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J ENM의 텐트폴 무비’ 하면 신파 서사가 큰 줄기일 것이라 예상하기 쉽다. 여기에 주인공이 안중근 의사라면? ‘국뽕’까지 추가다. 뻔한 대목에서 울지 않겠다고 다짐해 놓고 주체 못할 애국심에 눈시울을 붉힐 것을, 내심 기대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 보니 펄펄 끓지 않는다. 은근한 불로 먹기 좋게 익힌 모양새다. 대단히 벅차지도 슬프지도 않다. 일제강점기 독립투사들의 이야기를 다루지만, 의외로 눈물이 나지 않는, 그래서 곱씹게 되는 영화 ‘하얼빈’(연출·각본 우민호)이다.
‘하얼빈’은 1909년, 하나의 목적을 위해 하얼빈으로 향하는 이들과 이를 쫓는 자들 사이의 숨 막히는 추적과 의심을 그린 작품이다. 대한의군 참모중장 안중근(현빈)이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릴리 프랭키)를 척결하기까지 독립투사들의 고군분투를 담았다.
안중근은 한국독립운동사에서 특히나 상징적인 인물이다. 박정민, 조우진, 전여빈, 유재명, 이동욱 등 화려한 출연진을 자랑하지만, ‘하얼빈’은 현빈의 원톱물이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 이유다. 하지만 생각보다 훨씬 길었던 초반 전투 신부터 안중근과 함께한 이들의 얼굴이 어쩐지 더 기억에 남는다. 또 중후반부까지 안중근의 고결한 성품, 이로 인해 촉발되는 내외적 갈등이 이야기의 핵심이긴 하지만, 큰 재미나 감동을 주는 요소는 못 된다.
이를 의식한 듯 후반까지 관객과 함께 밀정을 추리하는 형식을 취했지만, 모집단이 크지 않은 데다 휘말린 캐릭터들이 평면적이라 딱히 반전이랄 게 없다. 특별출연인 정우성의 캐릭터도 그렇다. 서사상 꼭 있어야만 했다면 그 까닭에 공감하기 힘들다. 다만 전반적으로 느린 페이스인 극을 환기하는 데에는 이만한 역할이 없었으리라 짐작한다. 나름의 오락적 요소라고 여긴다면, 크게 몰입을 해치진 않는다.
아무래도 하얼빈역이 경유지인 완행열차다. 113분의 러닝타임에 맞게 며칠을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확장하다 보니 속도감이 부족하다. 하지만 이를 보완하는 것이 박정민, 조우진, 이동욱이다. 김상현(조우진)을 복잡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우덕순(박정민), 우악스럽게 고깃덩이를 뜯는 김상현, 깔고 앉은 눈보다 더 새하얗게 질린 채 이죽거리는 이창섭(이동욱)까지. 진부하다고 봤음에도 영화가 끝나고 잊기 힘든 장면들이 꽤 많다.
안중근의 고된 여정이 끝나는, 관객이 가장 기대하는, 바로 그 신에 당도하면 왜 ‘하얼빈’이 느리게 달렸는지 단번에 납득하게 된다. 그간 모든 감정을 응축한 목소리로 “꼬레아 우라(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는 안중근의 존재감은 폭발적이다. 역사가 이 장면의 스포일러인 셈인데도 소름이 끼친다.
상술했듯 역사적 사실에 기반한 작품치곤 전반적으로 담백한 맛이다. 잔인하거나 자극적이라고 느껴지는 구석이 없다. 극적으로 그릴 여지가 있는 곁가지에서조차 일부러 강약을 조절했다는 인상을 받았다. 이 지점에서 호불호가 갈릴 수는 있겠으나, 제목이 왜 ‘하얼빈’인지 관객 스스로 이해하게끔 만드는 대목이다.
컴퓨터 기본 배경화면을 보는 듯한 영상미도 백미다. ‘역사 영화를 굳이 IMAX로 봐야 할까?’라는 생각이었지만, 역시 ‘거거익선’이다. 몽골, 라트비아, 한국을 오가며 담아낸 광활한 풍경은 보는 이를 압도한다. ‘하얼빈’의 계절이 겨울인 만큼, 잔혹하게 시린 설원이 지독히 고독했을 독립투사들의 발자취를 극대화하는 효과도 있다.
누군가 ‘하얼빈’을 극장에서 보는 게 좋겠냐고 묻는다면, 우민호 감독의 말을 빌려 '와이 낫(Why not?)'이라고 답하겠다. 오는 24일 개봉. 15세 이상 관람가. 상영시간 113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