롤 e스포츠 역사의 산증인, ‘페이커’ 이상혁과 더불어 최고의 선수로 평가받는 ‘데프트’ 김혁규가 잠시 팬들 곁을 떠난다. 그는 결코 이별을 말하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엔 다시 선수로서 화려하게 복귀하고 싶은 생각만이 가득하다.
쿠키뉴스는 3일 서울 영등포구 KT 롤스터 사옥에서 군 입대를 앞둔 김혁규를 만나 12년간 선수 생활을 되돌아봤다.
김혁규는 역대 최고의 원거리 딜러 중 한 명이다. 2013년 MVP 블루에서 선수 생활을 시작한 그는 삼성 갤럭시 블루에서 기량을 만개했다. 2014 LCK 스프링 우승, 서머 준우승을 차지한 뒤 같은 해 월드 챔피언십(롤드컵) 4강에 올랐다. 비록 롤드컵 우승엔 실패했지만, ‘데프트’ 김혁규의 이름을 전 세계 롤 팬들에게 각인시켰다.
이후 2015년 중국 에드워드 게이밍(EDG)으로 둥지를 옮긴 그는 중국에서의 2년 동안 2015 미드 시즌 인비테이셔널(MSI) 우승, LPL 우승 2회, LPL 정규시즌 MVP, 2016년 전체 MVP 등 굵직한 성과를 이뤘다. 김혁규는 2017년 한국으로 복귀해 KT, DRX, 한화생명e스포츠에서 뛰며 여전한 기량을 자랑했다. 과거를 돌아본 김혁규는 “재밌는 기억들밖에 없다. 데뷔 시즌, 중국 생활 모두 소중한 추억”이라고 회상했다.
커리어의 백미는 2022년 DRX 2기 시절이다. 김혁규는 당시 롤드컵 현장에서 진행한 쿠키뉴스와 인터뷰에서 ‘중꺾마(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를 언급하며 DRX의 롤드컵 우승을 바랐다. 그의 바람대로 DRX는 롤 역사상 최고의 업셋을 일으키면서 롤드컵 우승을 차지했다. 선수 생활 중 유일하게 롤드컵 우승이 없던 김혁규는 이 우승으로 모든 설움을 씻었다. 그는 “아무래도 2022년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그동안 겪은 경험들이 모두 롤드컵 우승을 위한 것 같았다. 정말 값진 결과를 얻었다”고 다시금 감격했다.
김혁규는 2024년, KT로 5년 만에 돌아왔다. 공백기 전 마지막으로 치른 시즌에서 ‘롤드컵 진출 실패’라는 성적표를 받았다. 그는 “굉장히 아쉬웠던 경기들이 스쳐 간다. 다만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준비 과정을 고려하면 크게 아쉬운 건 없다”면서도 “‘퍼펙트’ 이승민이 굉장히 잘하는 선수인데, 기량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했다. 제 평가가 틀리지 않았다는 걸 보여줬으면 한다”고 이승민을 격려했다.
같이 생활했던 선수 중 베스트5를 꼽아달라고 하자, 김혁규는 탑 ‘스멥’ 송경호, 정글 ‘스코어’ 고동빈, 미드 ‘비디디’ 곽보성, ‘케리아’ 류민석를 언급했다. 이어 “경호 형은 어떤 역할을 맡아도 잘할 선수다. 동빈이 형에겐 인게임적으로 정말 많이 배웠다. 보성이는 올해 같이 하면서 생각보다 더 잘하는 선수라 느꼈다. 상체에 베테랑이 많기 때문에 서폿은 창의적인 류민석을 골랐다”고 설명했다.
김혁규는 선수로 성공할 수 있던 점으로 ‘중꺾마’를 힘줘 말했다. 그는 “지나간 것에 연연하지 않으려 했다. 실수를 최대한 빨리 잊었다”며 “결국 패배 후유증을 털어내야 한다. 지더라도 항상 다음을 생각했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롤에 계속 흥미가 있어서 12년 동안 선수 생활할 수 있었다. 다른 분야에서 꾸준히 활동하는 사람들을 보고도 좋은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덧붙였다.
어릴 적 축구선수와 프로레슬러를 꿈꿨다고 수줍게 입을 연 김혁규는 e스포츠 선수를 택한 것에 후회는 없다고 단호히 말했다. “돌아가도 또 하고 싶다. 지금의 저를 만든 건 e스포츠”라며 미소 지었다. 김혁규는 “롤을 통해 삶을 배웠다. 학교에서 얻은 것보다 더 많은 배움을 얻었다. 참는 법, 화내는 것, 사람을 대하는 방법 모두 선수하면서 알아갔다”고 밝혔다.
1년 6개월 공백기는 e스포츠 선수로서 극복하기 힘든 장벽이다. 하지만 김혁규는 여전히 ‘선수’를 꿈꾼다. “제가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아직도 선수를 희망한다”던 그는 “현역 군인이라 연습은 힘들겠지만, 돌아와서 잘 적응하고 싶다”며 “일단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다. 경쟁력이 없다면 팀들이 저를 안 쓰지 않을까”라고 웃어 보였다.
‘최선의 방법을 찾는 선수’로 남고 싶다던 김혁규는 팬들에게 인사말을 건네달라는 말에는 끝이 아닌 시작을 바랐다.
“길게 인사말을 드리고 싶은데, 그러면 뭔가 다시 못 볼 것 같아요. 잘 다녀오고 또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