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만에 부활한 일본 만화 ‘슬램덩크’, 에버랜드 인기스타 푸바오, 히트곡 ‘하입보이’(Hype Boy)의 주인공인 그룹 뉴진스…. 올해 콘텐츠 시장을 강타한 ‘슈퍼 IP(지식재산권)’다. 영화 ‘더 퍼스트 슬램덩크’(감독 이노우에 다케히코)는 500만에 가까운 관객을 모았고, 아기판다 푸바오는 에버랜드 방문객 수를 큰 폭으로 늘렸다. 뉴진스는 데뷔 1년 만에 미국 빌보드 음반차트 정상을 밟았다. 올해 신드롬급 인기를 누린 이들을 관통하는 열쇳말은 ‘덕후’다. 22일 서울 다동 CKL스테이지에 모인 콘텐츠 업계 전문가들은 “오랜 시간 콘텐츠를 이어가고 수익을 창출하려면 ‘덕후’에게 더 많은 재미와 감동을 줘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덕후’의 지갑은 열려 있다
‘덕후’는 하위문화를 전문가 수준으로 파고드는 ‘오타쿠’에서 파생된 단어다. 주로 아이돌 팬덤을 가리킬 때 주로 쓰였으나 최근엔 범위가 넓어졌다. 연예인은 물론, 특정 드라마나 영화, 캐릭터 등을 좋아하는 사람도 ‘덕후’로 분류된다. 혼자서 취미에 몰두하는 일본 오타쿠 문화와 달리 한국 ‘덕후’는 다른 ‘덕후’들과의 교류에 열성적이고 굿즈 등 2차 창작물을 퍼뜨리는 데도 열심이다. 한다혜 서울대학교 소비트렌드분석센터 박사는 이런 현상을 “디깅”(digging·파고들기)이라고 명명했다. “좋아하는 것에 지갑을 여는 디깅 소비가 내년에도 확장할 것”이라는 전망이다. 실제 게임업계를 보면 코로나19 팬데믹 종료 이후 이용자 수는 감소했으나 남은 이용자의 게임 시간이나 소비액은 오히려 늘었다. ‘디깅 소비’가 활발해졌다는 지표다.
이 같은 ‘디깅 소비’는 콘텐츠 IP를 다른 산업과 연결하는 다리가 됐다. 각종 팝업 스토어가 그 본보기다. 인기 IP를 활용한 기념상품이 판매되는 팝업 스토어는 요즘 2030 세대의 새로운 놀이터다. 지난 3일 서울 여의도동 더현대 서울에서 문을 연 푸바오 팝업스토어는 사전 예약이 5분만에 마감됐을 만큼 인기다. “유명 아이돌 팝업스토어는 일주일 만에 수십억대 매출을 낼 정도”(방찬식 현대백화점 IP사업팀 팀장)라고 한다. 박혁태 한국콘텐츠진흥원 미래정책팀 팀장은 “과거엔 미취학 아동 등 어린이를 타깃으로 한 MD가 많았으나 요즘은 20·30대를 타깃으로 한 상품이 많이 제작·유통된다”며 “그동안 어떻게 슈퍼 IP를 제작·확보할 것인가 고민했는데, 이젠 다른 산업과의 연계해 소비자층을 확장하는 방식으로 (IP 관련 전략이) 전개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스태그플레이션에 콘텐츠 소비 더 활발…‘콘덕’ 사로잡아야”
이날 만난 전문가들은 한국 콘텐츠 산업이 글로벌 경기 침체에 국가 성장을 이끄는 퍼플오션(레드오션에서 새로운 기회를 만드는 경영전략)이 될 거라고 예상했다. 고물가, 고금리, 저성장 기조가 계속되면서, 사람들이 여행 등 고비용 여가 활동을 줄이고 비교적 ‘가성비’ 좋은 콘텐츠 소비를 이어갈 것이라는 관측이다. 제작사 사정이 좋지는 않다. 넷플릭스 등 글로벌 OTT가 K콘텐츠에 집중 투자하면서 제작비 규모가 코로나19 이전보다 편당 3~5억원 늘었다. 국내 OTT 업체도 구독자 이탈로 경영난에 빠졌다. 스튜디오N 소속 정윤재 PD는 “앞으로는 양적 성장보다 질적 성장을 더 고민해야 한다”며 “올해 IP의 중요성과 확장 가능성을 확인했으니 앞으로는 이 IP를 어떻게 활용해 새로운 매체로 넓힌 것인가 하는 기획력과 사업 능력이 중요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박 팀장은 “‘콘덕’(콘텐츠 덕후)은 좋아하는 가수나 캐릭터의 작은 움직임과 말 한마디에도 열광하며 지갑을 연다”며 “창작자와 제작사는 ‘콘덕’에게 더 많은 재미와 감동을 주고 ‘덕질’을 지속할 동기를 마련해줄 세밀한 전략을 짜야 한다”고 분석했다.
이은호 기자 wild37@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