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울한 사람에게 어떻게 무기를 쥐어줄 것인가

억울한 사람에게 어떻게 무기를 쥐어줄 것인가

기사승인 2025-08-21 09:08:32
우리 사회에서 누군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겠다는 마음을 먹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우선 그 사람과 다시는 얼굴을 보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적지 않은 돈과 시간을 들일 준비도 되어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무엇보다도 판사에게 자신의 억울함을 알릴, 증거가 있어야 한다. 증거가 없다면, 그래서 판사를 설득할 수 없다면, 소송은 돈 낭비, 시간 낭비일 뿐이다.

소송을 제기하려는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자기가 왜 억울한지에 대한 증거를 가지고 있다. 계약서, 메모, 사진, 동영상, 통화 녹취는 기본이고 때로는 목격자나 경험자의 증언이 증거가 되기도 한다. 

그런데 세상에 그런 상황만 있는 것은 아니다. 억울한 것은 분명한데, 피해자가 그것을 증명할 증거를 가지고 있지 않은 경우다. 투자사기 사례를 상상해 보자. 건실한 사업이라는 말을 믿고 덜컥 거금을 투자했는데, 투자금 회수는 안 되고, 혹시 처음부터 사기가 아니었을까 의심되는 상황이라면?

문제는 바로 여기서 시작된다. 애석하게도 우리나라의 법과 제도는 ‘억울한 사람의 손에 어떻게 증거를 쥐어줄 것인가’에 대해 큰 관심을 두고 있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피해자는 자연스럽게, 국가가 개입할 것을 요구하게 된다. 가장 간편한 방법이 형사고소다(이렇게 상황을 이른바 ‘민사의 형사화’라고 부르기도 한다). 수사기관은 수사를 통해 피해자에게 없는 증거를 확보할 수 있다. 혹시나 경우에 따라 가해자가 수사 과정에서 피해자에게 합의금조로 돈을 주며 고소를 취하해 달라고 할 수도 있으니 일석이조다. 

그러나 수사, 재판결과 이런 저런 이유로 피해자가 원하는 결론을 얻지 못하기라도 한다면, 더 이상 피해자의 억울함을 풀 수 있는 방법은 없고, 오히려 사법시스템에 대한 불신과 세상에 대한 원망만 쌓이게 된다.

또 다른 상황을 생각해 보자. 대기업에게 이른바 ‘갑질’을 당한 중소기업의 경우는 어떨까. 대기업 안에서 어떤 사정에 따라 어떤 의도로 어떤 의사결정이 있었던 것인지, 중소기업으로서는 알기 어렵다. 가장 먼저 떠올릴 수 있는 수단은 공정위(공정거래위원회)에 신고하는 것이다. 그런데 공정위 조사 결과 가해기업에게 아무 처분도 없을 뿐만 아니라 검찰 고발도 없다면? 자연스럽게 공정위에 대한 비난이 나올 수밖에 없다.

공정거래법 위반의 경우 공정위의 고발이 없으면 처벌할 수 없다. 이를 공정위의 ‘전속고발권’이라고 한다. 공정위 전속고발권은 경제활동에 관한 국가형벌권을 절제시키기 위해, 법위반에 대한 형사처벌의 필요성을 행정부 내에서 일차적으로 판단하도록 한 제도다. 그런데 법과 제도가 ‘억울한 사람 손에 어떻게 증거를 쥐어줄 것인가’에 관심이 없으니, 전속고발권을 폐지하자는 얘기까지 이어지는 것이다.

수사기관이나 공정위 같은 국가기관들이 한정된 인력으로 전국에서 발생하는 이와 같은 사건들을 충실히 소화할 수 있는가는 별개의 문제이다. 그렇다고 한없이 국가예산을 투입해 이들 기관의 인력을 확충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리고 기업들, 로펌들이 이러한 국가기관들을 상대하는 과정에서 이른바 ‘전관예우’가 작동하는 것은 아닌가 의심이 생기기도 한다.

억울한 피해자에게 증거가 부족한 상황에 대응하기 위해, 민사소송법은 문서제출명령 제도를 두고 있다. 그리고 적어도 법문상으로는, 법원의 문서제출명령을 따르지 않는 경우 판사의 재량에 따라 일정한 소송상 불이익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실무상 법원의 문서제출명령을 따르지 않아 치명적인 불이익을 입었다는 사례는 알려진 바 없다. 그런 점에서, 법원도 ‘억울한 사람에게 어떻게 증거를 쥐어줄 것인가’에 대해 관심이 없다.

이런 상황에서 민사재판이 온전히 돌아가겠는가. 민사재판이, 사실관계를 잘 알고 있는 양 당사자가 각자 ‘어떻게 하면 자신에게 유리한 사실관계만을 드러내고, 불리한 것은 감추어 재판에 이길 것인가’에 골몰하는 장으로 변질된 측면이 있음은 부인하기 어렵다.

이 모든 것을 정상으로 되돌리는 가장 근본적인 방법은 결국 억울한 사람의 손에 증거를 쥐어줄 제도를 만드는 것이다. 억울한 피해자의 손에 증거를 쥐어주어, 사법제도를 활용하여 자기 피해를 스스로 보전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주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최근 ‘한국형 디스커버리’ 제도 도입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고무적이다. 디스커버리 제도란 주로 영미권에서 본격적인 재판에 앞서 상대방 또는 제3자로부터 소송 관련 정보를 얻거나 사실관계 확인을 위하여 진행되는 사실확인 및 증거수집 절차를 말한다. 디스커버리 제도 하에서 분쟁의 양 당사자는 각자가 가진 증거를 상대방에게 공개해야 한다. 억울한 사람도 이 제도를 통해 상대방이 가진 증거를 손에 쥘 수 있다. 이런 상황이라면, 사실관계를 속여 재판에서 이긴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그러다 보니 미국의 경우 법원에 제소된 민사소송 사건 중 90% 이상이 정식 재판에 앞서 당사자 사이의 합의로 종결된다고 한다. 

국가가 전 국민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수는 없는 것이기에, 국가의 개입은 최소한에 그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리고 그보다는 억울한 사람의 손에 무기를 쥐어주는 방향으로 제도가 진화할 필요가 있다. 

몇년 전 어느 토론회에서 만났던 가습기살균제 참사 피해자 가족 한 분의 말씀은 여전히 많은 울림을 준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기이다. 무기를 쥐어달라.

권태준 변호사
이 기사 어떻게 생각하세요
  • 추천해요
    추천해요
    0
  • 슬퍼요
    슬퍼요
    0
  • 화나요
    화나요
    0
추천기사
많이 본 기사
실시간