러한 세속적 욕망들은 경쟁주의를 더더욱 심화 확장시킨다. 그렇게 조직 내에서 경쟁에서 밀린 이들은 자영업으로의 생존의 방향을 전환하는 것이다.  

끝없는 승자독식의 사회는 박탈감에 의한 상실의 늪에 많은 이들을 허우적대게 할 것이다. 경쟁에서 밀린 박탈감은 사회 질서의 동맥경화를 도미노처럼 불러일으킨다. 이는 인성의 황폐화를 가속화시키는 원인으로 자리한다. 선진국 클럽이라는 OECD 국가 중 유독 소중한 생명을 내려놓는 자살자 많은 것은 사회 불안의 증표이며 사회적 경쟁의 공포지수이다. 상생과 공존의 질서를 가로막는 장애를 제어하지 못하는 국가는 미래가 없는 데도 말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사회적 담론은 취약하다. 

한국 영화의 위상을 드높인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은 빈부 격차를 고발해서가 아니라, 빈곤이라는 감각적인 소재로 인간의 예의 없음을 고발했기 때문이다. 지상과 반지하와 깊은 지하의 건축 구조가 상징하는 계급적 위계는 감독 봉준호에 의해 예의 있는 자와 예의 없는 자로 구분된다. 영화가 주는 메시지가 뻔하지 않고 강렬한 이유이다.

영화가 던진 화두에 관해 사람들의 갑론을박은 난해했지만 봉준호의 메시지는 의외로 명료했다. "예의의 경계가 허물어지면 파국이다. 가장 낮은 자까지 리스펙트하라!"였던 것이다. 칸에서 시작해 아카데미까지 공식 석상에서 일관되게 봉준호가 보인 감독으로서의 태도는 타자를 향한 ‘리스펙트’였다. 오늘의 위치를 올려 준 것은 타인의 공덕이라는 사람들의 예의가 많아질수록 사회 공동체에서의 존엄의 가치와 배려의 미덕은 연쇄 반응을 낳을 것이다. 험난한 조직생활에 고단해하는 이들을 위로해 줄 것이다. 

건강을 염려할 만큼 과음하는 친구를 말리는 나에게 “비루해서 마신다” 는 친구의 애절한 술이, 존중받아 가슴 두근거려 마시는 술로 승화되길 고대해본다.
이영수 기자
juny@kukinews.com
이영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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