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스러울지라도 진실을 알게 하는 빨간 약과 아무것도 모른 채 현실에 머물게 하는 파란 약. 주인공은 잠깐의 고민 끝에 빨간 약을 택하고 현실의 참상을 목도한다. 영화 ‘매트릭스’(감독 릴리 워쇼스키·라나 워쇼스키)의 한 장면이다. 올해 K팝 아이돌 팬들은 의도치 않게 ‘빨간 약’을 먹어야 했다. 아이돌 팬덤의 처우 문제는 어제오늘일이 아니다. 이들은 푸대접을 받는다고 자조하면서도 사랑을 놓지 못한다. 더 좋아하는 쪽이어서다. 그러나 올해는 애정만으로는 감내하기 힘든 일이 유독 많았다.
아이돌 콘서트나 팬사인회, 기타 현장 행사 등에서는 크고 작은 논란이 빈번했다. 지난 7월 그룹 앤팀 팬사인회에서는 보안업체 직원에게 이른바 ‘속옷 검사’를 당했다는 폭로가 나왔다. 전자기기를 숨겼을 수도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2월에는 한 경호원이 그룹 NCT드림에게 다가오는 팬을 밀쳤다가 전치 5주 골절상을 입혀 업무상과실치상혐의로 검찰에 송치됐다. 지난 17일에는 그룹 보이넥스트도어의 경호 담당자가 카메라를 든 팬의 어깨를 세게 밀치는 영상이 퍼져 논란이었다. 해당 영상은 X(옛 트위터)에서 10만회 이상 공유되는 등 큰 파장이 일었다.
대면 행사가 몸수색과 과잉 경호로 물의를 빚었다면, 콘서트에서는 과도한 본인 확인 절차로 성토글이 쏟아졌다. 지난 7월 서울 고척돔에서 열린 세븐틴 콘서트에서는 야외에서 장시간 본인 확인 시간을 거쳐 뭇매를 맞았다. 현장을 찾은 관객이 티켓을 구매한 당사자가 맞는지 일일이 대조하느라 입장이 지연된 것이다. 당시 날씨가 34도에 이를 정도로 무더웠던 만큼 원성이 자자했다. 지난 10월에는 한 팬이 NCT 드림의 여름 콘서트에서 휴대폰 기기를 변경했다는 이유로 주최 측에게 휴대폰 수리 기록부터 일련번호, 개통 계약서, 신분증, 예매기록 확인 등을 요구받았던 일이 뒤늦게 X에 알려져 공분을 샀다. 1만회 이상 공유된 해당 게시글에는 “편의점에서 500원짜리 사탕만 사도 고객이라고 친절하게 대해주는데 K팝은 유독 고객을 푸대접한다”는 의견이 달려 공감을 얻었다. 이외에도 멀쩡히 예매한 티켓이 하루아침에 취소되고 도리어 소명자료를 요구 당했다는 토로가 콘서트철마다 심심찮게 터져 나온다.
이 같은 일들은 과거에도 빈번했다. 2016년에도 그룹 엑소 콘서트 현장에서 스태프가 관객의 촬영 장비 소지 여부를 보겠다며 과도하게 몸을 수색해 비판받았다. 그럴 때마다 잠시 들끓고 말던 팬덤 분위기는 이제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트로트 가수 임영웅의 콘서트 현장 분위기가 알려지면서부터 K팝 팬덤이 단체로 ‘빨간 약’을 먹게 돼서다. 어르신을 모시고 공연장에 다녀온 자녀와 손녀들은 주최 측이 팬들을 위해 준비한 설비를 알리기 바빴다. 공연장 의자마다 깔아둔 방석은 물론 넉넉하게 설치한 간이 화장실, 난방설비를 갖춘 쉼터, 티켓 분실 관객을 위한 재발행 부스와 친절한 진행 요원 등이 화제였다. 그간 “아이돌 팬들은 불가촉천민”이라고 자조하던 팬덤은 “충격 받아서 더 이상 K팝 덕질 못 하겠다”, “임영웅을 보고 배워라” 등 여러 반응을 내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일부 K팝 팬덤에선 여전히 푸대접이 이어지는 모습이다. “좋아하는 마음을 담보로 잡혀 문제가 생겨도 쉽게 공론화하지 못한다”는 게 K팝 팬들의 공통된 반응이다. 최이삭 K팝 칼럼니스트는 지난 7월 경향신문에 기고한 글 ‘K팝 여성 팬의 낮은 인권은 돈이 된다’에서 “K팝은 정치적 발언권이 낮은 여성 팬들의 권리와 행복을 묵살한 채 돈을 벌고 있다”고 지적했다. 김헌식 대중문화평론가는 최근 행사에서 벌어진 사건들을 두고 “팬 중심 산업이라는 본질을 간과한 게 문제”라고 짚었다.
기획사에서도 문제의식이 전혀 없는 건 아니다. 다만 다수 인원이 몰리는 만큼 적절한 현장 관리는 불가피하다는 의견이다. 익명을 요구한 한 가요기획사 관계자는 “현장 질서 관리 차원에서 의도치 않게 문제가 발생하기도 한다”면서 “돌발상황에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적절한 통제는 불가피하다”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업계 종사자의 입장에서도 속옷 검사, 개인정보 침해 수준에 이르는 과도한 신분증 확인 등 팬들이 부당하다고 언급하는 의견에 충분히 공감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팬덤의 행사 참여 규모가 크고 사적인 장소까지 따라오는 이도 있어 아티스트와 다수 팬들의 안전 및 권리 보호를 위해 어쩔 수 없이 강경하게 행동하는 경우도 있다”고 부연했다. 이어 “각 소속사에서도 안전 대책과 관련해 다양한 방법을 강구해 보다 성숙한 팬덤 문화를 만드는 데 기여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김예슬 기자 yeye@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