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새의 깃털 같은 머리칼 가진 분”…한강, 노벨상 후 첫 글 ‘깃털’ 공개

“흰새의 깃털 같은 머리칼 가진 분”…한강, 노벨상 후 첫 글 ‘깃털’ 공개

온라인 동인 무크지 ‘보플’에 외할머니에 관한 추억 소재 글 기고

기사승인 2024-10-17 09:01:16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소설가 한강이 지난 2016년 5월16일 서울 마포구 동교동 카페 ‘꼼마 2페이지’에서 열린 맨부커상 수상 기념 및 신작 ‘흰’ 발간 기자간담회에 참석해 취재진의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사진=곽경근 대기자 

소설가 한강(53)이 자신이 동인으로 활동하는 뉴스레터 형식의 무크지를 통해 노벨문학상 수상 이후 첫 글을 공개했다. 900자 분량의 글에 세상을 떠난 외할머니와의 추억을 담았다.  

17일 온라인 동인 무크지 '보풀'은 지난 15일 저녁 발행한 제3호 레터에서 한강이 쓴 '깃털'이라는 제목의 짧은 산문을 소개했다.
분량이 900자가 조금 넘는 글은 “문득 외할머니를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나를 바라보는 얼굴이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이어 “사랑이 담긴 눈으로 지그시 내 얼굴을 들여다보다가 손을 뻗어 등을 토닥이는 순간. 그 사랑이 사실은 당신의 외동딸을 향한 것이란 걸 나는 알고 있었다”며 외할머니와 함께 한 어린 시절을 추억한다.

작가는 어린 시절 찬장 서랍을 열고 유과나 약과를 꺼내 쥐어주던 외할머니의 모습을 떠올리며 "내가 한입 베어무는 즉시 할머니의 얼굴이 환해졌다. 내 기쁨과 할머니의 웃음 사이에 무슨 전선이 연결돼 불이 켜지는 것처럼"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작가는 외할머니를 “처음부터 흰 새의 깃털 같은 머리칼을 가진 분이었다”고 말한다. 글은 작가의 어린 눈으로 바라본 외할머니를 묘사하며 이어졌다. “그 깃털 같은 머리칼을 동그랗게 틀어올려 은비녀를 꽂은 사람. 반들반들한 주목 지팡이를 짚고 굽은 허리로 천천히 걷는 사람"

이 글은 "유난히 흰 깃털을 가진 새를 볼 때, 스위치를 켠 것같이 심장 속 어둑한 방에 불이 들어올 때가 있다"는 문장으로 끝을 맺는다.

이번 글이 실린 ‘보풀’은 한강과 음악가 이햇빛, 사진작가 전명은, 전시기획자 최희승 등이 모여 만들었다. ‘보풀’ 공식 인스타그램에는 한강의 사진과 함께 “보푸라기 동인 한강은 소설을 쓴다. 가볍고 부드러운 것들에 이끌려 작은 잡지 ‘보풀’을 상상하게 되었다”는 소개문을 적었다. 

한강은 지난 8월 발행을 시작한 이 무크지에 '보풀 사전'이라는 코너를 연재하고 있다.

다음은 3호에 실린 한강의 ‘깃털’ 전문이다.

지난 14일 오전 서울 종로구 교보문고 광화문점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소설가 한강을 축하하는 공간이 마련돼있다. 사진=연합뉴스 

‘깃털’

문득 외할머니를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나를 바라보는 얼굴이다. 사랑이 담긴 눈으로 지그시 내 얼굴을 들여다보다가 손을 뻗어 등을 토닥이는 순간. 그 사랑이 사실은 당신의 외동딸을 향한 것이란 걸 나는 알고 있었다. 그렇게 등을 토닥인 다음엔 언제나 반복해 말씀하셨으니까. 엄마를 정말 닮았구나. 눈이 영락없이 똑같다.

외갓집의 부엌 안쪽에는 널찍하고 어둑한 창고 방이 있었는데, 어린 내가 방학 때 내려가면 외할머니는 내 손을 붙잡고 제일 먼저 그 방으로 가셨다. 찬장 서랍을 열고 유과나 약과를 꺼내 쥐어주며 말씀하셨다. 어서 먹어라. 내가 한입 베어무는 즉시 할머니의 얼굴이 환해졌다. 내 기쁨과 할머니의 웃음 사이에 무슨 전선이 연결돼 불이 켜지는 것처럼.

외할머니에게는 자식이 둘뿐이었다. 큰아들이 태어난 뒤 막내딸을 얻기까지 십이 년에 걸쳐 세 아이를 낳았지만 모두 다섯 살이 되기 전에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늦게 얻은 막내딸의 둘째 아이인 나에게, 외할머니는 처음부터 흰 새의 깃털 같은 머리칼을 가진 분이었다.

그 깃털 같은 머리칼을 동그랗게 틀어올려 은비녀를 꽂은 사람. 반들반들한 주목 지팡이를 짚고 굽은 허리로 천천히 걷는 사람.

대학 1학년 여름방학에 혼자 외가로 내려가 며칠 머물다 올라오던 아침, 발톱을 깎아드리자 할머니는 ‘하나도 안 아프게 깎는다…(네 엄마가) 잘 키웠다’고 중얼거리며 내 머리를 쓸었다. 헤어질 때면 언제나 했던 인삿말을 그날도 하셨다. 아프지 마라. 엄마 말 잘 듣고. 그해 10월 부고를 듣고 외가에 내려간 밤, 먼저 내려와 있던 엄마는 나에게 물었다. 마지막으로 할머니 얼굴 볼래?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손을 잡고 병풍 뒤로 가 고요한 얼굴을 보여주었다.

유난히 흰 깃털을 가진 새를 볼 때, 스위치를 켠 것 같이 심장 속 어둑한 방에 불이 들어올 때가 있다.
정혜선 기자
firstwoo@kukinews.com
정혜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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