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가 정치권의 상법 개정 움직임에 우려 섞인 목소리를 내고 있다.
3일 국회의안정보시스템에 따르면 이정문 더불어민주당(민주당) 의원이 발의한 ‘상법 일부개정법률안’이 법제사법위원회에 계류 중인 상태다. 해당 법안은 기존 회사에 한정된 이사의 충실 의무를 주주로까지 범위를 넓히는 것이 골자다. 또한 전체 주주의 이익을 공평하게 보호해야 한다는 공평 의무 조항도 포함됐다.
이와 함께 소액 주주 보호 장치로 꼽히는 집중투표제, 감사위원 분리선출 제도 등도 언급됐다. 집중투표제는 주식 1주당 선임할 이사 수만큼의 투표권을 부여하는 제도이며, 감사위원 분리선출은 선출 시 대주주 의결권을 3%로 묶어두는 제도다.
최근 민주당에서는 상법 개정안 통과를 당론으로 삼고, 연일 드라이브를 걸고 있다. 정부와 여당에서는 상법 개정에 대한 대안으로 자본시장법 개정안을 내놨지만 논의가 이뤄질지는 미지수다. 자본시장법 개정안에서는 주주의 이익 보호 적용 범위와 적용 대상이 상법 개정안보다 축소됐다. 민주당은 오는 4일 경제계와 소액 투자자를 초청해 상법 개정안 관련 토론회도 진행한다.
재계에서는 상법 개정안이 기업 경기에 악영향을 줄 것으로 보고 있다. 이사의 충실 의무가 주주로까지 범위가 넓어지면, 일상적 경영판단에서도 주주의 이익을 지켰는지 고려해야 하기에 적극적인 경영이 이뤄지기 어렵다는 것이다. 또한 대규모 투자 시에는 초기에 적자가 날 수밖에 없는데 이 또한 주주의 입장에서는 배임이 될 우려가 있다.
한국경제인협회(한경협)와 대한상공회의소(대한상의), 한국경영자총협회, 한국중견기업협회, 중소기업중앙회, 한국무역협회 등 경제 8단체는 지난달 14일 “섣부른 상법 개정은 이사에 대한 소송 남발을 초래하고 해외 투기자본의 경영권 공격 수단으로 악용돼 국내 기업 경쟁력을 훼손시킬 것”이라며 “선량한 투자자에게 피해를 끼치고 국부를 유출시켜 국민과 경제에 부담으로 돌아올 것이 명백하다”는 입장문을 발표했다.
대한상의도 지난달 29일 민주당과 간담회를 열고 경제계의 우려를 전달하는 시간을 가졌다. 한경협을 제외한 7개 경제단체와 삼성·SK·현대차·LG 등 4대 그룹 사장, 대상홀딩스·신성이엔지·드림시큐리티 등 중소·중견기업 대표 및 임원 등이 참석했다. 이날 경제계에서는 “상법개정시 상장사의 86%를 차지하는 중소·중견기업이 가장 큰 피해를 보게 될 것”이라며 “행동주의펀드의 공격이 잦아지면 미래를 위한 투자보다 경영권 방어에 힘을 써 본원적 경쟁력을 제고하기 어려워질 것”이라고 진단했다. 이와 함께 △모호한 배임죄 △모든 경영 의사결정에 대한 법적 리스크 △기존 지주회사 정책과의 충돌 등도 문제로 언급됐다.
일각에서는 인공지능(AI) 대전환기를 앞두고 투자가 필요한 시점에서 동력을 잃게 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AI 인프라 조성 등을 위해서는 대규모 투자가 필요하다. 그러나 상법이 개정된다면 기업이 용감하게 투자에 나섰다가 주주 이익으로 환원되지 못할 시, 소송의 부담을 지게 될 가능성이 크다. 기업의 대규모 M&A 등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더욱 큰 문제는 현재 국내 기업의 경기 전망이 밝지 않다는 것이다. 한국은행은 오는 2025년 실질 국내총생산(GDP) 성장률 전망치는 2.1%에서 1.9%로 하향했다. 올해 성장률 전망치도 2.4%에서 2.2%로 낮췄다. 지난달 발표된 기업경기실사지수(BSI)는 33개월 연속 부진을 기록했다. 이는 조사 시작 이래 역대 최장기 연속 부진이다. 지난달 기준, 12월의 BSI 전망치는 97.3이다. BSI가 100보다 높으면 전월 대비 긍정적 경기 전망을, 100보다 낮으면 전월 대비 부정적 경기 전망을 뜻한다.
이에 더해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 2기가 시작되면서 경영 불확실성도 커지는 상황이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취임 이전부터 관세 폭탄을 예고하고 있다. 멕시코와 캐나다는 각각 25%의 관세를, 중국에는 추가 관세에 10%의 관세를 더 부과하겠다는 것이다. 멕시코와 캐나다 등에서 생산법인을 운영 중인 국내 기업들도 긴장하고 있다. 삼성전자와 현대자동차, LG전자, LG이노텍 등이 대표적이다.
경제계 관계자들은 불안한 경영 상황에서 상법 개정안이 통과된다면 더욱 부작용이 클 것이라고 봤다. 익명을 요구한 재계 관계자는 “회사에 한정됐던 이사의 책임이 주주로 넓어지면 걷잡을 수 없이 소송이 늘어날 것이다. 이를 외국의 투기 펀드들이 악용해 기업의 정상적 의사결정을 방해, ‘먹튀’를 하는 방향으로 악용할 가능성이 적지 않다”고 꼬집었다.
한경협 관계자는 “주주에 대한 이사의 충실 의무를 인정하는 경우는 해외에서는 매우 예외적이다. 대부분 우리 기존 법처럼 회사에 대한 충실 의무만을 인정한다”며 “향후 경기악화는 자명한 사실이다. 트럼프 행정부 2기가 집권하면서 대외적 환경이 매우 불안해졌다. 어려운 상황에서 상법 개정안은 기업의 발목을 잡게 될 것”이라고 토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