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의 인생을 파고드는 건 때때로 고독하다고 배우들은 말한다. 인물의 마음과 생각을 통달해야 하는데, 기댈 구석이 많지 않아서다. 단서를 얻을 곳은 인물이 뛰노는 대본과 모든 판을 설계한 감독뿐. 혈혈단신의 마음으로 임하던 여느 촬영장과 영화 ‘밀수’(감독 류승완)가 달랐던 건 모두가 앙상블을 이뤄서다. 베테랑 배우 김혜수는 ‘밀수’를 두고 “처음 느껴본 감정을 선물해 준 작품”이라며 애틋함을 감추지 않았다. 지난 19일 서울 소격동 한 카페에서 만난 김혜수는 “순간에 집중하기보다는 우리 모두가 함께라는 것을 떠올렸다”며 뭉클해했다.
유독 각별한 기억이 많다. 앞서 열린 시사 간담회에서도 김혜수는 현장에서 처음으로 즐거운 행복만 만끽했다고 했다. “촬영 기간 내내 ‘내가 배우 생활을 하며 이런 순간을 다시 맞이할 수 있을까’ 생각했다”고 말할 정도다. 모두와 함께 구슬땀을 흘리며 돈독해진 건 물론이요, 모두의 마음이 일치했다고 느낀 순간이 가득했다. 그는 가장 지척에서 호흡을 맞춘 염정아 외에도 해녀팀을 이룬 박준면, 김재화, 박경혜, 주보비와 줄곧 함께 시간을 보냈다. 현실에서 쌓아 올린 관계성이 극으로 이어지자 자연히 시너지 효과가 생겼다.
“시나리오를 볼 때부터 캐릭터 사이 화합이 관건이라고 생각했어요. 인물들의 관계가 어떻게 발현하고 풀리는지, 얼마나 조화롭게 어울리는지가 재미를 좌우한다고 봤죠. 배우들의 캐릭터 해석부터 류승완 감독님의 대본이 잘 어우러진 덕에 완성도가 높아진 듯해요. 현장 분위기도 한몫했어요. 모두가 역할에 집중하면서도 웃을 여지가 있었거든요. 촬영하며 좋았던 순간을 기록했더니 분량이 한가득 쌓였더라고요. 다들 하나로 똘똘 뭉친 덕이죠.”
김혜수가 맡은 춘자는 그가 연기한 캐릭터 중 “가장 적절하게 상스러운 인물”이다. 생존을 위해서라면 못할 게 없다. 배짱도 두둑하다. 친자매 같던 진숙(염정아)과 물질로 생계를 이어가던 해녀에서 밀수로 뛰어든 배경도 여기에 있다. 춘자는 일련의 사건 후 군천에서 혼자 상경해 밀수업을 이어간다. 그러다 권상사(조인성)로 인해 목숨을 잃을 처지에 놓이자,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군천으로 향한다. 다시 만난 진숙은 춘자를 미워한다. 춘자는 의뭉스럽지만 애틋한 눈빛으로 진숙을 바라본다. 춘자와 진숙의 관계는 ‘밀수’의 중심축을 이루는 주요 요소다.
서로가 밀고 당기는 관계. 김혜수는 춘자와 진숙을 이렇게 정의했다. 그에게 염정아는 연기 동반자이자 기댈 구석이었다. 앞서 열린 시사간담회에서 김혜수는 염정아를 “내가 갖지 못한 면을 가진 배우”라며 “날 보완해 주는 상대를 만나 고무적이었다”고 했다. 두 사람은 적극적으로 의견을 내며 춘자와 진숙에게 입체감을 부여했다. 현장에서 탄생한 명대사도 여럿이다. 류 감독은 끈끈히 조립한 판에서 김혜수는 염정아와 함께 날아다녔다. 힘든 기억은 없었다. 가장 큰 난관이었던 수중촬영도 극복할 수 있었단다. 함께한 팀원들 덕이다.
“의지대로 몸을 움직일 수 없으면 공황이 온대요. 영화 ‘도둑들’(감독 최동훈)에서 수중 장면을 찍다가 그런 식으로 공황 증상을 겪었죠. 이번 작품에서 해녀 역을 맡은 만큼 잘 해낼 수 있을지 염려됐어요. 넷플릭스 ‘소년심판’ 촬영 일정 때문에 수중 훈련에 참여하지 못한 것도 걱정이었어요. 공황도 공황이지만, 팀에 섞이지 못하면 어쩌지 싶었거든요. 막상 훈련에 돌입하니 기우였어요. 팀원들을 보다 보니 어느샌가 제가 공황 증세를 전혀 느끼지 않는 거예요. 처음 경험해 보는 기분이었어요. 팀워크의 힘을 새삼 확인했어요.”
매 작품에 임하기 전 정체성을 고민하는 김혜수에게 ‘밀수’는 자신을 알아가는 새 무대가 됐다. 그는 배우로서 고유성을 찾기까지 오랜 시간을 쏟았다. 스스로가 가지지 못한, 타인의 장점을 부러워하던 시절도 있었다. 고민 많던 시간을 넘어 그는 자신만의 해답을 찾았다. 김혜수는 “연기란 나를 나 자신이 아닌 캐릭터로 드러내는 것”이라면서 “팀의 일원으로 존재하자는 게 내가 내린 답”이라며 웃었다.
“‘이 일을 하는 난 대체 어떤 존재일까’를 매번 고민해요. 이번엔 ‘밀수’가 답을 알려줬죠. 우리라는 집단 속에서 존재하고 있다는 걸 알게 했거든요. 우리는 한 팀이고, 제 정체성은 팀원이라는 확신이 생겼어요. 저는 배우로서 가진 욕망과 개인적인 흥미에 기반해 작품들에 이끌리고, 연기해왔어요. 하지만 이제는 이런 마음이 더욱 커요. 나는 어디까지나 팀원이고, 팀원으로서 누를 끼치지 않고 싶다고요. ‘밀수’가 제게 준 새로운 깨달음입니다.”
김예슬 기자 yeye@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