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 가보면 안다”는 대통령…응급실 의사들 “붕괴 막을 방법 없다”

“현장 가보면 안다”는 대통령…응급실 의사들 “붕괴 막을 방법 없다”

기사승인 2024-08-31 06:00:07
서울의 한 대학병원 응급의료센터 안으로 119구급대원들이 환자를 옮기고 있다. 사진=곽경근 대기자

“비상진료체계가 원활히 가동되고 있다”는 윤석열 대통령의 발언을 두고 응급실 의사들이 분노했다. 환자들은 이른바 ‘응급실 뺑뺑이’를 돌고 전문의들은 업무 부담을 버티지 못해 사직하는 상황에서 현장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한 무책임한 발언이라는 것이다. 잘못을 인정하고 정책 추진을 되돌아봐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31일 의료계에 따르면 6개월 이상 이어지는 의료 공백, 코로나19 재유행, 온열질환자 급증 등 악재가 겹치며 환자가 급증하자 응급실은 과부하에 빠졌다. 제때 이송되지 못해 상태가 악화되거나 숨지는 사례가 잇따르고 있다.

전국공무원노동조합 소방본부에 따르면 지난달 27일 부산 북구에서 야외 작업을 하던 40대 남성 A씨가 열사병 증세를 보이며 쓰러졌다. 신고를 받은 119구급대는 10여개 의료기관에 수용을 문의했지만 모두 어렵다고 답했다. 2시간여 만에 울산의 한 병원으로 이송됐지만 당시 심정지 상태였던 A씨는 병원 치료를 받다가 지난 1일 결국 사망했다. 지난 9일 서울 구로역 사고 부상자는 치료할 의사를 찾지 못해 16시간가량 응급실을 찾아 헤맸다. 

분만 병원을 못 찾아 구급차 안에서 출산하는 경우도 이어진다. 지난 15일과 27일 각각 충남 서산과 충북 진천에서 만삭 임신부가 아기를 받아줄 병원을 찾지 못해 구급차에서 출산했다. 두 사례 모두 119구급대원이 가까운 지역 병원들을 물색했으나 병원으로부터 수용 불가 답변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외에도 뇌경색으로 쓰러진 여성이 3시간 이상 지나 수술을 받거나, 두통을 호소하다가 뇌혈전 의심 진단을 받은 중학교 3학년 학생이 12시간 대기하다가 진료를 받은 사례가 전해지고 있다. 소방당국의 ‘119구급대 재이송 건수 및 사유 현황’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119구급대 재이송 2645건 중 40.86%(1081건)의 사유는 ‘전문의 부재’였다.

권영각 전국공무원노조 소방본부장은 30일 국회에서 더불어민주당 의료대란특별위원회(민주당 의료대란특위)와 함께 가진 긴급 간담회를 통해 “구급대원들이 무력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재난에 처한 국민들을 병원에 이송해야 하는 과정이 너무나 힘들다”면서 “응급의료체계가 붕괴돼 가고 있음을 현장에서 느끼고 있다”고 말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29일 오전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국정브리핑 및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윤 대통령이 지난 29일 국정브리핑 및 기자회견에서 9월 의료체계 위기설에 대해 “현장을 보면 문제가 없다. 지역 종합병원 등을 가보면 비상진료체계가 원활하게 가동되고 있다”고 한 발언은 의료계의 공분을 사고 있다. “의료개혁이 없으면 국가라고 할 수 없다”며 정책 추진 의사도 분명히 했다.

전국의대교수비상대책위원회(전의비)는 “한국 의료를 돌이킬 수 없게 망가뜨려 놓고 아직도 개혁을 운운하는가. IMF 사태 20일 전까지 외환위기는 절대 없다고 장담하던 1997년이 떠오른다”고 비판했다. 이어 “의료현장에 방문해 응급·중증 환자들의 절규를 들어 봤느냐”라며 “IMF는 4년 만에 이겨냈지만 대통령실과 보건복지부, 교육부가 망쳐버린 한국 의료는 돌아오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정치권에서도 비판이 쏟아졌다. 박찬대 민주당 원내대표는 30일 인천 네스트호텔에서 진행된 의원 워크숍을 마무리하며 “도대체 현장 상황을 제대로 알고 있기는 한 것인지, 누구한테 어떤 보고를 받길래 저리도 당당한 것인지 궁금해졌다”고 짚었다. 이준석 개혁신당 의원은 29일 CBS 라디오 ‘박재홍의 한판승부’에 출연해 “대통령이 응급의료 상황을 너무 가볍게 보는 것 같다”라며 “아무 대책도 없이 ‘낙수 의사론’을 펼쳐 보려다가 망했다고 시인하면 된다”고 했다.

정책 추진을 되돌아봐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응급의학과 전문의 출신인 이주영 개혁신당 의원은 30일 백범김구기념관에서 열린 ‘2024 대한응급의학의사회 학술대회’에서 “의료현장이 붕괴를 앞두고 있을 정도의 엄중한 상황이라면 정부는 정책 추진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의료개혁을 해야 하는 것은 맞지만 왜 개혁을 정부 마음대로 하는지 모르겠다”고 토로했다.

정부가 의료개혁 추진을 굽힐 뜻이 없는 가운데 전국 응급실의 상태는 악화일로를 걷는다. 서울 ‘빅5’ 병원도 예외는 아니다. 의료계에 따르면 지난 27일 서울대병원 응급실은 정규 시간 외 안과 응급 수술이 불가능하다고 알렸다. 세브란스병원은 성인·소아 외상 환자 등을 수용할 수 없다고 공지했다. 서울아산병원 응급실은 인력 부족으로 인해 정형외과 응급 수술과 입원이 어렵다고 했다. 서울성모병원 응급실은 혈액내과 신규 환자를 받지 못하고 있다.

서울의 한 대학병원 응급의료센터에서 의료진이 이동하고 있다. 사진=곽경근 대기자

과중한 업무를 버티지 못한 응급의학과 전문의들은 병원을 떠나고 있다. 세종충남대병원은 응급의학과 전문의 부족으로 다음 달 응급실 야간 운영을 중단한다. 아주대병원 응급실에 근무하던 응급의학과 전문의는 당초 14명이었으나 가중된 업무 여건 속에서 7명이 잇따라 사직서를 냈다. 건국대 충주병원의 경우 응급실에 근무하는 의사 7명 전원이 최근 사직서를 제출한 것으로 전해진다.

문제는 추석 연휴다. 명절에 응급실을 찾는 환자가 평상시보다 2배 가까이 늘어나서다. 복지부에 따르면 2022년 추석 연휴(9월9~12일) 권역·지역응급의료센터 166곳의 환자 내원 건수는 약 9만 건으로, 하루 평균 약 2만3000건 꼴로 집계된다. 이는 평소 평일의 1.9배 수준이다. 정부는 추석 연휴 기간인 9월11∼25일을 ‘비상 응급 대응 주간’으로 지정했다.

응급실 의사들은 명절이 가까워질수록 두려움이 앞선다. 이형민 대한응급의학의사회 회장은 30일 기자간담회에서 “현장의 위기감은 고조되고 있지만, 정부는 아무런 대책이 없고 위기를 인정하지 않으려 하고 있다”며 “추석 명절 땐 응급의료 대란으로 많은 환자가 길거리를 헤매다 사망할 것이며, 지치고 탈진한 의료진은 이탈해 혼란이 가중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이 회장은 “응급의학과 의사는 사람을 살리는 사람이다. 현장에서 사람을 살리는 이들이 ‘환자가 죽는다’고 이야기하고 있는데 위에선 아니라고 한다”며 “현재 응급의료는 재난 상황 중 최고 위기 상황이다. 이 붕괴를 막을 방법이 없다. 지금 정부가 해야 할 일은 젊은 의사들을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본인들이 한 일에 책임을 지고 사과하는 일이다”라고 했다.

정부는 응급현장 유지를 위해 안간힘을 쓰는 모습이다. 우선 응급실 전문의 진찰료를 가산하고, 권역·지역 응급의료센터 전담 인력에 대한 인건비를 지원하기로 했다. 또 추석 연휴에 한시적으로 적용하는 응급진찰료 수가 가산을 기존 응급의료기관 408곳에서 응급의료시설까지 확대 적용해 경증 환자를 분산할 방침이다. 경증 환자가 권역·지역응급의료센터를 찾을 경우 본인부담분을 기존 50~60%에서 90%로 상향할 예정이다.

신대현 기자
sdh3698@kukinews.com
신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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