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일 오후 4시쯤 방문한 서울 사직로 경복궁 입구부터 내부 붉은 벽에 적힌 낙서가 눈에 띄었다. 사람들이 몰리는 경복궁 근정전 기둥에도, 발길이 적은 자경전에도 낙서가 있었다. 최소 5~7년 전 낙서부터 최근에 작성된 듯한 낙서들도 있었다. 손톱만 한 작은 낙서부터 두 뼘 정도 큰 낙서까지, 욕설이나 음담패설이 다수였다. 대부분 한국어였지만, 영어 낙서도 있었다.
경복궁엔 벽에 적힌 낙서를 보고 탄식하는 시민들이 많았다. 평소 역사에 관심이 많아 경복궁을 방문한 곽모(18)양은 이날 경복궁 곳곳에 쓰인 낙서를 목격했다. 곽양은 “경복궁 내부에도 낙서가 있는지 몰랐다”라며 “우리 문화재에 욕설이 적혀 있는 걸 보니 마음이 안 좋다”며 인상을 찌푸렸다. 곽양과 함께 경복궁을 방문한 김모(18)양은 “낙서 크기에 상관없이 강한 처벌을 해야 한다”며 “욕설이나 음담패설은 더 강하게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학생 서해인(20)씨는 “처벌도 처벌이지만, 강력한 규제와 인식개선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했다.
지난 16일 경복궁 영추문 인근과 국립고궁박물관 벽면 등에 스프레이로 낙서한 10대, 17일 경복궁 담장에 2차로 낙서한 20대가 체포돼 화제를 모았다. 하지만 이번 사건 이전부터 크고 작은 문화재 훼손이 꾸준히 일어나고 있었다는 지적이 나온다.
문화재청에 따르면 인위적인 문화재 훼손은 2011년부터 올해까지 33건 발생했다. 이중 낙서로 인한 훼손이 7건이다. 2011년 국보인 울주 천전리 각석에 한 10대가 친구 이름을 장난삼아 돌로 새긴 사실이 알려졌고, 2014년 경남 합천군 해인사 전각 벽 22곳에 검은 사인펜으로 쓴 한자 21자가 발견되기도 했다. 2007년 낙서로 훼손된 서울 송파나루길 삼전도비 복구엔 4개월이 걸렸다.
하지만 그동안 문화재를 훼손해도 강력하게 처벌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현행 국내 문화재보호법엔 지정 문화재를 손상, 절취, 은닉하거나 그 밖의 방법으로 효용을 해한 자는 3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한다고 규정한다. 2007년 삼전도비를 훼손한 30대 남성은 징역 1년 6개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이 남성은 2012년 대구 동구 노태우 전 대통령 생가에도 불을 질렀지만, 징역 1년6개월 집행유예 3년 선고받는 데 그쳤다. 2011년 천전리 각석에 낙서를 한 10대는 불기소로 풀려났다.
외국은 한국에 비해 문화재훼손에 관한 처벌 규정이 무거운 편이다. 이탈리아는 지난 2016년 문화재훼손 처벌을 강화해 유죄가 인정되면 최소 1만5000유로(약 2150만원)의 벌금과 최대 5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을 수 있게 했다. 지난 2014년 한 러시아 관광객이 콜로세움에 이니셜 한 글자를 적어서 2만 유로(약 2868만원)의 벌금과 집행유예를 선고받기도 했다.
전문가는 문화재훼손 범죄에 무관용 원칙을 적용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윤호 동국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경복궁 낙서 사건에 대해 “세상의 관심이 높아진 상황에서 가볍게 넘어가면 비슷한 호기심을 가진 청소년이 모방 범죄를 할 위험이 있다”라며 “청소년이라 소년보호처분을 받을 수 있지만, 형사 처벌도 가능하다. 처벌에 예외가 있어선 안 된다”고 경고했다.
문화재훼손에 대한 인식을 개선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서경덕 성신여대 교양학부 교수는 지난 22일 자신의 SNS를 통해 “경복궁 안팎으로 CCTV 설치 대수를 늘리는 것이 현실적으로 가장 효율적인 대안”이라며 “하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어릴 때부터 교육이 강화돼야 한다. 시민 의식을 개선해야 할 시점”이라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