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정기 주주총회에서 예년과 달리 행동주의 주주제안 목소리가 영향력을 발휘했다. 기업 지배구조 체질 개선을 위해 제안한 사외이사 선임 안건이 일부 통과됐기 때문이다. 업계에서는 행동주의 흐름이 점차 가속화될 것으로 내다본다.
30일 한국예탁결제원에 따르면 지난해 12월 결산 상장법인 2614개사 중 지난 12일부터 전날까지 총 2086개사가 정기 주주총회를 개최했다. 시장별로는 유가증권시장 695개사, 코스닥 1295개사, 코넥스 96개사로 집계됐다.
주총을 마친 상장법인 가운데 삼성물산과 다올투자증권, KT&G, JB금융지주 등이 행동주의펀드의 타깃이 된 곳이다. 다올투자증권의 경우 2대 주주인 김기수 프레스토투자자문 대표가 공개 주주 서한을 통해 주주제안에 적극 나서는 등 행동주의 행보를 실행에 옮겼다.
이들 기업에 대한 주주제안은 대부분 사외이사 후보 추천 및 증원, 자사주 매입·소각, 배당금 확대 등 주주환원책과 지배구조 개선 요구 등 이다. 그러나 이번 주총에서 사외이사 선임 안건을 제외하면 자사주 매입·소각과 배당금 의견은 모두 부결됐다.
JB금융·KT&G, 행동주의펀드 추천 사외이사 진입 성공
JB금융지주는 이번 주총에서 행동주의펀드인 얼라인파트너스자산운용과 대립각을 펼쳤다. 얼라인파트너스는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JB금융에 사외이사 선임과 비상임이사 증원 안건을 상정했다. 앞서 이창환 얼라인파트너스 대표는 “적법한 주주 제안을 통해 회사에 더 도움이 되는 후보를 주주총회에서 선출하자는 것”이라며 “이사회의 임원추천권이 남용되지 않도록 주주의 적극적인 역할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주총 결과 얼라인파트너스가 지지하는 이희승 리딩에이스케피탈 투자본부 이사와 김기석 크라우디 대표이사 등 2명이 사외이사로 JB금융 이사회 진입에 성공하면서 행동주의펀드의 승리로 마무리됐다. 다만 얼라인파트너스가 제안한 비상임이사 증원 안건은 JB금융의 현원 유지가 과반수 찬성을 받아 부결됐다.
이희승 사외이사는 JB금융과 얼라인파트너스 모두 추천한 후보였다. 김기석 사외이사의 경우 JB금융이 반대표를 권장하고, 얼라인파트너스만 추천했다. 금융사에 주주제안 이사가 들어간 국내 사례는 이번이 처음이다.
얼라인파트너스 측은 “이번 주총 결과는 집중투표제도의 효과를 증명하는 의미 있는 사례였다”며 “비록 두 명의 이사만으로 이사회 결의를 뒤집을 수 없겠지만 경영진으로부터 독립적인 이사들이 선임된 만큼 이사회 운영 투명성이 크게 개선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얼라인파트너스는 JB금융이 자본을 재배치하고, 주주환원 정책을 강화할 수 있도록 기여하겠다는 입장이다.
플래시라이트캐피탈파트너스(FCP)는 KT&G와 치열한 공방전을 펼쳤다. FCP는 KT&G 주총에서 최대 주주인 기업은행과 문제의식을 함께했다. 기업은행이 추천한 손동환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의 사외이사 선임 안건에 찬성해서다.
이에 힘입어 지난 28일 진행된 KT&G 주총에서 손동환 사외이사 선임 안건은 가결됐다. 이상현 FCP 대표는 “손 사외이사 선임은 FCP를 비롯한 모든 주주의 위대한 승리”라며 “(손 이사는) 주주를 위한 CCTV 역할을 하는 사외이사, 밸류업 성공사례로 남길 바란다”고 말했다.
다만 FCP의 이번 주주제안은 ‘절반의 성공’으로 해석된다. 방경만 KT&G 수석부사장을 신임 사장으로 선임하는 안건이 통과된 것에 기인한다. FCP와 기업은행은 이같은 안건에 대해 반대 입장을 고수했었다. 방 사장이 수석부사장 시절 KT&G 영업이익이 20% 이상 급감해서다.
FCP는 KT&G 주총 다음날인 지난 29일 새로 구성될 KT&G 이사회에 거버넌스 체질 개선을 위한 5가지 요구를 담아 서한을 발송했다. 주요 요구 사항은 △사장 및 이사회 전원 연봉의 3분의 2 이상 스톡옵션 지급(주가연동 성과보상) △해외 사업 실적 공개 및 실태조사(회계투명성 개선) △기부된 자사주 환수 △검증된 글로벌 소비재 전문가를 자회사 KGC인삼공사 대표로 영입 △부동산·사모펀드 등 투자 중단 및 잉여 현금 주주 환원 등이다.
FCP는 서한에서 “현재 KT&G는 횡령 혐의로 기존 이사회 전원이 수사 대상에 오르는 유례 없는 ‘거버넌스 붕괴 사태’에 직면해 있다”며 “양심의 목소리를 들을 용기가 있는 분들은 자진 사퇴해 KT&G가 새로운 미래로 나아가는 데 도움을 주시기 바란다”고 촉구했다. 향후 FCP는 손 사외이사의 이사회 입성을 기점으로 KT&G에 대한 주주제안 목소리를 더욱 높일 것으로 추정된다.
삼성물산·다올투자증권 ‘행동주의 주주제안 실패’
행동주의 주주제안은 JB금융과 KT&G와 달리 삼성물산과 다올투자증권에서는 고배를 마셨다. 안다자산운용과 시티오브런던 등 행동주의펀드 5개 연합은 삼성물산에 대해 보통주 주당 4500원과 우선주 주당 4550원의 현금배당을 요구했다. 아울러 5000억원 규모의 자사주 매입 등을 요구하는 주주제안을 상정했다.
이들이 요구한 배당액의 경우 삼성물산이 지난 1월 제안한 금액보다 75% 이상 증액된 규모다. 이에 시장은 행동주의펀드가 무리한 제안을 내놨다고 평가했다. 주주제안을 모두 수용할 경우 지난해뿐만 아니라 올해까지의 삼성물산 잉여현금흐름 100%를 초과해서다. 결국 캐스팅보트를 쥐고 있던 국민연금 등 주주들이 반대표를 던지면서 부결됐다.
다올투자증권은 2대 주주인 김기수 프레스토자문 대표가 행동주의를 선언하면서 올해 주총에서 표대결을 펼쳤다. 김 대표는 △권고적 주주제안 신설 내용의 정관 변경 △차등적 현금배당 △이사의 보수와 퇴직금 관련 주주총회 보수심의제 신설 △최대주주가 참여하는 유상증자에 따른 자본확충 △자회사 매각에 대한 주총 보고 등 다수 안건을 제안했다.
특히 권고적 주주제안은 경영진 견제를 위한 안건으로 주주들의 경영 참여를 확대하는 방안이다. 이에 대해 다올투자증권은 의결권 대리행사 권유 공시로 반대 입장을 내놨다. 이후 주총에서 김 대표의 권고적 주주제안 신설은 26.6%의 지지에 그쳤다. 다른 안건들도 대부분 비슷한 수준인 26~29% 찬성에 머물렀다. 소액주주들의 지지를 얻는 데 실패한 것이다.
한편 증권가에서는 행동주의펀드들의 활동이 가속화될 것으로 내다본다. 특히 앞선 사례에서 부결된 자사주 매입·소각에 대한 요구를 정부 정책이 힘을 실어줄 것으로 보여서다.
김준섭 KB증권 연구원은 “지난 1월 금융위에서 인적분할 시 자사주 신주 배정 금지를 추진하겠다고 발표했다”며 “행동주의펀드들이 이슈로 제기하고 있는 자기주식을 다루는 방안에 대한 기대감은 꾸준히 유지될 것”이라고 봤다.
그러면서 “밸류업 프로그램 발표 이후 행동주의펀드의 캠페인 대상이 되는 기업들이 선제적으로 자사주를 매입·소각하는 상황”이라며 “프로그램 영향으로 행동주의펀드들의 활동과 추세는 유지되거나 가속화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창희 기자 window@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