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 직원이 고객 통장에 ‘연 3.5% 수익률 확정’ 이런 식으로 펜으로 적어놓은 경우도 있습니다. 적합성 원칙 위반이나 부당권유 금지 의무 위반이 충분히 입증 가능하다고 봅니다” (금감원 출신 법조계 인사)
홍콩 H지수를 기초자산으로 하는 주가연계증권(ELS)에서 수조 원대 원금손실이 기정사실화 되는 모양새입니다. 투자자들은 “안전하다”는 은행 말만 믿고 가입했다면서 불완전판매 가능성을 주장하고 있습니다.시한폭탄 다가온다
ELS란 개별 주식 가격이나 주가지수 움직임에 따라 손익이 결정되는 금융상품입니다. 주가 또는 지수가 떨어지거나 올라도, 미리 정해진 구간 안에서만 움직이면 약정한 수익률을 지급합니다. 중요한 건 미리 정한 수준보다 가격이 내려갈 시 원금 손실이 발생한다는 점입니다.
홍콩증권거래소에 상장된 우량 중국 국영기업 50개로 구성된 홍콩H지수는 2021년 판매 당시 1만~1만2000을 기록했지만 현재는 6000선까지 크게 밀린 상태입니다.
국민의힘 윤한홍 의원실에 따르면 시중은행에서 판매한 H지수 연계 ELS 관련 상품은 지난 8월 말 기준 15조6600억원이 넘습니다. 이 가운데 8조 3000억원 어치가 내년 상반기 만기가 돌아오는데, 절반이 넘는 4조6800억원 어치 규모가 원금 손실 구간에 진입했습니다.
은행들 “2021년 금소법 시행…불완전판매 아닐 것”
금융감독원은 부랴부랴 홍콩H지수를 기초자산으로 한 ELS를 판매한 은행 및 증권사에 대해 실태조사에 나섰습니다. 판매 규모가 가장 큰 KB국민은행에 대해서는 현장점검이 이뤄지고 있습니다.
특히 가입자 중 노령층이 많은 것으로 알려지며 불완전 판매 문제가 제기됐습니다. 고난도 상품을 제대로 설명하지 않고 판 게 아니냐는 것인데요.
금감원장 “은행 정말 책임 없나”…적합성 원칙 들어 반박
이복현 금감원장은 은행의 논리에 정면 반박했습니다. 이 원장은 “아마도 판매 과정에서 자필을 받았거나 녹취한 것 때문에 불완전판매가 아니라는 입장 같은데 금융소비자보호법의 본질적 취지를 살펴보면 그런 말을 쉽게 하기 어렵다”면서 ‘적합성 원칙’을 들었습니다.
금소법 제17조에서는 적합성 원칙에 대해 금융회사가 △소비자 재산상황 △금융상품 취득·처분 경험 등에 비추어 부적합한 금융상품 계약체결 권유를 금지하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 원장은 “ELS와 같은 고위험, 고난도 상품을 다른 곳도 아닌 은행 창구에서 고령자에게 특정 시기에 고액으로 판매했다는 것만으로 적합성 원칙이 지켜졌는지 의구심이 있다”며 “저조차 잘 안 읽히는 수십 장짜리 설명서에 대해 소비자가 ‘네, 네’라고 답변했다고 해서 은행이 아무런 책임이 없는지 생각해야 한다”고 꼬집었습니다.
또 “설명 여부를 떠나 노후보장 목적으로 정기예금에 투자하고 싶어 하는 70대 고령 투자자에게 수십%의 원금 손실이 발생할 수 있는 상품을 권유한 것 자체가 적합성 원칙을 따져야 할 문제”라고 했습니다.
관건은 불완전판매 입증…법조계 “어렵지 않을 수도”
당국이 은행 등의 불완전판매가 이뤄진 것으로 인정하면 투자자는 상품에 투자한 원금 전액이나 일부를 돌려받을 길이 열릴 수 있습니다.
법조계에서는 불완전판매 입증이 의외로 까다롭지 않을 것이라는 의견이 나옵니다. 전직 금감원 출신의 한 변호사에 따르면 홍콩 ELS와 관련한 의뢰인 다수가 투자자 정보 확인서 확인란에 체크하는 절차나, 자필 기재해야 하는 부분에 대해 ‘본인이 한 적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해당 변호사는 “은행에서 ‘기존에 한 번도 손실 난 적이 없다’, ‘앞으로도 수익이 확실하다’는 식으로 설명하면 자본시장법이나 금소법 상 부당권유 금지 위반에 해당하는데, 관련해서 서면이나 카톡 메시지처럼 입증 가능한 증거가 있다는 의뢰인들이 의외로 많다”면서 “입증이 어렵지 않을 것으로 본다”고 말했습니다.
정진용 기자 jjy4791@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