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망종(芒種)’은 보리베기와 모내기 계절
- 콩과 옥수수, 고구마 심고 양파, 마늘, 감자 수확
- ‘부지깽이도 따라 나선다’는 바쁜 농촌
- 기계화로 함께 모여 들밥 먹는 풍경 사라져
지난달 29일 새벽 지평선 너머로 먼동이 트기 전 마음 급한 노(老) 농부의 발걸음은 들녘을 향했다. 물댄 논의 물고를 돌아보고 농삿 일의 순서를 정하기 위해서다. 동트기 전 말 그대로 넓디 넓다해서 붙여진 이름의 광활 벌판을 찾은 최병희(78‧ 광활면)씨는 논두렁을 걸어 나오며 “내일은 트랙터를 이용해 써레질을 하고 3~4일 후에 모내기를 할 예정”이라며 “요즘은 촌에 사람이 없어 모든 일을 다 기계로 하다 보니 농삿일이 편해지긴 했지만 들판에 둘러앉아 막걸리를 주고 받던 그런 풍경은 사라진지 오래”라며 아쉬워했다.
6월 5일 망종을 일주일 앞둔 우리나라 최대 곡창 지역인 전북 김제시 김제 들녘은 일년 중 어느 때 보다 바쁘다.
망종은 밭에 씨앗을 뿌리는 절기인데 보리를 베어야 밭갈이도 할 수 있고 이 일이 모내기와 겹치니 일손이 태부족이다. 끝없이 하락 중인 초저출산 문제는 농촌의 고령화와 함께 지평선이 이어지는 김제평야에는 사람보다 기계가 더 많아 보였다.
한 겨울 찬바람을 이겨내고 누렇게 익은 보리밭에는 콤바인이 누비며 보리나락을 수확하고, 트랙터는 무논을 돌며 열심히 써레질한다. 모판을 앞뒤로 짊어진 이앙기는 가지런히 모 심기에 바쁘다.
“망종에는 발등에 오줌 싼다”라는 속담이 있을 만큼 일 년 중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시기이다. 예전 한 겨울 지내고 고픈 배를 움켜쥐었던 시절, 그래도 보리를 수확하면서 배고픔을 면할 수 있었던 희망의 시기였다. 모내기로 한 해 농사를 시작하면서 풍년에 대한 기대감도 넘쳐난다.
김제시 광활면 옥포리 들판에서 모내기를 하던 박동훈(76)·정정순(70)씨 부부는 “콩, 보리, 감자, 벼를 철에 따라 심고 가꾸고 수확하려면 일 년 열두달 쉴 틈이 없다”면서 “조상이 물려준 땅에서 이렇게 평생 농사를 짓다보니 아들 하나 딸 둘은 성장해 모두 대처로 나가고 부부만 남아 고향땅을 지키며 산다”고 말했다.
김제시 광활면의 한 농가에서 기계로 수미감자로 불리는 햇감자를 수확하고 농민들은 줄지어선 박스에 감자를 크기별로 담느라 손놀림이 분주하다. 이 지역에서는 논 농사와 함께 콩과 감자 등 밭 농사도 많이한다. 감자 수확을 마친 인심좋은 농부는 기자에게 "김제들녘에서 생산되는 감자는 토질이나 기후조건이 우수해 정말 맛있고 영양도 최고"라며 햇감자를 비닐봉투에 가득담아 건네준다.
농기계가 일반화되기 전 김제평야에는 주민들의 일손만으로는 태부족이어서 ‘식량증산’을 기치로 정치인들을 비롯해 각종 단체에서 ‘모내기 일손돕기’ 봉사자들로 북적였는데 요즈음 그런 모습은 찾아 볼 수 없다. 해가 중천에 뜨고 허기가 몰려오면서 “혹시 새참은 언제 나오나요”라는 기자의 질문에 “새참은 옛날이야기”라며 “조금 있다가 면사무소 옆 식당에 가서 점심 먹고 다시 일 할 것”이라고 말한다.
‘부지깽이도 따라나선다’는 농번기 들녘에 사람들은 볼 수 없고 요즈음 농촌에는 콤바인, 트랙터, 이앙기 소리만 들려온다. 사람의 손이 필요한 곳은 외국인 계절 근로자들이 대신하고 있다. ‘품앗이’와 ‘새참’의 추억이 사라진 농촌 들녘에 ‘식량증산’을 독려하던 표어 대신 ‘벼 재배 면적을 줄여 식량 과잉생산을 막자’는 현수막이 붙어 있다.
“보리는 망종 전에 베라.”는 속담이 있다. 망종까지 보리를 모두 베어야 논에 벼도 심고 밭갈이도 하게 된다. 젊은이들이 사라진 농촌에서는 이 땅을 지키려는 등굽은 어르신들이 힘겹게 모내기를 하면서 자녀들을 위해 풍요로운 수확의 계절을 기대한다. 선조들의 꿈과 희망이 가득했던 농촌에 젊은이들이 돌아와 광활한 농토가 다시 한 번 활력이 넘치는 기회의 땅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
김제 글‧사진=곽경근 대기자 kkkwak7@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