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 지르듯 노래하지 마세요.” JYP엔터테인먼트를 이끄는 프로듀서 겸 가수 박진영은 얼마 전 이은미, 인순이 등 전설의 디바들에게 이렇게 조언했다. 대선배들에게 그가 주문한 건 “목소리를 낮춰 속삭이며 이야기하듯 노래해 달라”는 것. 현장 공연보다는 접근성이 좋은 음원을 반복 소비하고, 스피커 아닌 이어폰으로 음악을 향유하는 시대가 돼서다. 최근 전파를 탄 KBS2 ‘골든걸스’ 속 이 장면은 미디어 환경 변화로 인해 대중 정서와 소비방식이 달라진 현실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미디어에 기반한 콘텐츠 생태계도 이와 같은 격변기를 거쳤다. 대중이 채널보다 콘텐츠 자체를 소비하며 플랫폼 위주로 재편됐던 미디어 환경이 다시 뒤바뀐 것이다. 레거시 미디어(지상파·케이블·종편)에서 뉴 미디어(OTT·인터넷·모바일)로 중심축이 옮겨가며 이제는 플랫폼이 아닌 제작 스튜디오 위주의 콘텐츠 중심 시대로 탈바꿈했다. 이 과정에서 글로벌 OTT 예능은 점차 몸집을 부풀렸고(넷플릭스 ‘피지컬 100’), 유튜브 예능 역시 스타 크리에이터가 한자리에 모이는 식으로 규모를 키웠다. TV 매체에서 활약하던 유재석, 신동엽 등도 자체 유튜브 채널을 개설하는 등 미디어 환경 변화에 순응한 지 오래다.
콘텐츠를 소구하는 시청자의 정서가 달라지자 프로그램 안팎 경계는 자연히 사라졌다. 이제 대중은 그림 같은 휴양지로 떠난 TV 속 출연자를 보며 대리만족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보다는 현실에 밀접히 발붙이는 예능을 원한다. 요식업자 백종원이 장사 설루션을 제공하는 tvN ‘장사천재 백사장’ 시리즈를 비롯해 결혼과 육아를 다루는 오은영 박사의 예능과 반려견 전문가로 꼽히는 동물 훈련사 강형욱의 예능 등이 인기를 얻은 이유다.
전문가들은 사람의 마음을 읽어야 변화에 따라갈 수 있다고 입을 모았다. 예능이 제시하는 화두가 아닌 사람에 주목해 트렌드를 읽어야 한다는 설명이다. 5일 서울 상암동 CJ ENM 탤런트스튜디오에서 열린 CJ ENM 컬처 토크 행사에 자리한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는 대중 정서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정 평론가는 “지금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각과 기분을 읽어야 한다”면서 “미래 트렌드의 답은 거기에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tvN ‘스트리트 푸드 파이터’와 ‘유 퀴즈 온 더 블록’ 등을 연출한 박희연 CP 역시 “결국 사람이 콘셉트의 핵심”이라면서 “사람이 힘을 얻는 시대인 만큼 방송 PD로서 내공을 갖춘 사람의 ‘진짜’ 이야기를 발굴하고자 노력한다”고 했다.
글로벌 OTT 시장이 K드라마에 이어 K예능을 주목하기 시작하면서 일선에선 이와 관련한 고민이 깊어졌다. 현재 국내 콘텐츠 시장은 내수용 예능과 전 세계를 겨냥한 예능이 혼재한 과도기를 지나고 있다. 고유한 정체성을 지키면서도 범용적인 가치를 찾아야 하는 건 숙제다. 박 CP는 ‘전 세계 영향력을 가진 이를 출연시키면 자연히 글로벌 예능이 된다’는 나영석 PD의 말을 인용하며 “‘피지컬 100’이나 연애 예능처럼 각국 정서를 이해하지 않아도 볼 수 있는 보편적인 소재를 택할지, 혹은 글로벌 스타를 통해 전 세계의 문을 두드릴지는 고심해야 할 문제”라고 했다. 정 평론가는 “보편성과 차별성을 아울러야 예능·드라마 등 K콘텐츠의 향방이 결정될 것”이라고 했다.
김예슬 기자 yeye@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